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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꽃샘추위가 애잔한 겨울처럼 차가운 초 봄 무렵이었다. 나는 초췌한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 그 흔한 안주 하나도 없이 소주를 들이 키고 있었다. 씁쓸한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흘렀지만 마음속의 헛헛함은 도무지 채워질 줄을 몰랐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10년... 장장 10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피땀을 흘려가며 일구어 온 공장이 지난밤... 화재로 완전히 소실됐다. 당장 돌아올 어음문제야 기한이 남아 있으니 여기저기 돈을 꾸어서라도 막는다지만, 나를 믿고 납품을 맡긴 거래처 사장님들에 대한 신뢰나 작은 공장이나마 내 것처럼 열심히 일해 주었던 직원들을 볼 면이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화재보험을 들어 두어 큰 손실은 없다 해도, 공장을 꾸려가며 흘려온 나의 땀과 노력이 송두리째 불타버린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당신 지금 술이나 마실 때 에요? 보험회사는 가봤어요? 뭐라 해요? 보상은 다 해준데요? 얼마나 준데요?” “허... 사람 참... 보상금이 문젠가? 내 새끼처럼 꾸려오던 공장에 불이 났는데 마음이 좋겠소? 보험금이야 때 되면 알아서 나오겠지! 내가 가서 난리 친다고 화재 보상금 더 줄 놈들도 아니고...” 내 속도 모르고 아내는 어떻게든 보상금 한 푼이라도 더 받을 방법이 없나 애를 썼다. “으이구... 그러게 그깟 공장 때려 치고 장사나 하자니깐! 희숙이 엄마 얘기 들어보니까 목 좋은데다가 요즘 유행하는 프렌차이즈 커피숍 차리면 돈을 그렇게 많이 번대요! 아니 왜 고생고생해가면서 힘들게 공장만 할 라고 허요? 기깔난 인테리어에 멋드러진 양복입고 출퇴근 하면 좀 좋수?” “내가 커피고 뭐고 뭘 안다고 그걸 하나 이 사람아!” “프렌차이즈가 뭐예요! 암 것도 몰라도 본사에서 다 해 준답디다! 목도 알아봐 주고, 광고도 해주고, 직원 교육부터 기계까지 싹 다! 어쩜 이이는 요즘 세상 좋아진 줄도 모르고! 암말 말고 보험회사에서 돈 나오면, 그 금형 공장 같은 건 때려치우고, 당장 나랑 프렌차이즈나 알아보러 다닙시다. 아니 딱 들어봐도 공장 사장, 사모님 보다는 근사한 커피숍 사장 사모님이 훨씬 듣기 좋잖수! 안 그래요?” “시끄럽고 당신은 애나 잘 봐!”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아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십수년도 넘게 매진 해 온 내 일을 무시하는 것 같아 조금 화가 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평생 싸구려 믹스커피나 마시던 내가 갑작스레 고급스런 커피숍을 차려 손님들에게 내 간다는 건 왠지 사기고, 가짜 같았다. 평생 기름 묻은 작업복이나 입고 살던 내가 만든 커피엔 향긋한 원두냄새 대신 때 찌든 기름 냄새가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휴! 벽창호 같은 양반! 아유! 올해는 정말 삼재라도 되나? 애는 공 차다 다리가 부러지질 않나, 남편 공장은 불이 나서 홀랑 타버리질 않나! 나도 허리가 안 좋고... 이건 뭐 굿이라도 해야 되나?” “굿 같은 소리 하네! 그런 미신 같은 거 좀 믿지 말라니까!” “아니... 내가 올 초에 창신동 용한 무당을 만났는데 그이가 신기하게도 올해 조심해야 된다고 하더라니깐? 부적! 그래 부적을 써야 된다고 했는데, 아이고! 내가 그 돈 삼 십 만원이 아까워서 그걸 안했지 뭐요. 어휴 진짜 굿이라도 했어야 했나 어이구!” “거! 사람 참... 쓸 데 없는 짓 하고 다녔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아내에게 핀잔을 주고 있는 사이 문이 열리고 아들이 집에 들어왔다. 