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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이재용이 구속되어 서울구치소 독방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뭔가 그동안 막혔던 것이 뻥 뚫린 기분이 들었네요. 지난번에는 어찌나 스트레스 받았던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이 많다는 이재용이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고 나니, 언론에서도 다투어 한끼에 1,400원 짜리 식사니, 혼자서 먹은 밥그릇은 설거지를 해야 한다느니 하며 구치소 독방에 관한 썰들을 풀어내더군요. 그래서 저도 제 수감 경험을 통해서 조금 보태볼까 합니다.
저는 서울구치소가 막 서대문에서 과천으로 옮기고 얼마 후인 88년 6월에 구속되었습니다. 구속 사유는 당시 서울의 모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는데 87년 6월 항쟁과 12월 대통령 선거, 그리고 구로구청 항쟁, 88년 반독재 민주화 투쟁 등으로 집시법 위반으로 수배가 되었다가 시위 현장에서 연행되어 구속된 것입니다.
연행된 후 동대문구 옥인동에서 장안실업 주식회사라고 가짜 이름을 붙인 서울 시경 대공분실에서 48시간 연속 밤샘 조사를 받은 후, 구속 영장이 청구되어 경찰서에서 열흘간 지내다가 서울구치소로 넘어가게 된 것이죠.
물론 학생운동을 하며 감옥에 갈수도 있다는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가보니 낯설고 위압적인 환경에 처음에는 조금 주눅이 들더군요. 들어갈 때 목욕하고 신체검사하고 나눠주는 죄수복과 약간의 사물을 받은 후 처음에는 혼거방에 들어갔습니다.
혼거방은 일반수들과 함께 쓰는 곳인데 당시 사기, 절도, 폭력, 소매치기 등으로 온 재소자들과 함께 열흘 정도 지내다가 독방으로 옮겨가게 됐습니다.
87년, 88년 당시 재소자들 중에는 시위하다 온 학생들이 무척 많았는데 나름대로 일반 재소자들에게 대접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가면 흔하게 하는 신고식도 아주 간단히 소개만 하고 끝내는 정도로 했습니다. 일반 재소자들이 가면 처음에 신고식 호되게 당하는 것에 비하면 엄청 대접해준 것이죠.
당시 일반 재소자들은 시위하다 온 학생들을 ‘애국학생 혹은 독립군’이라 칭하며 자기들이 못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용감한 학생, 학생들 때문에 나라가 이만큼 발전했다라며 인정해줬습니다.
아무튼 별로 어렵지 않게 혼거방 생활을 하다가 독방으로 가게 되니 더 잘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반수들 같은 경우에는 독방을 가는 것을 좀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루종일 혼자서 갇혀있다는 것은 감옥 안의 감옥 같은 생활이기 때문이었는데 제 경우는 그동안 밖에 있을 못읽었던 책을 실컷 읽을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그 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이 대하장편소설들이었는데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 이병주의 지리산, 김원일의 겨울골짜기 등과 같은 책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감옥안에서 사전으로 영어 공부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저도 영어공부를 해볼까 했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더군요. 그러다보니 늘 대하장편소설만 읽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언제 집행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감옥안에서 사전으로 영어공부를 했다는 김대중 대통령은 정말 정신력이 대단한 분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감옥의 보수적 특성상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텐데 서울구치소의 남자 수형 공간은 1동에서 15동까지 모두 15개 사동이 있었습니다. 각 동에는 상층, 중층, 하층 등 3개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층이 1층, 중층이 2층, 상층이 3층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각 층에는 1번방에서 12번까지 모두 12개의 방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1번방, 2번방, 3번방은 독방이고 4번방부터 12번방까지는 혼거방입니다. 혼거방은 보통 적게는 6명, 많게는 10명까지 생활합니다.
