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전신 기자 = 18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탄핵반대 태극기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 기각을 촉구하고 있다. 2017.02.18 photo1006@newsis.com박사모 회장 "국민들이 이제 태극기 보면 탄핵 기각부터 떠올려"
집회 중 태극기로 다른 시민·취재진 때려…폭력 도구로까지 전락
집회 뒤 길거리 나뒹굴고 쓰레기통에 마구 버려지기도
"국기가 부정한 대통령 옹호하는 용도로 쓰여" 정치적 이용 비판
전문가 "애국심 마케팅…세대갈등·노인혐오로 이어질 가능성"
【서울=뉴시스】이재은 기자 = "언제부턴가 뉴스에서 태극기가 나오면 보기가 싫습니다. 이러다 태극기 혐오 현상까지 생길까 무섭기도 합니다."
19일 포털의 한 커뮤니티에 게재돼 있는 글이다. 요즘 이런 취지의 의견들을
SNS나 관련 뉴스의 댓글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친박(친박근혜) 단체들이 태극기를 앞세워 박근혜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태극기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촛불이 박 대통령 탄핵촉구 집회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자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을 비롯한 탄핵 반대 단체들은 그 대항마 격으로 태극기를 꺼내들었다.
정광용 박사모 회장은 뉴시스와의 통화에서 "촛불은 밤, 어둠, 박쥐이고 태극기는 낮, 밝음, 독수리를 의미한다"며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태극기를 나눠주고 있다. 이제 국민들이 태극기를 보면 탄핵 기각부터 떠올리고 있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촛불과 태극기에 대한 의미 부여는 물론 자의적인 것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라도 말도 촛불집회에서 오래 전부터 회자된 문구이자 노래 가사이기도 하다.
해석은 각 진영의 자유다. 문제는 맞불 집회를 '태극기 집회'로 지칭하면서 마치 태극기가 '친박 단체', '탄핵 반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뉴시스】전신 기자 = 18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탄핵반대 태극기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 기각을 촉구하고 있다. 2017.02.18 photo1006@newsis.com게다가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들은 자신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시민이나 심지어 취재 기자들을 향해서도 태극기 깃발 봉을 무기 삼아 휘두르고 있다. 태극기가 폭력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여러 언론사의 기자들이 "빨갱이 죽여라"라는 폭언과 함께 태극기 봉으로 얼굴 등을 가격 당하는 봉변을 겪었다. 이런 사건들이 반복되자 한국기자협회,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잇따라 항의 성명까지 발표했다.
탄핵 반대 집회가 끝나면 손태극기가 쓰레기통에 함부로 버려지거나 길거리에 나뒹굴고 있는 모습도 자주 발견된다. 태극기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태극기는 국가의 상징물이다. 국기(國旗)는 국가의 얼굴이자 정체성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며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 된다.
일제강점기에 태극기는 민족혼의 상징으로 수많은 애국지사와 민초들이 태극기를 들고 항일운동을 벌이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태극기 물결을 통해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하나 된 힘을 보여줬다. 올림픽 등 각종 국제경기의 시상식에서 게양되는 태극기는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태극기가 최근 특정 집단의 전유물처럼 부각되면서 태극기를 모독하지 말라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대학생 안모(24·여)씨는 "요즘 태극기를 보면 불편한 감정이 먼저 든다. 경건하고 신성한 의도로 사용돼야 하는 국기가 부정부패를 저지른 대통령을 옹호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사실이 안타깝다"며 "태극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학원 강사 김정수(36)씨는 "태극기의 가치를 가장 많이 훼손한 사람(박 대통령)을 옹호하는 데 태극기를 이용하고 있어 굉장히 불쾌하다"면서 "다가오는 3·1절에 국기를 게양하면 혹시나 박사모로 비춰지거나 박 대통령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일까봐 고민된다"고 토로했다.
온라인에서도 '태극기가 점점 싫어진다', '성스럽고 고결한 태극기가 이제 혐오 물건이 돼버렸다', '태극기를 볼 때 마다 친박 노인들이 생각나서 도저히 못들고 다니겠다'는 내용의 글이 잇따르고 있다.
【서울=뉴시스】전신 기자 = 18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탄핵반대 태극기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 기각을 촉구하고 있다. 2017.02.18 photo1006@newsis.com전문가들은 누구나 태극기를 사용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지만 특정 단체의 상징물로 인식되고 있는 현상은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곽금주 서울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보통 월드컵, 올림픽 때 접하는 태극기는 국민들에게 감동과 뭉클함을 선사한다"며 "그러나 지금은 국정농단 사태로 사회가 불안정한데 이 사태의 주범들을 비호하기 위해 특정 단체가 태극기를 사용하고 있어 반감 여론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젊은 층 사이에서 나타나는 태극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세대 갈등, 노인 혐오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제시됐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친박 단체가 태극기를 통해 정당성, 정통성을 강조해 노인들이 일종의 애국심 마케팅을 하고 있는 것 같다"며 "그들과 반대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특히 젊은 층은 태극기를 들고 불합리한 말을 하는 노인들에 대한 혐오감까지 갖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전 교수는 "주최 측이 소외된 노인들을 결집시켜 정치적인 이익을 챙기고 오히려 노인 혐오를 조장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혐오라는 음습한 감정이 특정 속성과 결합되면 하나의 고정관념, 편견으로 굳어지게 된다. 이 감정이 연령 차별주의, 노인 차별주의로 이어질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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