아들은 얼마 전 학교에서 제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다리가 부러져 한 쪽에 큼지막한 깁스를 하고 있었다. “다리도 부러진 놈이 목발 짚고 어딜 다녀 오냐?” “PC방에요. 히히 부러진 지 좀 되니까 이젠 좀 댕길 만 해요. 깁스도 해서 아프지도 않고” “이 놈 자식 밥은 먹고 다니냐?” “그럼요! 근데... 게임을 열심히 해서 그런가? 살짝 출출하네? 히히힛! 엄마 뭐 먹을 거 좀 없어요?” “에라 이놈아! 다리를 다쳤으면 그 참에 공부나 열심히 할 일이지... PC방은 무슨!! 넌 이 엄마 속 터지는 꼴 보고 싶냐? 낼 모래면 고등학생이여!” 올해 중3이 된 아들은 공부는 잘 못해도 누굴 닮았는지 넉살이 좋았다. 아내는 주방에서 나와 다친 발로 PC방에 다녀온 아들을 못 마땅한 듯 흘겨본다. 그리고는 찬장에서 조그마한 캔 통조림 하나를 꺼냈다. 푸른색 라벨지에 하얀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 캔 통조림이었다. “애 배고프다는데 그건 왜 꺼내?” “얘만 입 이유? 우리 코코도 밥 때랍니다. 코코야 이리와 엄마한테 와! 병석이 넌 얼른 씻어 엄마가 코코 밥 주고 니 밥도 금방 차릴 테니까!” 아내는 예전부터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다. 털이 온통 하얀 고양이를 구해와 코코라고 이름 짓고는 살뜰하게 챙겼다. 그 탓인지 고양이는 유독 아내를 많이 따랐고, 나와 아들에겐 좀처럼 친근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네 금방 씻고 올게요. 근데 엄마! 마당에 도꾸 밥은 주셨어요?” 아들이 묻자 아내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도꾸는 마당에서 키우고 있는 우리 집 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키우시던 개였다. 도꾸가 10살 즈음 됐을 때, 아들 병석이 제 할아버지를 졸라 힘들게 시골에서 데리고 왔다. 하지만 아이들이 하는 게 대게 다 그렇듯 도꾸 역시 병석이 중학생이 된 즈음부터는 찬밥신세가 된지 오래였다. “몰라 그 놈의 개, 늙더니 도통 짓지도 않고 나와 보지도 않고... 으이구... 나는 냄새나서 개는 싫어! 그리고 그 이름이 도꾸가 뭐니 도꾸가! 찰스라고 부르라니깐!” “엄마는... 할아버지가 도꾸라고 지어놨는데 이름을 왜 바꿔요. 도꾸 좋잖아요. 흔하지도 않고” “어후~ 촌스러워! 됐다 됐어! 내가 어젠가 그젠가 밥을 줬는데, 손도 안대고 그냥 놔뒀더라 입에 안 맞나? 개 주제에 반찬투정 하는 거야 뭐야? 갈 때가 돼서 그런가? 시아버지도 아니고 내가 늙은 개 수발 들게 생겼어?” “뭐라구!!”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내는 잠시 놀란 토끼눈이 되어 나를 쳐다본다. 평소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성격의 나였기에 아내도 조금은 당황한 듯 했다. “도꾸, 돌아가신 아버지한텐 가족 같은 개니까 잘 좀 보살펴 달라고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그 놈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어!” “아니 이 양반이 그깟 개 밥 주는 일로 왜 이렇게 역정을 낸데! 코코야 놀래지마 놀래지마! 엄마가 너만 이뻐하니까 아빠가 화가 났나봐!” 아내는 그깟 일이 뭐가 대수냐는 표정을 지으며 품안의 고양이 코코를 진정시키느라 바쁘다. “내가 전에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도꾸 아니면 우리 부모님 칠팔년 전에 이미 다 돌아가실 뻔 했다고! 내가 요즘 바깥 일 때문에 정신이 없으니까, 도꾸 좀 잘 돌봐 달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그게 그렇게 힘들어?” “어머! 어머! 이 양반 봐! 