각 층의 독방은 평수가 1평 반 정도되었는데 당시 제가 수감생활할 때 함께 있었던 자들 중에는 횡령 혐의로 구속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과 전 서울시장 염보현이 있었습니다.
학생들과 재야인사들 중에는 87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고, 지금은 민주당 원내대표인 우상호 선배가 있었고, 당시 재야운동을 하던 이부영 전 의원이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동료, 선후배들이 있었습니다.
염보현은 각 층에 속한 독방에 있었는데, 전경환이는 그 때 서울구치소의 5동 중층 한 동을 전부 다 썼습니다. 1번방 ~ 12번방까지 싹 다 비우고 혼자 쓴 거죠.
그 때 독방에는 어떤 재소자들이 들어가냐하면 사형수, 무기수, 거물급 비리 관련자들, 시국사범중 주동자급 학생들, 재야인사들, 노동자들입니다. 주로 집시법이나 국보법으로 들어온 경우죠.
사형수 무기수들은 기결수이면서 독방에 지내고, 시국사범들은 미결수인 상태에서 서울구치소 독방에서 지냈다는 점이 다릅니다. 저는 14동 중층 2번방에서 지냈습니다. 시국사범을 상징하는 빨간색 명찰로 수번 107번이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그 때 3번방에는 국보법으로 들어온 인천에서 노동운동하다 오신분이 계셨고, 1번방에는 처갓집 식구들을 살인한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밑에 하층 1번방에는 당시에 무척 유명했던 서진 룸싸롱 살인사건의 주범이었던 김동술이 있었습니다.
사형수들은 갇혀있는 몸이라고 하더라도 일반 재소자들이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일반 재소자들이 막 떠들다가도 사형수들이 “시끄럽다”고 소리를 치면 웬만하면 조용히 해줍니다.
이제 곧 죽을 목숨이라는 것에 대한 동정심이랄까, 안쓰러움이랄까, 자기들보다 뭔가 더 큰 사건을 저지른 재소자에 대한 좀 복잡한 감정으로 사형수를 대하는 것이지요.
하루 24시간 중 30분씩 운동시간이 있는데 혼거방 일반수들은 혼거방 재소자들끼리 운동을 합니다. 그리 넓지 않은 운동장에 1층에 있는 혼거방 재소자들 100여명이 한꺼번에 몰려나와서 운동을 하는데 공간이 넓지 않으니 한 30분 햇볕 쬐다 들어가는 게 거의 전부입니다.
독방을 쓰는 사형수, 무기수, 시국사범 등은 보통은 혼자씩 운동을 하는데 종종 다른 독방을 쓰는 사람과 함께 운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저보다 4살 많은 김동술과 몇 차례 만나서 함께 운동도 하고 얘기도 나누기도 했었죠.
함께 운동하며 자기가 서울 올라와서 제 모교가 있던 서울 화양리에서 자취하며 지냈던 얘기도 하곤 했는데 사형을 선고받았던 입장이니 언제 사형이 집행되어 죽을지 모르는 지라 밖의 시국에 늘 신경을 쓰곤 했습니다. 저한테 무슨 새로운 소식이 없나 만날 때마다 물어보던 것이 기억납니다.
당시 사형수들이 가장 바랐던 것 중에 하나가 88 서울올림픽을 맞이하여 대통령 특사로 무기수로 감형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있었죠. 하지만 88올림픽 특사는 이뤄지지 않았고 김동술은 그 후에 사형 집행되었습니다.
김동술은 사형을 집행하러 형장에 끌려가면서 “이 개xx들. 얌전히 지내면 무기로 감형시켜준다고 하더니 다 사기친거였어. 가만안둘거야”라고 소리쳤다는 말을 나중에 소문으로 듣기도 했습니다.
저하고 운동하며 얘기 나눌 때는 그냥 덩치좋은 동네 형 같은 느낌이 들었던 김동술이었는데 나중에 사형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왠지 마음이 좀 허탈하더군요.
