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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hil_8532
    작성자 : 히읗
    추천 : 2
    조회수 : 3760
    IP : 193.190.***.144
    댓글 : 8개
    등록시간 : 2014/03/11 23:32:21
    http://todayhumor.com/?phil_8532 모바일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
    0.

    보드리야르가 왜 포스트모던 학자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그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전부터 철게에 종종 포스트모더니즘, 시뮬라크르, 후기자본주의, 기호론 등에 대한 언급들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종합적인 정리 또한 겸합니다.


    1. 기호와 지시체: 지시의 원리

    먼저 기호 (sign)라는 개념에 대한 간단한 이해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지라고 부르기도 하고, 카시러 같은 경우 상징 (symbol)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기호라는 것은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사과" 혹은 "apple"이라는 글자들은 한국어 또는 영어로 된 기호들이며, 이 기호들은 실제의 사과라는 개념에 대응하는 것이죠.
    이 때 지시라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기호가 그 실제의 대상물을 지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지시되는 대상물을 "지시체"라고 하고, 지시체를 지시하고 있는 것을 두고 "기호"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무"라는 기호는 실제의 나무를 지시하고, "사람"이라는 기호는 실제의 사람을 지시하죠.

    기본적으로 지시체는 실제 현실에 속한 것,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고,
    기호는 다만 그 지시체를 지시하고 있을 뿐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눈 앞의 실제 나무와 그 나무를 그린 그림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때 나무는 원본이고, 나무 그림은 그 원본을 모사한 것, 혹은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겠지요.
    이렇게 원래 기호라는 것은 지시체에 딸려있는 복제품 내지는 모방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2. 기표와 기의: 차이의 원리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시뮬라시옹 이론의 핵심은 이러한 지시체-기호의 관계를 역전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아예 그 관계를 끊어놓은, 순수한 자기복제로서의 기호라는 개념에 있습니다.
    즉 시뮬라크르라는 것은 지시체가 없는 순수한 기호,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 기호"인 것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기호를 지시를 통해 정의했는데, 지시하는 것이 없는 기호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를 위해서는 소쉬르라는 언어학자의 이론을 잠깐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쉬르는 이 기호라는 것을 다시 두 가지 요소로 나누었습니다.
    각각 기의 (signified)와 기표 (signifier)인데요.
    기의는 쉽게 말해서 기호의 뜻이고, 기표는 그 기호의 표기를 말합니다.
    지시체가 눈 앞에 있는 사과라고 할 때,
    기표는 "ㅅㅏㄱㅗㅏ"라는 글자들을 말하는 것이고,
    기의는 이제 "사과"라는 단어를 보고 우리가 의미하는, 혹은 머릿속에 떠올리는, 사과의 개념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의 이론의 독특한 점은 기의와 기표의 관계에 있습니다.
    위에 설명했던 지시체-기호라는 구도에서 생각하면, 기의는 지시체를 우리가 인식한 내용에 불과할 것이고,
    기의와 기표의 관계는 다만 우리가 임의로 연결시킨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임의로 연결시켰다는 것은 딱히 반드시 그렇게 연결시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한국어에서는 사과에 "사과"라는 기호를 연결시키고, 영어에서는 사과에 "apple"이라는 전혀 다른 기호를 연결시키듯이, 그저 인위적으로 연결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의와 기표의 관계는 지시체와 기호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그저 "대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특정한 지시체에 특정한 기호가 대응하듯, 특정한 기의에 특정한 기표가 대응하는 것이죠.

    그런데 소쉬르는 기의와 기표의 관계를 대응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잘 보면 대응의 관계에서는 기의가 먼저 있고, 거기에 기표를 대응시키는 식으로 이루어지죠.
    즉 우리는 기의를 일단 개념적으로 알고 있고, 그 기의에 대응하는 기표를 산출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하지만 소쉬르는 기의라는 것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기표들간의 관계로부터 기의가 산출된다고 말합니다.
    먼저 우리가 사과라는 개념 - 기의 - 를 가지고 그 기의에 대응하는 기표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 배, 딸기, 포도 ..." 등등의 기표들간의 "차이"로부터 "사과"에 대응하는 기의가 정립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사과"라는 말의 의미 (기의)는 사과라는 기표가 배, 딸기, 포도 등등의 기표와 어떻게 다른가, 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즉 소쉬르에서 기호의 원리는 지시 (대응)이 아니라, 바로 "차이"가 됩니다.