그깟 늙은 개 한 마리 때문에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르는 거야? 그 얘기야 들었지! 아주 귀에 딱지가 앉겠네! 딱지가 앉겠어! 전에 시골 아버님 집에 불이 났을 때 저 똥개가 사방 팔방에 가서 짖어댄 덕에 겨우 살았다 뭐 그거 아녜요 그거! 그게 무슨 전래동화도 아니고...참...” “아니 그걸 다 아는 사람이 그래?” “아이고... 아버님 어머님 돌아가신지가 언젠데, 그걸 가지고 아직도 상전 모시듯 한단 말이우? 됐수 됐어! 나는 애초에 개는 꼬라지도 보기 싫다고 안 해요? 내가 말은 안했지만 어렸을 때 개한테 한 번 크게 물려서 여튼 난 개만 보면 오금이 저리고 꼴도 보기 싫다니깐! 당신 그렇게 좋으면 당신이 저 개랑 나가서 살아! 안 그래도 난 저거 금방이라도 죽을까봐 무서워 죽겠어! 난 개든 뭐든 내 집에 시체생기는 꼴 못 봐요! 지금이라도 당장 어디 시골에 던져버리고 오던가 하라구요!” “아니 당신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짐승이라고 그렇게 막말하면...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아니 내가 못 할 말 했수? 개 15살이면 사람으로 치면 팔순도 넘은 나이유. 오늘 당장 죽어도 호상인데 뭐 대단한 말 했다고...” “됐어 됐다구!!” “아니 공장에 불 난게 내 탓도 아닌데, 괜시리 쓸데없는 걸로 트집잡아 역정내기는 참... 어디가요! 여보! 여보!” 난 그렇게 날 부르는 아내를 뒤로하고 역정을 내며 현관 밖으로 나왔다. 아내가 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제 살아봐야 얼마 살지도 못할 도꾸에게까지 막말을 하니 너무 화가 났다. 그런 모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아내에게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최근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로 도꾸에게 신경 한 번 제대로 써주지 못한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현관을 나와 마당 한 켠으로 가자 작고 낡은 개 집이 눈에 들어왔다. 낡았지만 멋드러진 빨간 지붕을 가진 도꾸의 집이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도꾸를 불렀다. “도꾸야” 반응이 없었다. 문득 옆을 바라보니 차갑게 식은 맨 밥 한 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한 쪽 귀퉁이는 먹다 남은 된장국이 약간 묻은 듯 누랬지만, 확실한 건 도꾸가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거였다. 나는 문득 든 불길한 생각에 다급히 도꾸를 부르며 허리를 숙여 개집 안으로 손을 뻗었다. “도꾸야! 도꾸야 이놈!” “끼이잉” 옅은 전등불 사이로 살짜기 고개를 드는 도꾸가 보였다. 나이를 많이 먹으면 개들도 귀가 먼다더니 도꾸도 그랬던 모양이었다. 사실 눈은 재작년부터 거의 보이지 않는 도꾸였다. 동물 병원에 데려가도 나이가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다는 얘기 뿐이었는데,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는 힘없이 내 손에 제 머리를 부비는 도꾸를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잘 키우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했었는데...” 도꾸의 혀가 내 뺨을 간질인다. 자주 씻겨주지 못해서인지 역한 냄새가 났지만, 그건 그거대로 미안할 뿐이었다. 사람은 모름지기 서울로 가야 한다고 힘든 형편 속에서도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아들을 유학 보낸 부모님, 그리고 부모님의 바람대로 서울에서 공부하고 서울에서 직장을 얻어 정착한 아들... 