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계속되는 악몽에 잠을 설쳤다. 연신 계속되는 업무 스트레스 탓에 몸이 허해진 것 같았다.
기분전환할겸 회사 밖으로 나왔다. 끝 없는, 아니 아무 것도 없는 황야를 거닐면서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바라는 결과를 얻지도 못하는 공허한 이 일을 계속해서 해야만 하는걸까.
시원치 못한 잡념에 빠지자 가슴 한 구석이 답답했다. 누군가와 툭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붐벼대며 움직이는 노예들과 그 사이에서 감시를 하고 있는 악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빠르게 눈을 돌리며 사람을 찾고 있었다. 우연찮게 악마 하나가 내 쪽을 바라보며 여전히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사람을 찾아 빨리 이 갈증을 풀어버리고 싶었다.
먼지로 뿌얘진 안경을 얼굴에 걸친 채 걸어가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나는 황급히 언덕에서 내려와 그를 향해 다가갔다.
"주, 주임님!"
"아니 이게 누구야?"
남자가 놀라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자네가 여기까지 어쩐 일로..."
주임님은 반가운 얼굴을 황급히 감추었다. 아마도 거지같은 몰골의 모습을 보이는게 창피했을 것이다. 불과 몇 개월 전만해도 내 업무의 상급자였으니까.
"그냥 요즘 좀 답답해서 대화 좀 할까하고 왔습니다."
"허허. 이런 누추한 나에게 무슨 대화거리가 있다고."
털털한 웃음소리는 여전했다. 나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근처에 있는 악마에게 다가갔다.
"저쪽에 계신 분과 잠시 얘기할게 있으니 잠시만 시간 좀 내주십시오."
악마는 내 얼굴과 주임님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반년만이지요?"
"벌써 그렇게도 되었나."
"그렇죠. 살았을 적 세상이나 이 세상이나 시간 빠른건 똑같더군요."
"허허- 재미없는 농담은 여전하구만."
주임님이 인자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노예생활 속에서도 그 눈빛만은 잊지 않으신 것 같았다.
"사실...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업무... 때문에 그런가?"
주임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무심하게 말을 걸었다.
"네... 맞습니다."
"그 왜 있지 않은가. 내가 남겨준 메모. 그냥 그대로만 하면 돼."
"그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친절? 밝은미소? 주임님도 업무하시면서..."
"됐네. 그냥 그대로만 하게."
주임님이 나의 말을 잘랐다.
"주임님. 들어보십시오. 주임님은 안 그러셨습니까? 매 번 죽어가는, 아니 죽음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아무 생각도 안드셨나요?"
"그게 업무야."
"아니요.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업무요? 영업이요? 그냥 그렇게 살지도 못할 죽음을 계속 당하게 하는게 업무라구요?"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내가 말해주지 않았나. 쓸데없는 감정을 가지고 보지 말라고."
"그게 말이 됩니까?"
말소리가 높아지자 악마가 우리 쪽을 쳐다보았다.
"주임님. 주임님도 같은 일을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볼 때 마다 아무 생각도 안 하셨나요?"
"그만하게."
"아뇨.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주임님 때는 구원에 성공한 사람이 1명이라도 있었나요?"
"......"
주임님이 고개를 돌렸다.
"없으셨죠?"
"난 이미 회사를 나온 몸이야. 더 이상 업무 얘기는 하지말게."
"주임님은 단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으셨습니까? 살려주겠다고 1분을 주면서 성공한 사람이 있었냔 말입니다.
모두 지옥의 노예로 살아가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회사의 업무고 영업부가 할 일인거야."
"업무요? 그리고 영업이요? 그냥 놔뒀으면 조용히 지옥 어딘가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노예로 데려오게 하는게요?"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참 대단한 일입니다? 차라리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지옥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지 않았겠습니까! 살려주려고 몇 번이고 죽음을 반복한 그들은 대체 뭐가 됩니까. 노예로 살게 만드는게 이 영업부가 하는 일이냔 말입니다!"
"무슨 말 하려는건지는 알겠네."
"그들과 같이 죽은 사람들은 지옥 어딘가에서 애타게 그들을 찾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기나 하셨습니까?"
"어차피 그들은 지옥에 없네."
주임님의 말에 말문이 멈췄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만 얘기하세."
주임님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명해 주십시오. 방금 그 말 무슨 말입니까?"
"악마가 나를 째려보는게 느껴지는구만. 어서 일하러 가야겠네."
"대답해주십시오! 이 곳에 없다니요?"
"내가 전해준 메모지 대로 그냥 열심히 업무나 하게. 나처럼 노예가 되기 싫으면."
주임님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하고는 뒤돌아섰다. 나는 곧바로 뒤따라가서 주임님의 어깨를 잡았다.
"말씀해주시란 말입니다! 뭔가 알고 계신거죠? 그렇죠?"
주임님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걸음을 뗐다.
"회사에서 그만뒀다는 그런 시시한 이유로 다시 노예가 되신게 아니죠? 뭔가 있으신 거죠?"
"가보겠네."
점점 멀어지는 주임님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순간 강 사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말.
뭔지 모를 분노가 가슴 속에 차올랐다. 그리고 주임님을 향해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이대로 회사에 가서 다 파헤치겠습니다!"
나의 외침에 주임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돌렸다.
"그, 그만하게!"
"지금 당장 이 거지같은 회사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하는건지 다 찾아볼겁니다."
"그냥 그대로 조용히 업무나 하게! 나처럼 노예가 되고 싶은건가?"
주임님의 말을 등 뒤로 흘린 채 나는 회사를 향해 뛰어갔다. 등 너머로 주임님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채찍소리만이 황야에서 메아리쳤다.
*
서둘러 회사로 들어와 강 사원을 찾아갔다.