    3. 현대 소비 사회: 차이의 원리에 입각한 기호적 소비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시뮬라시옹 이론은 애초에 현대 소비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고안한 것입니다.
    따라서 프레드릭 제임슨이 보드리야르가 후기자본주의를 논하고 있다고 평한 것은 딱히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드리야르 본인의 취지에 부합하는 설명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원래 마르크스를 연구했던 학자로, 마르크스 가치론의 비판을 통해 자신의 현대 소비사회 비판 이론을 정립하게 됩니다.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크게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두가지 개념으로 요약됩니다.
    어떤 사물의 사용가치는 당장 본인에게 그 사물을 사용함으로 획득되는 가치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이 사용가치가 높겠지만, 배부른 사람에게는 사용가치가 낮겠지요.
    반면 사물의 교환가치란 그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교환하는데 있어서 가지는 가치를 말합니다.
    단순하게 해당 사물의 가격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 교환가치라는 것을 부여함으로써 사물은 상품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사용가치로부터 교환가치로의 이행을 통해 자본주의를 설명합니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가치론이 현대의 소비사회를 설명하는데 더 이상 적합한 모델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보드리야르는 1929년에 태어나 2007년에 사망한, 굉장히 최근의 인물입니다.)
    이에 따라 보드리야르는 "기호가치"라는 세번째 가치의 개념을 주장합니다.
    기호가치 혹은 상징가치라고 불리는 이 가치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환원이 불가능한 새로운 개념의 가치로서,
    보드리야르는 위에서 설명한 소쉬르의 차이의 논리를 통해 이 개념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인의 소비 유형이 더 이상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그가 분석한 소비 유형은 바로 기호에 입각한 소비로, 소비자는 더 이상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소비를 하지 않고,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 혹은 신분에 걸맞게 소비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신분의 논리가 소비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허영에 입각한 명품 브랜드의 소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용가치에 입각한 소비라면: 소비자는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만을 소비할 것입니다.
    (명품을 구매하더라도, 그 명품만이 제공할 수 있는 사용가치 - 이를테면 우수한 품질이나 유일무이한 기능 - 를 위해 구매하는 것이라면 기호적인 소비가 아닙니다.)
    교환가치에 입각한 소비라면: 소비자는 투자가치가 있는 것만을 소비할 것입니다.
    (당장 나에겐 전혀 금이 필요하지 않지만, 금의 가격이 오를 것이라 판단하여 금을 사재기하는 것은 교환가치에 입각한 소비입니다. 따라서 재테크를 위해 명품을 구매하는 경우는 기호적인 소비가 아닙니다.)

    이 두 가지에 모두 해당되지 않는 명품의 소비 - 필요하지도 않고, 차익을 위한 것도 아닌 소비 - 에서 기호적인 소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정도의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소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당 명품은 하나의 기호로서, 명품이 아닌 것과의 "차이"를 통해 명품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명품을 소비하는 사람 역시 명품을 소비하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를 통해 명품 소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명품을 소비하지 않는 것" 또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젝이 종종 커피의 예를 들어 바로 이 지점을 매우 재치있게 표현하곤 합니다.
    "설탕 없는 커피"와 "크림 없는 커피"는 실제로 똑같이 블랙커피기 때문에, 지시/대응의 논리로는 동의어입니다.
    하지만 설탕 없는 커피는 "설탕커피"와의 차이에서 의미를 가지고, 크림 없는 커피는 "크림커피"와의 차이에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차이의 논리로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지젝이 이러한 예로 의미하는 바는 현실적인 예에 대입해야 좀 더 명확하게 와닿습니다.
    차가 없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을 가리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으로 말할 수도 있고, "차가 없는 사람"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표현은 실제로는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대응/지시의 논리로는 등가의 기호여야 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나이가 몇인데 아직 차도 없어가지고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나"라는 식으로 판단할 때에,
    이제 "차가 없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차가 있는 사람"과의 차이를 통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으로,
    실제 그 사람을 지시하는지 혹은 그 사람에 대응하는지로부터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차이의 논리가 기호에 입각한 소비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4.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시뮬라크르라는 말은 원래 기호 혹은 이미지라는 말의 라틴어입니다. 더 정확히는 신의 모습을 본딴 상을 가리킵니다.
    기독교에는 원래 그 구약의 뿌리부터가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전통이 있는데, 이런 우상의 다른 말이 시뮬라크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 8-9세기 비잔틴 기독교에서는 예수나 성모 마리아를 본 딴 조각상들을 모두 우상이라며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성상파괴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이들의 논리는 신 혹은 신성이란 모방/재현될 수 없는 것이므로, 그런 시뮬라크르들은 모두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거의 기호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기존의 기호 개념으로부터 현대에 이르러 특징적으로 변질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시뮬라크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플라톤에서 시뮬라크르의 개념은 복제의 복제입니다.
    나무 그림의 예로 다시 돌아가보면, 가장 근본적인 원형은 나무의 이데아이고, 현실의 나무는 그 이데아의 복제이며, 나무 그림은 그 복제를 또다시 복제한 것이 되는 것이죠.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은 이러한 원형-복제의 관계가 아예 끊어져버린 기호를 가리킵니다.
    기호는 현실 속의 지시체를 지시하는 것인 반면, 시뮬라크르는 그에 대응하는 지시체가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기호입니다.