간간히 찾아뵙기는 했지만, 품안에 있던 자식을 멀리 보낸 부모 가슴의 헛헛함을 어찌 채울까? 도꾸는 그런 부모님이 말년에 정이라도 붙이겠다며 키우던 개였다. 그것도 보통 개가 아니라, 수년 전 누전으로 부모님 집에 불이 났을 때, 그 한 밤에 동네 방네 찾아가 짖어준 덕분에 부모님 목숨까지 구해준 고마운 개였다. 비록 지금은 두 분 모두 연로하여 돌아가셨지만, 그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의 고마움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도꾸 밥 좀 가져왔어요. 화 푸세요” “병석아” “제가 어렸을 때, 키우고 싶다고 떼를 써놓고는 신경 못 써서 죄송해요.” “됐다. 니가 뭔 잘 못이냐 느이 엄마 말 하는 본새가 못 나서, 그게 화가 난거지” “에이... 엄마 원래 좀 그렇잖아요. 말을 좀... 막하는 스타일이라 그렇지 마음은 또 안 그러니까... 아버지가 이해하세요.” “어휴... 이 눔이 이제 살아야 얼마나 더 살 거라고...” 내가 푸념을 늘어놓자, 도꾸는 백내장으로 희뿌옇게 변한 눈으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문득 돌아가신 부모님이 떠올랐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 서울 보내고, 자식처럼 아끼던 개도 떠나보내신 그 분들 마음은 어떠셨을까? 마음속 가득 짐만 늘어갔다. 불타버린 공장, 보험금이 나온대도 막막한 앞 날, 살아계실 제 못 다한 효도... 그냥 그렇게 술 한 잔 더 하지 않고서는 쉬이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2.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부터 옷을 차려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어음 문제도 걸렸고, 공장 설비 일부를 친한 거래처에서 중고로 빌릴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여보... 보험회사 가요?” “아니! 거래처 김사장 좀 보러” “글쿠나... 아으 어젠 미안해요. 난 그냥 뭐 원래 개도 안 좋아하고... 공장에 불도 나고, 애는 다치고 하니까 괜시리 짜증이 나서... 아 뭐 암튼 내가 밥은 잘 챙길께요.” 나가보려는 차에 아내가 다가와 입을 쌜쭉 내밀며 말했다. 딱히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도 아니요, 사과의 말을 전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건 그거대로 아내만의 사과 방법이었다. 그걸 잘 알기에 난 별 말 없이 구두를 신으며 대답했다. “됐소... 나 다녀오리다.” 나 역시 딱히 누그러든 표정은 아니었지만 내 방식의 화해였다. 아내도 그걸 알기에 금새 얼굴이 풀어져 웃는 낯으로 달려들어 내 손에 종이 쪽지 하나를 쥐어주며 말했다. “김사장 보고 안 바쁘면 거기 좀 가봐요!” “뭔데?” “아니... 저기... 그게... 옆집 수미 엄마가 그러는데 이 집이 그렇게 용하데...” “뭐 용해?” “역정 내지 말고... 말 좀 들어봐요! 불도 나고 애도 다치고 회사 사람들도 안 좋고 그랬잖아... 그게 다 마가 끼어서 그렇데! 뭐라 하지 말고 꼭 좀 가봐요! 맘 같아선 나도 이런 말하기 싫어서 내가 가고 싶은데 그 점집은 당사자가 와야 풀어준데... 신내림 받은 지 얼마 안 되는지 아주 신통방통하답디다.” “하아... 이 사람 참! 점보고 무당 찾아가고 그래서 풀 일 일이면 세상에 안 될 일이 무에 있어!” “또 시작이네 또! 또! 으이구! 몰라! 암튼 난 주소하고 적어서 줬으니까 가든지 말든지! 몰라! 또 불이 나고, 누가 다쳐도 내 책임 아니유! 그러게 공장 같은 거 때려 치고 커피숍이나 하자니깐! 으이구 답답한 양반!” “뭐야! 말이면 단 줄 알아!” “됐어요 됐어! 김사장이나 만나고 오슈! 술 먹지 말고! 일찍 들어와! 고기 굽게!” “내가 지금 고기가 목구멍에 넘어 갈 참인가!” “아니 안 좋을수록 밥을 잘 챙겨먹어야지! 병이라도 나면 어쩔라고!” 