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을 나오자 강 사원이 말을 걸었다.
"아 쫌 빨리 나오지."
강 사원이 보채면서 말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니터에서 본 단어가 자꾸만 머리 속에 아른거렸다.
"대답도 안 하네 이제? 누가 올까봐 겁나 긴장타면서 있었구만."
나는 말 없이 강 사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돌아섰다. 강 사원이 대체 무슨 일이냐고 복도를 따라왔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건내고 혼자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다. 사후세계가 이 곳 하나 뿐이라는게 명백한 사실이었는데 어째서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살아 생전에나 사후세계를 알 길 없으니 천국과 지옥이라는 추상적 개념만이 지배적이었다. 허나 방금 모니터에서 본 것은 명확히도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죽어서 지옥에 태어나는게 당연한 일인데 다른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은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걸까.
뒷통수를 강하게 맞은 것 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의자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순간 몇 일 전 여자가 소리치던 말이 생각났다.
- 우리 애는 어디있냐고! 같이 죽은거면 내 옆에 있어야 될 거 아니야!!!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
오늘도 변함없이 악몽을 꾸었다. 이슬 머금은 잔디밭에 여자와 누워 있었고, 언덕 위에서 매몰차게 내려오는 차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에는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감았고 차에 휩쓸려 나가는 찰나의 순간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됐어... 그만해."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밤새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베개 밑이 축축했다. 매 번 반복되는 악몽에 지긋지긋해졌다. 최근들어 악몽의 빈도가 더 잦아졌다. 이제는 잊어야할 사람이 자꾸만 꿈 속에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악몽이 끝나고 나면 서서히 내 어깨에 죄책감이라는 응어리가 올라왔다. 그리고 나를 있는 힘껏 옥죄었다. 씻을 수 없는 상처였음을 더욱 잘 알기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러한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하는 조그마한 기대감은 덧 없을 뿐이었다.
뜨거운 물에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회사로 나섰다. 아직 해야할 일이 남아 있었다.
*
"그러니까 내일 그 VIP 고객들이 온다는게 확실하지?"
"그렇다니까. 속고만 살았나. 내가 마케팅팀 애한테 물어봤어."
강 사원에게 검은그림자들이 언제 또 방문하는지 물었었다. 외골수 성격의 나와는 달리 사교성이 좋은 그는 다른 부서 사람들과 두루두루 알고 지냈다. 덕분에 내일 검은그림자들이 회사에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근데 너 요즘 이상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저번에 부장님 사무실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미안하다. 아직은 말하기가 좀 그래."
"아니 뭐 도움이 필요하면 말이라도 하든가. 그래야 내가 도와주든 말든 할거 아니야."
"정말 미안하다. 나중에 다 얘기해줄게."
강 사원이 머뭇거리는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그 VIP 고객들이랑 뭔가 관련된거야? 그 시커먼 것들?"
"뭐, 그렇기는 한데..."
강 사원이 급히 주변을 두리번 거리더니 몸을 낮추었다.
"야. 너 몸조심해라. 뭔가 이상한 일을 꾸미나 본데 진짜 큰일난다."
"야, 아니야. 그냥 뭐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해서 그런거니까."
"너. 예전에 주임님 왜 짤렸는지 모르지?"
주임님이라는 말이 강 사원의 입 밖에서 나오자 고개를 화들짝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몰랐나보네. 하긴. 자기 부사수한테 그런 이야기하기는 그렇겠지. 아는 사람도 몇 없을테고."
"자세히 좀 얘기해 봐."
"진짜 모르는구나?"
"그냥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나가신거 아니였어?"
"야! 생각을 해봐라. 너 같으면 이 회사 다니면서 편하게 지내겠냐. 아니면 저 노예들처럼 평생 고생하면서 살겠냐."
나 역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찜찜했다. 특히 저번에 주임님을 만난 이후로도 계속 마음이 석연찮았다.
"말해줘?"
"짤린게 맞는거야?"
"당연하지. 그렇게 회사에 헌신하면서 다녔던 분이신데. 제 발로 나갈 리가 있겠어?"
강 사원은 말을 꺼내면서도 곁눈질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주의했다.
"사실 주임님도 너처럼 VIP고객들 캐내고 다녔다더라."
"주임님이??"