"깜짝아. 네가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강 사원의 팔을 다짜고짜 부여잡았다. 그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로비 테이블에 강 사원을 앉히고서는 나도 맞은 편에 앉았다. 그리고 말을 꺼냈다.
"저번에 한 얘기 다시 얘기해봐."
"무슨 얘기?"
"다른 세상도 존재한다는 얘기."
"아아. 너 근데 그때..."
"됐으니까 다시 얘기해보라고!"
평소와 다른 모습에 강 사원이 놀란 듯 했다.
"음. 그럼 나 커피나 하나 좀 사주라."
.
.
.
.
"하아. 언제 마셔도 찜찜한 맛이야."
강 사원이 능청스레 말했다.
"자, 빨리 말해봐."
"갑자기 왜 그거에 대해 궁금해 한대. 저번에는 그냥 가버리더니."
"확인할게 있어. 저번 일은 미안하니까 좀 얘기해줘."
강 사원이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내가 그 때 부장님이랑 그 검은 그림자들이랑 얘기하는걸 들었거든. 대화하는 중간에 몰래 엿들은거라 앞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부장님이 말했거든. 요즘 우리 회사 매출이 좋다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고. 그니까 검은 그림자중 하나가 말했어. 아, 근데 걔네는 다 입이 없으니까 정확히 누가 말한건지는 모르겠는..."
"그런 얘기는 좀 빼고 말해봐."
"아무튼 말을 했어. 자기네 세상에는 더 이상 흥미가 없다고. 이 쪽 세상에 오는게 재미있다고."
"자기네 세상?"
"어. 그리고는 이 세상이랑 자기네 세상이랑 인구가 얼마나 되고 분위기는 어떻고 뭐 그런 이야기 한 거 같았어."
강 사원의 말이 끝나자 나는 조용히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자기네 세상' 이라고 했다.
"근데 확인해 볼 것이란게 뭐야."
강 사원의 물음에 천천히 그를 쳐다보았다.
"너... 너 죽기 전에 만났던 사람들. 지옥에 와서 만나본 적 있어?"
"죽기 전에 사람들? 뭐 가족들이나 친구들?"
"응."
"야. 이 넓은 데에서 어떻게 다 만나냐. 뭐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
"언제는 나보고 이상한 소리 그만하라더니만. 너 나 몰래 또 맥주 마셨냐?"
강 사원이 꼬투리를 잡은 아줌마 마냥 내게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야."
"왜에? 또 숨겨놓은 맥주라도 있어?"
"잠깐 나 좀 도와주라."
"무슨 일인데?"
나는 대답 대신 강 사원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아, 무슨 일인데!"
"부장님 방으로 가자."
"부장님 방? 갑자기 왜?"
"나 잠깐 확인해볼게 있어."
강 사원이 가던 길을 멈췄다.
"야 너 설마 몰래 들어가려는거야?"
"응. 잠깐 망 좀 봐주라."
"미쳤어? 그러다가 부장님 만나면 어쩔려고."
"진짜 잠깐이면 돼. 잠깐만."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금방 뭐 좀 확인하고 나올게."
계속해서 병아리처럼 조잘대는 강 사원을 억지로 끌었다. 마침내 부장님 사무실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강 사원의 팔을 놓아주었다.
"하, 진짜. 설명도 안해주고."
"미안하다. 금방 얘기해줄게. 나도 뭔가 석연치 않아서 그래."
"부장님은?"
나는 사무실 문에 대고 가볍게 노크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기까지 20분 정도 남아있었다.
"나 안으로 들어간다? 잠깐만 밖에 좀 봐줘."
"야야 잠깐만!"
강 사원이 손을 뻗었지만 무시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허례허식으로 가득찬 조형물들 사이사이로 주인을 잘못 만난 난초들이 비좁게 서 있었다. 왼쪽으로는 각종 체육대회 수상 트로피가 진열대에 놓여 있었고 오른쪽 편에는 서류들이 꽂힌 책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그마한 냉장고가 놓여 있었다. 저 안에는 아마도 맥주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서둘러 부장님 책상 앞으로 갔다. 그리고 컴퓨터를 확인했다.
-하늘이 감동할 정도로 노력하라.
재수없는 글귀가 모니터 화면에 띄워 있었다. 작게 욕설을 내뱉고 마우스를 잡고 움직였다. 화면보호기가 꺼지고 윈도우 화면이 나타났다. 부장님이 제발 로그아웃 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회사 시스템을 실행했다.
'다행이다!'
실행과 동시에 ID와 PASSWORD가 입력된 창이 뜨더니 수 초 후에 자동으로 로그인 되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덧 5분이 지났다. 서둘러 고객관리 메뉴를 클릭했다. 그리고 VIP고객을 클릭하고 스크롤을 내리면서 천천히 훑었다. 그러다 검은그림자들 정보에서 스크롤을 멈춰세우고 그들의 정보를 열람했다.
"세상에..."
일반적인 고객정보에는 출신지를 비롯해 나이, 직업 등이 기록 되어 있다. 태어난 나라 혹은 지역이 곧 출신지이며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기록 되는 것이 나이이고, 현재 다니고 있는 일이 직업이며 함께 가정을 꾸리고 사는 사람들이 가족이다. 살아 생전 다녔던 회사의 고객정보와 전혀 다를게 없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조금 차이점이 있다면 출신지는 당연히 이 세상인 지옥이고, 나이는 지옥에서 꽃을 피우고 시들고 난 후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잡는다. 그 외에는 동등하다. 때문에 출신지 항목은 보통 생략을 하거나 지옥으로 자동으로 입력하게 되어있다.
'왜...?'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의 고객정보에서는 '지옥' 이라는 단어 대신에 '천국' 이라고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