자꾸만 내 속을 긁는 듯 한 아내의 말에 짜증스레 말했지만 사실 나도 마음이 조금 약해져 있었다. 사람이 힘들면 미신에라도 의지하게 된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멀쩡하던 아들 놈 다리가 부러지고, 회사는 불타고, 나와는 별 연관이 없겠지만 올해 공장 직원들 중에 크게 다친 직원도 두 명이나 됐다. 최근 몇 년간은 작은 사고 한 번 없었던 공장이었는데 말이다. 거래처 김 사장을 만나러 가면서도, 돌아오는 길에도 내내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이 꼬물딱 거렸다. 아내가 준 쪽지... 꾸깃하게 구겨진 종이가 마치 답답한 내 마음속 같았다. [봉신당, 서울 ㅇㅇㅇ ㅇㅇㅇㅇㅇ ㅇㅇㅇㅇㅇㅇ] 3. 물어물어 당도한 곳은 여느 점집과는 조금 달랐다. 흔히 보이는 만(卍)자 표식도 없었고, 무당집에서 흔히 볼 법한 연등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냥 아주 허름한 3층짜리 건물의 꼭대기 층에 위치해 있었고, 붓으로 직접 휘갈겨 쓴 한 장의 플래카드가 간판 대신이었다. [덕은 덕으로 업은 업으로, 봉신당] “저... 여기가...” “아이구 손님 운도 좋으시네 방금 예약 손님 하나가 캔슬 하셨는데 들어 오세요.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젊은 남자 하나가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책상 하나만이 덩그라니 놓여 있을 뿐 흔한 집기 하나 없어 무척이나 휑해보이는 내부가 영 못미더웠다. 그래서인지 점집이 아니라 숫제 흥신소나 사채업자 사무실 같은 느낌이 더 강했다. “자 자! 머뭇거리지 마시고 어서 들어가세요. 저희가 원래 이런 거 하는 사람들이 아닌데, 지금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한 동안 좀 하게 됐습니다. 좋은 기회에요 어서 들어가세요.” “아... 저... 그... 그게...” 뭔가 억지로 등 떠밀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젊은 사내는 그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퇴로를 막고 몸을 밀착해 안쪽 방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뭐... 뭐야?] 떠밀리다시피 하여 안으로 들어갔지만 의구심은 더 커졌다. 아내 말로도 최근에 신내림을 받았다고는 했지만 너무 어려 보였다. 잘해야 스무 살? 어쩌면 그보다 훨씬 어릴지도 몰랐다. 애 띤 얼굴에 젖비린내 날 것 같은 풋내가 그득한 처녀아이였다. 그 앞에 놓인 작은 책상도 불경처럼 보이는 낡은 책자가 놓여 있었는데, 실상은 불경보단 수험서나 참고서가 더 어울릴 법했다. [애기 동자 모신 무당 얘긴 들어봤어도, 저건 숫제 애잖아 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빨리 돌아 나가자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책을 향해 있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얼굴이 화장이라도 한 듯 온통 새하얀데, 입술은 작은 것이 새빨갛고, 파르르하니 긴 속눈썹이 위로 들어 올려졌다. 그렇게 눈이 마주쳤다. “아아... 저기 그러니까 제가” 아니다 싶으니 그냥 돌아나가면 그만인데, 도대체 내가 왜 그럴까 싶게 말을 더듬었다. 몸은 요상하게 굳어서 뻣뻣한게 이게 무슨 요지경인가 싶을 즈음 앞에 앉은 작은 처녀아이가 버럭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산송장을 집에 들여 두고 있으니, 근심과 우환이 끊이질 않는구나!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 :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돌아오는 것이 있다)이라 했다. 놓아주질 않으니 갈 수가 없고, 가질 못하니! 복(福)이 와도 누울 자리가 없구나! 