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로 달려 했더니 그러기엔 좀 길어서... 게시판에 올립니다.
우선 보드리야르를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특히 보드리야르 스스로 자신은 절대 포스트모더니즘학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말이죠.
가장 큰 문제는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정의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뭐냐고 물어보면 여기저기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겠지만... 그래서 내가 맞네 니가 틀렸네 하겠지만...
정설이라 부를만한 것은 아직 없습니다.
제대로 된 논의보다는 난 이게 좋아 저게 좋아 식이라 더 이상의 논의도 안되구요.
솔직히 하나의 기준, 정의, 진리를 거부하는게 포스트모더니즘이니 기준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어느정도 설명하려면 포스트모더니즘이 뭐냐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설명이 완벽하게는 안된다 해도 어느 정도는 해야겠지요.)
그러려면 보드리야르 들어가기 전에 데리다부터 이야기해야 하고... 데리다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소쉬르부터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깐 소쉬르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는 언어(기호)가 기표와 기의로 분리되어 있다고 합니다.
예를 여기 사과가 있다고 칩니다. 우리말로는 당연히 사과입니다.
하지만 독일어로는 Abbitte, 프랑스어로는 pomme, 영어로는 apple, 중국어로는 苹果입니다.
사과는 사과인데...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르게 표현됩니다.
이때 실재의 사과를 '기의', 사과를 표현하는 말이나 그림 같은 기호, 상징들을 '기표'라 합니다.
문제는 기의와 기표가 서로 연관된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사과를 사과로 불러야 할 정당한 근거가 있을까요? 아님 Abbitte나 pomme로 불러야 할 당위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없어요. 그 어디에도 그렇게 불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자기들끼리 사과라 부르자, Abbitte로 부르자, pomme로 부르자 정했을 뿐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도대체 사과를 사과로 불러야 할 이유가 없는데 어떻게 사과를 사과라 부르게 되었냐는 물음이 제기됩니다.
여기에 대해 소쉬르는 사과가 배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슨얘기냐... 사과를 사과로 부르는 건, 사과가 배가 아니고 감이 아니고 딸기가 아니고 포도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사과는 사과이기 때문에 사과인 것이 아니라... 사과와 변별되는 다른 과일들이 있기에...
즉 배도 아니고 감도 아니고 딸기도 아닌데... 뭐라고 부르긴 불러야 겠고...
그래서 배도 감도 딸기도 아닌 무엇을, 즉 사과나 Abbitte를 갖다 붙였다는 겁니다.
물론 한 번 이름이 붙었다고 그게 고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변해가죠. 옛말 '미르'가 현재 '용'이 되었듯이 말이죠.
어쨋든 그가 볼때 사과는 다른 과일과 구별되어 불리는 것이기 때문에 배가 아니고 감이 아니고 딸기가 아니라면...
사과라 부르든, Abbitte라 부르든, pomme라 부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다른 것과 겹치거나 혼동되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죠.
결국 단어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그 단어가 다른 단어들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그 단어의 의미가 형성된다는 의미입니다.
데리다는 바로 여기에 주목합니다.
사과를 사과로 불러야 할 정당한, 당위적인 이유가 없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본질, 원인이란게 사실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전까지 이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본질, 원인, 진실 같은게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단어와 단어들 사이에 구축되는 '관계'만이 존재한다고 여긴 겁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본질이 없다.' '(원인은 모르겠고) 현상만이 존재한다.'
(물론 '차연'이나 '해체'가 더 적합한 개념일 수 있습니다만... 그건 담에 기회될 때 설명드리겠습니다.)
보드리야르를 포스트모더니즘학자라 일컫는 것은 그의 시뮬라크르 개념이 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뮬라크르... 쉽게 말해.
우린 지구에 삽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구에 산다고 지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전체적인 모습을 본 적은 없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산과 들, 강과 바다, 푸른하늘과 하얀구름 같은 것들 뿐입니다. 지구의 모습이긴 하지만 이건 지구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우린 지구에 대한 지도를 만듭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게 만드는 거죠. (이게 제1열입니다.)