    이러한 시뮬라크르의 가장 전형적인 예가 바로 화폐입니다.
    교환가치는 사용가치를 추상화한 것인데, 이 교환가치를 다시 추상화한 것이 화폐이죠.
    현대 자본사회에서의 경제활동은 더 이상 돈을 통해 어떤 직접적인 욕구를 충족 (사용가치)하려 하지도 않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 (교환가치) 으로서 돈을 모으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남들보다 가진 돈이 더 많다는 그러한 신분/지위 그 자체 (기호가치)를 위한 활동이 되었다는 것이죠.
    즉 돈과 돈의 차이를 통해 남들과의 차이를 산출해내는 활동으로, 철저히 차이의 원리에 입각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은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무인도에 혼자 갇혀있을 때, 세상의 모든 돈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아무런 가치가 없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돈은 기호임에도 실제 가치와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기호의 비지시성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음, 지시대상을 갖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드리야르는 이 기호의 비지시성을 "감추기"와 "시뮬라크르하기"의 차이를 통해 설명합니다.

    "(감추기)는 가졌으면서도 갖지 않은 체 하는 것, (시뮬라크르하기)는 갖지 않은 것을 가진 체하기다. 전자는 있음에 속하고 후자는 없음에 속한다.....병든 체하는 사람은 단순히 누워 자기가 병에 걸렸다고 믿도록 하면 되지만, 병의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사람은 정말로 어떤 병의 징후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따라서 그러므로 감추기나 체하기는 실재의 원칙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여기서 다르다는 사실은 여전히 명백하지만 단지 가려져 있을 뿐이다. 반면 시뮬라시옹은 참과 거짓, 실재와 사상세계 사이의 다름 자체를 위협한다. 따라서 시뮬라크르 제작자는 병자로도 건강한 자로도 취급할 수 없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시뮬라크르가 출현하게 되는데는 역사적 과정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철게에서도 몇번 언급된 바 있는 지도의 비유는 이 맥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현실을 모방합니다.
    이는 실제 토지를 조사하고 측량하여 지도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방은 절대 완전할 수도 없거니와 완전할 이유도 없습니다.
    길을 찾는데 사용되는 지도는 길을 중심으로 지도를 만들 뿐, 길이 닿지 않는 곳은 지도에 상세히 표현할 필요도, 아예 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반면 지형을 파악하기 위한 지도는 등고선이나 해안선의 경계 등을 명확히 표현하는데 초점을 맞출 뿐, 길은 표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도라는 것은 애초에 용도에 따라 특정한 정보를 강조하는 대신 불필요한 정보는 생략/누락하게 됩니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기호로서의 상품이 생산됩니다.
    "이제는 영토가 지도를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가 영토에 선행하고 심지어 영토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 이제는 실재와 관계 없는, 그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첫단계에서는 현실의 풍경을 그리는데 주력한 것이고, 두번째 단계에서는 현실과는 관계없이 그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것입니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이제 모든 현실적인 근거가 소멸하고 시뮬라크르가 초현실 (파생실재)가 되어버린 시뮬라시옹 단계입니다.
    이 단계가 바로 현대의 모습으로, 이제는 현실을 이미지에 끼워맞추게 됩니다.
    평지의 이미지를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산을 깎아버리고, 인공섬을 만들듯이, 이미지에 맞게 현실을 재단해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원본"이나 "지시대상"이라는 것이 없이, 이미지가 우선하게 되어버린 것이죠.