무릇 사람이건 짐승이건 덕업(悳業)을 입었으면 응당 그 보답을 해야 할 것인데, 네 어찌 恩惠(은혜)를 갚기는커녕,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산송장을 만들었느냐! 그러니 복(福)은 왔다 냉큼 가고, 화(禍)만 겹겹이 쌓이는데... 네 어찌 아직도 죄를 모르느냐!” 거친 호통소리 흡사 죄인을 바라보듯 부릅뜬 눈, 금방이라도 살을 베일 것 같은 날 선 음성에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요, 그렇게 하도록 배운 적도 없었다. 다만 흡사 내 모든 걸 꿰뚫어 보듯 추상같이 쏟아진 그 말들에 나도 모르게 압도되었던 것 같았다. “그... 그게 무.. 무슨...” “네 들어오는 입구에서부터 개 짖는 소리가 우렁찬데 어찌 숨길 요량이냐!” “아... 아아...” 머릿속이 한 대 쥐어 박힌 것처럼 멍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흐릿했던 어떤 잔상이 점점 더 선명해진다. 무언가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날 바라본다. 먼 발치에서 부터 나를 보며 달려오는 모양이 정겹다. “도... 도꾸...” “덕을 받았으면 덕으로 갚아야지, 어찌 목줄을 죄고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는가! 고향산천 그립다며 짖어대는 통에 복(福)이 놀라 달아나는데, 남은 것은 화(禍)요. 쌓이는 것은 업(殗)이니, 응당 순리대로 풀게나.” “네? 네?” “견공이라 함은 본시 머리가 총명하고 한 번 보고 들은 것을 잘 잊지 못하는데, 그 본새가 물 짐승 중 연어와 같으니 내 더 가르쳐 줘야 알아먹겠는가?” “아... 아닙니다.” “시끄럽고 냉큼 가게, 시끄러워 신령님들 다 노하겄네! 냉큼 가게!” “네! 네!” 쫓기듯 서둘러 문 밖으로 빠져나온 난, 내내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이었다. 내 속을 까뒤집어 훤히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신내림 받은 지 얼마 안 된 무당일수록 신통 방통 하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일평생 살면서 저렇게 신묘한 재주는 본 적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소문 많이 내주시고, 인연이 있으면 또 뵙겠죠. 참 이거 받으시죠?” “이건... 무슨...” “마일리지 카듭니다. 10번 오시면 한 번 공짜! 요 앞 커피숍도 이런 거 하데요? 저희도 만들어 봤습니다.” “아... 네...” 멍해 있는 사이, 문 밖의 젊은 사내에게 30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뺏기다시피 했지만, 머릿속에 어지러운 것은 온 통 도꾸와 아버지에 대한 생각뿐이지, 지갑 속 먼지 하나까지 털어 바친 30만원은 아니었다. [봉신당?] 4. 집에 돌아온 나는 곧바로 차의 뒷 자석을 접어 평평하고 널찍하게 만들었다. 그리곤 안방의 장롱을 뒤져 몇 년째 쓰지 않던 손님용 이불을 꺼내 푹신하게 깔았다. “아니 이 양반이 왜 이래! 멀쩡한 이불을 왜 차에다 깔아? 뭐하는 진 몰라도 점심땐데 밥은 먹고 해! 어라? 뭐유? 그 개는 뭐 할라고 차에 싣는데? 여보! 여보!! 도대체 뭐야? 응?” “여보! 나 좀 가봐야겠소!” “아니 개가 오늘 낼 오늘 낼 하니까 어디 갇다 버리는 건 좋은데, 냄새나게 멀쩡한 이불은 왜 거기다 깔아! 아 그리고 갈 때 가더라도 밥이라도 들고 가라니깐!” “당신! 진짜 그럼 벌 받아! 여튼 나 아버지 댁에 좀 가봐야겠으니 당신은 그리 알아!” “여보! 여보!” 5. 황당한 표정으로 대문 앞까지 나와 소리치는 아내를 뒤로 하고, 나는 서둘러 도꾸와 함께 돌아가신 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비록 아버지 사후 따로 관리를 하진 못했지만, 시골이라 팔리지 않아 집은 폐가처럼 남아 있었다. [끼이이익] 열쇠를 꽂고 돌리자 낡은 자물쇠가 경첩과 한 몸이 된 채 녹슨 소리를 내며 밀려나간다. “도꾸야... 