하지만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게 만든 지도는... 그냥 지도입니다. 개략적일 뿐, 완벽하게 재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완벽한 지도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건 지구와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모습으로 지구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게 제2열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러한 재현은 불가능합니다. 지구와 똑같은 지도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게 지구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완벽한 지도, 정밀한 지도를 만들어가면서
자신들이 만든 지도가 정말로 완벽한 지구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계지도를 보며 지구란 이렇구나, 우주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이게 지구로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문제는 그런 지구의 모습은 지구의 완벽한 모습이 아니라 지구의 일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지구의 모습이긴 하지만...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지도나 사진을 보고 그게 지구의 모든 것이라고 착각해 버리곤 합니다. (이게 제3열입니다. 가짜를 진짜로 여기는 거죠)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지구의 이미지에 맞춰 실재의 지구마저 바꾸려 들게 됩니다.
지구는 원래 이래야 돼 하면서 이런 저런 일을 하게 되는 거죠...(그러다 뻘짓을 하게 되는데 그건 담에 얘기하죠.)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가 반복되면서 원본이 무엇이었는지를 완전히 잊어버린채, 시뮬라크르의 허상속에서 살게 되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암튼 보드리야르를 포스트모더니즘학자라 일컫는 것은 시뮬라크르 등의 개념이 위와 같이 본질을 거부하고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단순무식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분명 지구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지구의 모습은 세계지도 같은 가상의 지구이고,
우린 그런 지도에 그려진 지구를 바탕으로 현실의 지구를 이해한다는 (그래서 가상이 현실을 지배한다는) 의미입니다.
보드리야르를 포스트모더니즘학자라고 보는 것은
결국 본질을 알 수 없다. 허구가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보드리야르와 포스트모더니즘이 비슷하다고 보는 겁니다.
물론 저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보드리야르가 속한 후기구조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담에 기회되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보드리야르를 'Late-capitalism'이라 부르는 것은 그가 '기호의 정치경제학비판'에서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설명하지 못한 부분...
그러니까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도 좋고, 잉여가치도 좋은데... 왜 사람들이 교환을 하느냐...
특히 생존에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은 왜 교환하느냐에 대한 이유를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사용가치에서 기호가치로의 전환이 그것이죠.
쉽게 말해 사용가치란 제품에 쓰임새가 있는 것입니다.
옷은 시원하든지 따듯하든지 해야 하고, 차는 빠르든지 연비가 좋든지 해야 합니다.
제품에는 제품 고유의 기능이 있고, 그 기능이 최고로 발휘되어야 한다는 생각... 참 정직하죠?
마르크스 시절에야 물건자체가 귀했으니 물건자체의 기능이 중요했을 겁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능은 좀 떨어져도 다른 제품보다 예쁘거나 독특하면... 더 잘 팔립니다.
더 튼튼하고 따스한 20만원짜리 등산복이 있는데 왜 굳이 100만원이 훌쩍 넘는 캐나다 구스를 사는 걸까?
왜 150만원이 넘는 잠바를 사고 200만원이 넘는 가방을 사는 걸까?
특히나 브랜드 하나 붙이고 안 붙이고에 따라... 백화점에서 파느냐 동대문에서 파느냐에 따라 물건 값이 달라지는 건 또 왜일까?
물론 수요와 공급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가지고는 이런 현상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보드리야르는 바로 그 지점을 밝혀냈던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마르크스를 극복했다고까지 말했던 거죠.)
그는 물건에 대한 욕구, 수요가 사용가치가 아니라 기호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합니다.
물건의 기능이나 물건에 대한 필요 때문이 아니라... 그 물건이 지니고 있는 상징(기호)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상징(기호)은 광고나 뉴스 같은 언론매체가 만들어낸다고 보죠.
일례로 광고에선 유명연예인이 험한 산을 멋지게 오르면서 등산복의 뛰어난 기능을 보여줍니다만... 사실 일상에서는 그런 기능 필요없잖아요?
저도 집 앞이 등산로라 토,일요일이면 등산객들 엄청 봅니다만 그분들이 무슨 고산준봉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
동네 뒷산 오르면서 뭘 그리 뻑적지근하게 입고들 오르시는지... 그거 다 남에게 꿀리지 않으려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건 물건의 기능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사회적 기호 때문입니다.
자본은 이 기호를 조작함으로써 사람들의 소비욕구에 불을 지르고 있구요.
포스트모더니즘 등등은 설명했으니 모더니즘은 그 반대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자유나 평등, 인권,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처럼 그것만이, (좀 무식하게 표현하자면) 자신만이 진리다 정의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를 거부하고 해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유나 평등, 인권의 개념을 그저 고리타분한 개념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구요.
암튼 도움이 되셨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