    5. 포스트모더니즘의 기호론 논리

    기본적으로 철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두 가지로 규정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대응으로 발생된 것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화계의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을 철학적으로 차용한 것입니다.
    프레드릭 제임슨과 같은 경우 후자의 맥락에서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의 철학적 이름이 후기구조주의 (post-structuralism)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지시체-기호 구도에서 기표-기의 구도로의 이행을 인식론적인 맥락으로 파악할 때, 이 이행은 소쉬르 이전에 이미 데카르트나 로크, 흄, 칸트와 같은 대표적 근대철학자들에 의해 이미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칸트는 더 이상 대상 그 자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단순히 말할 수 없고, 주관과 현상 등의 개념을 통해 객관의 범위를 유한한 것으로 한정시켰다는 점에서 절대적 객관성을 유보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근대에 특징적으로 남아있는 개념은 보편성과 합리성입니다. 절대적인 객관은 말할 수 없고 유한한 주관에 한정될 수 밖에 없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보편적인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또한 그 한정성과의 관계 속에서 합리성을 간취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근대주의 (모더니즘)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이러한 보편성과 합리성의 비판을 핵심으로 합니다. 이는 보편성과 합리성이라는 개념이 가지게 되는 특징적인 결과 중에 각각 전체주의적 사고와 진보에 대한 맹신이라는 두 가지 함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보편적으로 참이라면, 당연히 모두가 그에 따라야 할 것이며, 무엇이 합리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다는 구분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우리는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며, 그러한 합리성의 증진이 곧 진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분히 역사적인 맥락에 기인한 것으로, 바로 이 두 가지 - 전체주의와 진보 - 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 학살과 같은 인류적 대재앙으로 점철된 근대주의 이데올로기의 처참한 실패를 야기했다는 지식계의 자기비판이 맹렬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가 무엇이든 보편적인 진리나 지식을 가질 수 있다거나, 인류가 역사적인 진보를 성취해야 한다거나 애초에 진보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식의 사고방식 자체가 크게 비판받게 되었습니다. 진리, 선, 정의, 진보 등등의 개념을 무너트리기 시작한 것이죠.

    이에 따라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상적인 사회, 즉 유토피아주의적인 사고가 크게 비판받게 됩니다. 객관도, 보편도, 절대도 모두 부정하게 된 것이죠. 이를 위의 기호론적 분석에 연결시켜보면 그러한 논리를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기의가 기표에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할 때, 내용 (기의)는 약화되고 형식 (기표)만이 강화되어, 전달 매체가 전달 내용을 흡수해버리게 됩니다. 즉 무슨 내용이 전달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전달되느냐가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현대의 소통 매체인 텔레비젼이나 인터넷은 내용은 극히 일회적인 것,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금세 사라져버리게 만들고, 의미가 비어있는 형식만을 중요시한다고 보는 것이죠. 마샬 매클루한은 이를 가리켜 "매체가 곧 메세지"라고 날카롭게 분석한 바 있습니다.

    결국 전통적인 개념들 (진리, 선 등)의 소멸, 오직 새로운/독창적인/창조적인 것의 숭배, 철학적 이원론의 붕괴, 의미의 소멸, 과학적 진보/이상의 소멸, 독립적이고 상대주의적인 담론 체계 등등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특징짓게 됩니다. 지시체의 죽음에 이어 기의까지 소멸되고, 오로지 순수한 무의미로서의 기표/시뮬라크르만이 횡행하게 되는 것이죠.
    히읗의 꼬릿말입니다
    (오직) 이 정신의 왕국의 술잔으로부터
    정신의 무한성이 부풀어오르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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