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의 선의 발언을 글로 접하고선 무척이나 화가 났었다.
민주당 경선룰이 확정된 이후 대연정 발언부터 시작된 일련의 이슈들이 노골적으로 역선택을 노리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동영상을 보고선 약간 갸웃거렸다.
말하는 모습에서 진정성은 느껴지는데, 도무지 그 진의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뉴스룸에서 손석희와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고나서 끄덕거렸다.
무슨말을 하고 싶은 줄 이해할 수 있었고, 단순한 워딩이 아니라 자신의 깨달음이라는 주장에 그 뿌리마저 확인 되었기에...
안희정의 선의는 그것만 뚝 떼어놓고 보면 참으로 품격있는 대인철학이다.
타인의 말을 그 이면에 대한 의심없이 선의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하자는 것.
사실 많은 부분에 공감이 가는 말이고, 나 또한 타인을 대함에 있어 때때로 적용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이창호의 바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국수의 전성기때 수시로 들려오는 말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데 바둑은 이긴다는 거였다.
상대의 말을 진실로 가정하고, 실질적인 부분들과 하나씩 맞춰나가면서 모순되거나 의도적인 부분들을 제어해 나가는 것은 많은 경우 정말이지 훌륭한 대인술이 된다.
그런부분에서 안희정의 깨달음에는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다.
특히 안희정은 자신의 주어진 위치에서 정말 진정성있게 고민하고 고뇌하며 도달한 결론이란 걸 충분히 느낄수 있다.
도정의 최종 결정권자로서 주변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비판과 반대, 의혹과 의심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깊고 오랜 고뇌끝에 다다른 깨달음이라는데 나는 일말의 의심도 없다.
이명박근혜가 자신들에 대한 의혹과 비판에 어떻게 대응했는지와 비교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지 여지없이 드러난다. 모든 반대와 비판을 불순한 무리들의 반동으로 몰아세우며, 실체적인 잘못에 대한 비판마저 “감히”라는 일성과 함께 탄압해 온 그들과 똑같은 지점에서 안희정은 정반대의 방향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1세기에 이르러 수많은 과거의 교훈들이 힘을 잃어간다.
세상이 적나라해 질수록 과거의 그럴듯한 관념들이 놓치고 있는 치열한 현실들이 점점 더 도드라지면서 말이다.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놈은 발 뻗고 못잔다”는 이 옛말에 고개를 끄떡일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안희정의 깨달음은 도정의 최고 권력자라는 조건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안희정은 거짓과 의도라는 비수들을 먼저 맞아주고서도 그들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고, 그것들의 실체를 하나씩 따져나갈 수 있고, 결국에는 부조리한 의도와 거짓들을 제어할 수 있는 힘과 맷집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권력자가 비판자들에게 가져야 할 덕목일지언정, 권력을 견제해야 할 자들이 권력자들에게 가질 자세는 결코 아니다.
불의한 권력자들이 부패를 저지를때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일단 믿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믿어주고 나면 말할 것도 없고, 합리적 의심을 바탕으로 아무리 실체적인 부조리를 따지고 들어도 온갖 잔인하고 비열한 모습으로 반대와 비판을 피하고 억누르며 기어코 저지르고야 만다.
그렇게 일단 저지르고 나면 그 사회적 피해를 되돌리기도, 또 부정부패를 처벌하기도 절망스러울 만큼 어렵다는 걸 뼈져리게 깨닳은 지난 9년이 아니었던가.
특히, 지금의 한국 사회는 그럴 수 있을 만큼 사회적 시스템이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명박의 사자방비리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비판의 기회가 주어졌던가? 그 결과가 드러나고서도 수많은 부조리들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고쳐지거나 처벌되었던가?
박근혜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드러나고서 한국사회의 언론, 사법, 정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나서서 그 부조리를 바로잡을 수 있었던가? 이후의 모든 대처는 온전히 촛불의 힘으로만 가능했다.
촛불의 힘으로 JTBC의 보도가 지속될 수 있었고, 촛불의 힘으로 국회에서 특검이 통과됐고, 오로지 촛불의 힘으로 국회에서 탄핵이 결정되었다.
사족처럼 덧붙이면 혹여 JTBC를 빗대 언론이 작동했다고는 말하지 말기를… 오로지 손석희의 힘에 의한 JTBC의 위업 일 뿐, 사회적 언론 시스템은 스스로 작동하지 않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안희정에 대해 새시대의 리더로서의 역량에 의구심이 떠 오른다.
나 스스로 늘 생각해 왔던 바가 있다.
아무리 훌륭한 깨달음이라도 그것에 갇히면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지성이 소수에 의한 전유물이었던 시절 깨달음은 쉽게 보편적 지위를 획득했고, 그것은 상대적으로 쉽게 이념이나 신앙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온라인을 매개로 집단지성이 발현되는 시대에서 깨달음은 쉽게 보편화 되지 않는다.
안희정은 개인적 깨달음을 도정의 성공속에서 반복적으로 확인하면서 결국은 이념화시켜버린 모습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 보편적 지위를 부여하려고했다.
그것도 이 엄중한 시기에, 그 엄중한 위치에서, 시대의 분기점이 될 이슈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것은 오히려 관념주의적 행태로의 퇴행이다.
이념과 신앙이 지배하던 관념주의의 시대.
이념과 신앙이 분석과 비판을 통한 실존적 인식에 의해 끊임없이 견제되어야 하는 모더니즘의 시대.
그런 분석과 비판을 통해 발달된 인식 위에서 발현된 통찰에 의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안희정은 스스로의 깨달음을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깨달음을 이념화시켜버린 지점에서 그는 관념주의로 퇴행하고 만다.
마지막으로 짚고 싶은 부분이 있다.
탄핵 후 대선에서 진보진영이 집권하면…
그때 새로운 진보 대통령은 도지사였던 안희정처럼 자신에 대한 모든 비난과 반대를 선의로 대해야 할까?
그가 바로 최고 권력자이니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한국의 최고 권력은 재벌, 보수정치권력, 족벌언론의 카르텔이다.
때때로 그들끼리 반목하는 모습도 보여주지만, 진보정권 시대에는 항상 최고의 단결력을 보여줬었다.
이들은 왕따의 주동자로서, 시민들이 방관하는 사이, 강화자들과 함께 노무현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보수의 비판과 반대를 모두 선의로 받아들이려 했다면 결과가 더 나았을까?
지금의 헌재가 박근혜 대변인들의 요구를 모두 선의로 받아들인다면 더 나은 결과가 도출될 수 있을까?
그래,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들이 요구하는 틀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의 변화만 이끌어내면서…
탄핵을 포기하는 대신 적당한 타협을 이끌어내면서...
그 와중에 수많은 사회적 부조리속에 삶이 망가져가는 많은 시민들의 절규는 외면하면서…
정의를 향한 진보시민들의 갈망과 분노는 모른척하면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눈물은 못본척하면서...
안희정이 자신의 깨달음에 좀 더 여지를 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