독방수들끼리는 서로 책도 나눠봅니다. 옆방에 있는 사람과는 ‘소지’라고 해서 사동 안을 돌아다니며 청소도 하고 심부름도 하는 수인이 있는데 소지한테 부탁을 하면 잘 들어줍니다. 그리고 밑에 방에 있는 사람하고는 긴 끈에다 책을 묶어서 밑으로 내려주면 받아가지고 자기가 갖고 있는 책을 끈에 묶어서 올려줍니다.
원래 감옥안에는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끈이 들어오지 못하는데 그 끈은 어떻게 만드냐하면 메리야쓰를 구입하면 포장해서 나오는 비닐을 이용해서 만듭니다. 메리야쓰 비닐봉지 몇 장이면 5미터 정도되는 끈은 쉽게 만들지요.
메리야쓰 포장비닐을 실을 이용해서 최대한 탱탱하게 한 후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정확히 잘라내서 노끈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 “이야, 기술 대단하네”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밥알을 으깨어 주사위나 윷을 만들기도 하고, 나무젓가락으로 벽에 못 없이도 옷걸이를 만들기도 합니다.
지금은 30년이나 지났지만 88년 당시에는 서울구치소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감옥 내에 수돗물이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신축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화장실도 수세식이었죠. 당시 가까운 곳에 있는 영등포구치소, 성동구치소만 해도 푸세식이었는데 말이지요.
대신 물사정이 좋지 않아서 아침, 점심, 저녁 딱 30분씩만 물이 나왔습니다. 평소에는 그 물로 씻고 머리감고 하는데 일주일에 한 번 샤워실을 이용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루 24시간을 보내는 중에 가장 큰 낙은 어머님과 여친이 면회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옥바라지를 하던 여친이 있었는데 시국 사범은 가족, 친족 면회만 되었던지라 처음에는 여친이 면회를 못왔는데 나중에 요령을 터득해서 사촌 여동생의 주민증으로 해서 면회를 왔습니다. 아마도 하루종일 기다려지는 것이 어머님과 여친의 면회였지요.
당시에는 감옥 내에 신문도 못들어오고, 티비도 없었습니다. 라디오는 편집된 것으로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것을 하루 4 시간 정도 틀어주곤 했습니다.
그랬던 서울구치소였는데 지금은 감옥 안에서 티비도 보고, 신문도 본다고 하니 많이 좋아졌더군요. 그렇게 감옥이 좋아지게 된 것은 재소자들의 소내 민주화 투쟁이 큰 역할을 했는데 그것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바로 시위하다 들어온 우리 학생들, 재야인사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안에서 싸움을 하면 일반 재소자들은 함께 투쟁은 못해도 응원을 해주고, 구치소 밖에서 민가협 활동을 하시던 우리 어머님들도 함께 싸워주시고 그 투쟁이 전국의 다른 구치소, 교도소로 파급되어 함께 전국에서 소내 민주화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수없이 단식투쟁하고, 싸우고 해서 결국 쟁취해낸 것이 신문 차입, 티비 시청 등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싸워 이뤄낸 결과물을 최순실, 김기춘이 같은 것들이 누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좀 약오르긴 하지만 그래도 정당한 싸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최순실이 특검에 출두하면서 ‘민주주의 어쩌구 저쩌구’하는 얘기를 듣고 나서 생각나는 것이 염병하네. 염병하네. 염병하네‘ 였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단 한 방울의 땀과 눈물도 흘리지 않은 것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끊임없이 피흘리고 싸워나간 사람들의 결실을 따먹는 골때리는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나불거리는 최순실. 정말 염병하고 자빠졌습니다.
이재용이 구속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시원한 소식을 듣고, 문득 옛 생각이 나서 한 번 썰을 풀어봤습니다. 이제 곧 박근혜도 탄핵이 되면 바로 구속 영장이 집행되겠네요. 오랜만에 기분 좋은 하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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