이리 온...” 내가 부르자, 열려 있는 차 뒷 자석에서 도꾸가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그리 고개를 돌려봐야 백내장으로 희뿌옇게 변한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일텐데, 무엇을 찾는지 녀석은 연신 고개를 움직인다. 그리곤 무언가 익숙한 내음을 찾는 듯 코를 내밀었다. 바싹 메마른 그 콧잔등은 그 늙고 노쇄한 몸뚱이 중 제일 쓸만한 건지... 도꾸는 그제서야 제 비루한 몸뚱이를 차에서 내려 비틀비틀 걸어왔다. “내가 저 앞 큰길가에만 와도, 신나서 뛰어 오던 게 너였는데... 미안타... 그 몇 년 새 너만 이리 늙었구나” 추억속의 한 장면이 떠올라 중얼거려 보지만, 내 말이 귀에 와 닿지 않는지 도꾸는 나를 지나쳐 살짜기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빼꼭 내민다. “앞도 보이지 않는 놈이... 하아아...” 도꾸는 무얼 찾는지 잡풀이 무성한 아버지의 집 마당을 훑어본다. 이제는 을씨년스러운 폐가가 됐지만, 눈 먼 도꾸의 시선엔 아주 오래 전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살던 추억 속 그때가 어릴 듯 했다. 녀석이 힘들여 걸음을 내딛는다. 예전 같으면 한 달음에 달려 들어가 빙빙 돌며 꼬리라도 힘껏 흔들어 댔으련만, 너무 오랜 기다림에 귀향객(歸鄕客)의 몸도 마음도 늙었다. 터벅 터벅 힘주어 걷는 그 걸음이 힘겨워 보였지만, 도꾸는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걷고 몸을 부대끼고 향취를 맞본다. 그렇게 하기를 몇 분이나 걸렸을까? 갑자기 노쇄한 귀향객이 마당 한 가운데에 조용히 주저앉는다, 머리를 제 꼬리 쪽에 파묻는 모양새가 흡사 이른 잠에라도 빠질 기세다. “도꾸야 괜찮으냐?” 내가 묻자 도꾸는 대답이라도 하 듯 낑낑거렸다. “끼잉끼잉...” 도꾸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하기엔 꽤 오랫동안 낑낑 거렸다. 못 다한 말들이 그리도 많았을까? 그런 도꾸가 반가운지 느즈막한 저녁에 때 이른 훈풍이 분다. 아침 뉴스에서도 이번 주 내 꽃샘추위가 한창이라 했기에, 왠지 그 바람이 석연찮다. 돌이켜보니 나 어릴 적 그때는 이런 바람이 당연하게 느껴졌었는데, 세상을 살고 바삐 움직이다보니 작은 바람조차 음미해본 것이 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훈훈한 바람에 나지막한 저녁 노을이 낡은 농가를 어루만진다. 따듯한 햇살의 마지막 기운에 도꾸도 나른한지 눈을 감았다. 6. 그리고 그것이 도꾸의 마지막이었다. 잠든 것처럼 편안히, 그리고 조용히, 도꾸는 자신이 태어나 살던 그 곳에서 잠들었다. 끼잉거리며 울던 마지막의 흐느낌은 길었던 세상사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사랑하던 누군가에게 보고 싶다 속삭이는 마지막 고백이었을까? 난 아직도 그 봄날의 일렁이던 바람을 기억한다. 삶의 연륜이 부족하고, 아직도 미련하여 다 알아듣지는 못 하지만 그 바람은 작은 속삭임이었을 것이다. 두 볼이 아닌 귓가를 간질이고, 머리칼보단 가슴팍 한 켠에 흩날리는 속삭임... [도꾸야 니가 올 때도 되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는기라... 내 한참 전부터 여서 기다렸다 아이가! 기왕지사 가는 길 내가 마중 나오믄 니가 을매나 반가워하겠나? 그래서 내 왔다. 자 내랑 가자... 할멈도 한참을 기다렸다 아이가? 병석이 손에 너 보내고, 은제나 보나? 은제나 보나, 살아 생전 보려나 했다. 인저 가자 도꾸야... 가자... 우리 다 너 올 때만 기다렸다 안하나. 가자... 울지마라! 이제 어디 안간다. 걱정마라 이제 안 헤어질끼다...천년만년 같이 살자] |
출처 | 나, 오래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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