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읽은신 글일지도 모르나... 오유인과 함께 읽고싶어 퍼왔습니다.
로또의 뒤안길 by 산하
지금까지 로또를 맞아 인생대역전을 이룬 사람들이 500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 행운아들은 매스컴이나 주위 사람들의 집요한 추적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허다한 믿거나 말거나성의 루머들을 양산하기도 했습니다. 은행 여직원이 퇴사하면서 퇴직 사유에 1등 딱 한 마디를 남긴 후 사라졌다거나 어느 날 부장님 핸드폰에 “내 퇴직금으로 회식하세요.”라는 전설적인 문자를 남겼다는 등의 이야기는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겁니다. 그들의 현재가 궁금하기는 하나 굳이 들추어 낼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직업상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전국을 헤맬 때가 있었습니다. '로또 열풍 그 후 1년'을 아이템으로 다뤄야 할 때가 있었거든요.
결론부터 말해서, 저는 그 500명 중의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나름대로 촉수를 곤두세웠음에도 머리카락 보일까 꼭꼭 숨어버린, 또는 이미 인생역전을 이뤄 구름 위로 올라가 버리신 1등 당첨자들의 그림자 옷깃에도 스치지 못하였지요. 말씀드린 대로 저는 그들을 꼭 만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얼떨결에 언론에 공개되었던 로또 당첨자가 어떤 수난을 겪었는지 익히 아는지라 오히려 제 레이더에 그들이 걸려들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 와중에도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울산의 40대 회사원이었습니다. 로또 2등에 당첨되어 3천1백만원 정도를 받았던 그는 "친구한테 복권 되면 천만원 주기로 약속했다"는 이유로 천만원을 줬고 나머지 2천1백만원은 희귀병을 앓고 있는 여자 아이에게 전달함으로써 자그마한 화제를 낳았습니다. 즉, 그는 로또 2등이라는 준 대박을 맞고도 단 한 푼도 자기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철철 흘러넘치는 PD의 호기심에 대홍수를 일으키고도 남을 인물이죠.
몇 개의 프로그램에서 그를 만나러 갔으나 문전박대를 받거나 무슨 시사 프로그램 찍듯 ‘다리만 나오는’ 인터뷰만 겨우 허용하는 등 취재가 어렵다고 소문난 분이었는데 작가로부터 뜻밖에 그 분이 취재를 허락하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가 사는 곳은 울산에서 도저히 잘나간다고 볼 수는 없는 동네의 언덕빼기에 서 있는 한동 짜리 맨션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돈 3천만원이 아무리 값어치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요긴하게 쓰자면 그 허름한 맨션에서 보다 깔끔한 곳으로 옮길 정도는 넉넉히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랬는가. 왜 굴러들어온 호박을 넝쿨째 차 버렸는가.
궁금증으로 숨이 턱에 닿은 제 질문에 비해 아저씨의 질문은 생뚱맞을만큼 천연덕스러웠습니다. “친구가 농담으로 로또 되면 좀 달라고 했을 때 돈 천만원 준다고 했으니 준 거고, 울산방송에서 너무 불쌍한 아이 이야기가 나오길래 그냥 준 거”라는 겁니다.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런 선행을 베푼 데는 뭔가 가슴 아련한 뒷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여겼던 제 기대는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지요. 까닭 모르게 약이 오릅니다.
“부인이 반대하지는 않으셨나요?”
“아니오. 그러자니까 그러자던데요.”
“아들은?”
“그냥 그러자니까 박수 치고 그랬어요.”
머리에 광배 하나 두른 것 같은 성인군자의 가족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저 지하철 옆에서 함께 졸거나 꽉 막힌 길에서 가끔 눈 마주치는 옆차 운전수같은 평범한 아저씨와 그 가족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분은 그분의 1년 연봉을 따라잡을지도 모를 거금을 ‘그냥’ 날려 버렸습니다. 그 보통과 특별의 어울리지 않는 틈바구니를 저는 기를 쓰고 파고들었지요. 왜? 왜? 왜? 그 귀찮은 인파이팅에 그분은 무척 건조한 카운터 펀치를 날려 왔습니다.
“내 것 같지 않더군요. 복권을 사긴 샀는데 그렇게 거금이 떨어지니까 내 것 같지 않더라고. 그래서 버려 버렸죠. 버리니까 그렇게 마음이 편하데...... 경상도 사람들은 그런 말을 가끔 하죠.
‘강구야~~~’”
아마도 ‘광고야~~’에서 변형되었을 듯한 ‘강구야~~’라는 말은 그쪽 지역 꼬마들이 이사를 가거나 하여, 인심을 쓰고 싶거나 하여 딱지나 구슬 등등을 동네에 뿌리고 싶을 때 부르짖는 단어입니다. 결국 아저씨는 돈 3천만원을 ‘강구야~~’ 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머리카락 보일까 꽁꽁 숨기면서 말입니다.
아저씨와 그 부인이 뭔가를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아저씨가 익명으로 전달한 돈을 받은 희귀병 환아의 어머니가 쓴 편지였습니다. ‘대체 이 은혜를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합니까.......’ 그 편지를 내미는 부부의 얼굴만큼은 그때껏 얼굴을 지배하던 쑥스러움을 벗어 던진 자랑스러움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인은 이렇게 중얼거렸지요. “우리가 언제 이런 사람이 한 번 돼 보겠어예. 누구한테 이래 고마운 사람 돼 봤어예?”
그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 그 아이와의 인연을 끊지 않고 있었습니다. 겨울에 가스 들여놔 주고, 명절에는 과일로 인사치레를 했습니다. 그 와중에 또 로또 3등이 당첨됐습니다. 이번에는 그 아이의 집에 에어콘 하나를 놓아 주었습니다. 남들은 한 번 되기도 어려운 복권을 두 번씩이나 맞은 것도 신기한 일인데, 그걸 또 남 좋은 일에 썼다는 이 대책없이 신기한 사람들은 그게 ‘신이 났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판에 박힌’ 말을 했습니다. 조금만 버리면 마음이 편하다고 말입니다.
로또의 광풍 뒤를 추적하면서 저는 가지각색의 사연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당첨 뒤 모든 가게 물품과 생선까지 그대로 둔 채 종적을 감춰 버린 횟집 부부에게는 별의 별 헛소문들이 따라붙고 있었고, 어떤 당첨자는 멀쩡한 직장에 잘 다니던 동생이 사표를 내던진 뒤 사업자금 내놓으라고 손을 내밀었을 뿐 아니라 일가친척이 1개 중대로 몰려들더라며 기가 막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주위에서 부러움과 동시에 동정의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친구도 맘 놓고 못만나는 게 뭐 그리 좋은 인생이라고........”
대박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잡음과 쑥덕공론에 우리는 으레 혀를 차면서 돈이 뭔지, 행복이 뭐지 하며 탄식 겸 질문을 스스로에게 내뱉곤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는 그 탄식을 무색하게 하고, 그 질문의 설득력을 잃게 만드는 신기한 사람들을 만났었습니다. 제가 아저씨에게 지금까지 매스컴을 피하시다가 왜 모습을 드러내셨냐고 물었을 때 아저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그 아이한테 도움이 될까 봐서요. 아직 치료비가 많이 들어가거든. ARS 같은 거 혹시 안되나?”
그렇게 아저씨는 또 한 차례 자신을 버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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