뜻 밖의 얘기에 더욱 몸을 강 사원에게 가까이 댔다.
"응. 나도 이거 저번에 인사과장한테 들은건데. 아는 사람 별로 없다니까 너도 조용히 하고."
강 사원이 손가락을 입에 댄 채 쉿- 하고 작게 소리내었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짤린 거라고?"
"그래 임마! 걔네들이 뭐하는 애들인지는 몰라도 회사 직원 하나 그냥 아작내는 사람들인거라고. 그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말고 조용히 회사나 다녀. "
"주임님이..."
어째서 주임님이 내게 건내준 메모지대로 조용히 업무나 하라고 일렀는지 알 것 같았다. 주임님 또한 나처럼 그들을 캐내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어떠한 정보를 얻었고 어떤 목적으로 그리 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으로 마음에 짚이는게 있기는 했다. 이런 지랄맞은 업무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어째서 그 아무도 구원에 성공하지 못하는걸까. 어째서 그들은 지옥의 노예로 사라지는 걸까. 대체 그 누가 이들에게 1분이라는 시간을, 신이라도 감히 허락치 못할 전지전능한 기회를 부여해주는 걸까.
다시금 주임님과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본 그대로 주임님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검은그림자들 고객정보에 선명하게 적힌 '천국' 이라는 글자를 주임님 또한 알고 계셨냐고.
서둘러 일어나는 나를 강 사원이 붙잡았다.
"이거 봐라. 또 말도 없이 어디로 사라질려고 그러네."
"정말, 진짜 미안하다. 내가 꼭 다 얘기해 줄테니까 좀만 기다려봐."
"너 진짜 조심히 다녀라. 그 시커먼 것들은 나도 맘에 안 들지만..."
강 사원의 말에 오랜만에 싱긋 웃어보였다. 갑작스러운 웃음에 강 사원은 토하는 시늉을 했다.
"아무튼 이래저래 알려줘서 고맙다."
강 사원의 손인사를 뒤로 하고 나는 황급히 회사 밖으로 나왔다.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주임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노예들의 신음소리와 악마들의 채찍소리가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지만 당최 주임님은 보이지 않았다. 언덕에서 노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결국에는 내려와서 그 무리로 들어갔다.
뜨거운 공기와 쉰 땀내음을 헤치고 돌아다녀봐도 주임님을 찾을 수 없었다. 인근에 저번에 말을 걸었었던 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죄송하지만 몇 일 전에 저랑 얘기 나누었던 노예, 아니 그 분이 어디 계신지 좀 알 수 있을까요?"
나의 물음에 악마는 흘깃 쳐다보았다. 그리고 굉장한 콧김을 뿜어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왠지 모르게 약이 올라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저번에 저랑 있었던 안경 쓰신 분 어디 계시냐구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나."
퉁명스럽게 대답한 악마는 내게 고개를 돌려 노예들을 쳐다보았다.
칙-
우리들 앞을 지나가던 노예에게 힘껏 채찍을 휘두른 악마는 다시 내게 웃음을 보였다. 역겨움이 몰려왔다. 더 이상 알아낼게 없다는 생각에 그 자리를 뜨고 다시 언덕으로 올라왔다. 다시 천천히 길을 걸으며 노예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지만 결국 주임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
같은 시간, 자욱한 안개처럼 검은 형체의 무리가 둘러 앉아 있었다.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 모를 공허한 목소리가 그들 중 하나에게서 뻗어나왔다.
"재밌군요."
"그렇죠?"
무리 중 다른 누군가가 대답했다. 검디 검은 몸체를 울렁거리며 소리를 내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내뱉을 것 같았다. 서로가 겹겹히 붙어있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구름을 보는 것만 같았다.
2마디의 짧은 대화가 끝나고서는 더 이상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모두 앞에 놓인 영상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검은 존재들 중 하나는 영상을 보며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지르기도 했고, 어떤 이는 수증기가 일으듯이 몸을 비비꼬는 행세가 경련을 일으키는 듯 했다. 그렇게 저마다의 반응을 보이며 앞에 놓인 유희에 시간을 보냈다.
영상에는 아이를 꼭 껴앉고 있는 여자가 도로 한가운데서 화물차에 치이는 끔찍한 장면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