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교육학의 원칙
3-1. 사람의 학습은 모두 같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다 다르게 되는 것이 언제인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심리, 성향, 더 나아가서 지적 능력까지 언제 정해지는 것일까요? 답은 아주 어린 시절입니다. 페어 베언이란 교육학자는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문제아는 없다. 문제 부모만이 있을 뿐.” 이 말은 우리의 인성이 부모님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형성된다는 뜻입니다. 그 시기는 유아기에 해당하고요.
지금 이 글은 한글로 되어 있고 여러분은 읽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말이 상형문자로 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읽지 못하시겠죠. 그 이유는 우리가 한글만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동도 배운 것만 행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앞선 예시에서, 우리는 악수를 통한 인사 방식에는 낯설다고 긍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방식을 배우지 못했거든요. 배운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이를 먹어 사회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지, 가정에서 배우거나 학교에서 배우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죠.
흔히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너 닮은 자식 낳아봐라.” 라며 꾸중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리저리 분석한다면 자식의 행동은 부모님에게서 배운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확률적으로 자식은 자신을 닮은 자식을 낳기 마련이죠. 생김새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도요. 왜냐하면 부모에게서 배운 그대로 자식에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한글을 가르치는 할아버지와 한글을 배운 아버지의 밑에서 갑자기 고대 영어를 술술 하는 자식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할 점.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님 탓은 조금만 하고 자기 탓을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3-2. 사람의 학습은 모두 다르다
학습 단계는 사람이라면 모두 같습니다. 물론 일부 천재는 다르겠지요. 다만 문화·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차이는 다시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기 때문에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르다는 것은 그 내용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키워나갑니다. 조선시대 사람이 지금 시대에 온다면 아마 왕이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질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각자 학습한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다르고, 이것이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에는 다 원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틀린 의견을 말하게 되더라도 차분히 ‘그렇게 생각하게 된 원인’을 살펴야 합니다. 만약 제가 서점에서 나오고 있는데 점원이 갑자기 저에게 책을 훔치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의심받고 있다는 생각에 일단은 기분이 나빠지죠. 하지만 그 ‘원인’을 알아봐야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러면 점원은 그 ‘원인’을 말해줄 겁니다. “당신이 아까 책 앞에서 서성이는 걸 봤거든요.” 일리가 있군요. 만약 제가 점원이라도 따졌을 겁니다. 저는 빠른 해결을 위해서 제 가방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일은 해결이 되지요. 맞아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 뒤로 저는 안 훔쳐요. 정말!
4. 인권
4-1. 인권은 사람은 모두 같다는 데서 나온다
여러분. 전쟁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총탄이 부서지는 전장에서 몸을 숨기면서 총탄을 갈기고 있습니다. 저쪽에 적군 하나가 고립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엄호를 받으면서 그 적군을 제압하는 데 성공합니다. 총구를 그의 얼굴에 겨눕니다. 돌려세운 그의 표정은 이상합니다. 너무나 이상해서 여러분은 총을 쏘지 못하고 일순 굳어버렸습니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 나쁩니다. 울고 있습니다. 이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나쁘게 만들어버리는 얼굴입니다. 그를 죽여 버리면 여러분은 세상에 둘도 없는 나쁜 놈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를 죽이지 않으면 여러분은 죽게 됩니다. 여러분이 그를 죽였을지 살렸을지, 혹은 살려서 여러분이 죽었을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 짧은 순간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정심이라는 걸 느꼈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주 악랄한 ‘악마’인 줄로만 알았던 그가 실은 ‘나와 같은 사람’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맞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그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서 출발합니다.
교육학, 상담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을 끝까지 듣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어야 하며, 상담자는 상담 받는 사람(내담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을 끝까지 들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을 생각(존중)한다는 의미이거든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아주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고 있는데 자꾸 친구가 자기 힘든 얘기를 꺼냅니다.
“요새 집안이 좀 힘들어.”
“나도, 나도. 요새 피곤하고 일 나가기도 싫다.”
“그래서 지금 일을 하나 더 하려고 해.”
“난 요새 왜 이렇게 어깨가 결릴까?”
어때요? 이 친구를 어떻게 보실 건가요? 맞아요. 귓구멍에 당근을 쑤셔 넣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혹은 문틈 사이로 손가락을 넣고 “기요틴 커팅!”을 골세포부터 느끼게 해주 거나요. 혹은 이 친구를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극소수지만요. 아닌가요? 다들 인터넷에서 그렇게 하자나요? 만약 여러분이 “저는 예의를 갖춰서 항의합니다.” 라고 한다면 수상하겠군요. 아니요. 거짓말 했다는 점이 수상하다는 게 아니고요. 아니요. 예의를 갖췄다는 점이 아니고요. 여러분이 욕을 쓰지 않았다는 점 말이에요. 하하 농담입니다. 맞아요. 사실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4-2. 우리는 함께 나아가야 하는 존재다
우리는 오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생각과 감정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를 알고 대화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상대가 틀렸는지 내가 틀렸는지는 대화를 해야 알 수 있으니까요. 즉 우리는 서로를 등지고는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점점 뒤로 갈 뿐이죠. 문제가 있고, 해결할 방법은 대화뿐인데, 대화하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상태로 방치되는 것이죠.
이러한 것이 국가적인 시스템으로 발전하게 된 대표적인 것은 저항권이 있습니다. 저항권을 이루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집회가 있죠. 시민들은 자신의 요구가 국가 정책에 반영되지 않으면 집단으로 모여서 국가에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합니다. 저항권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으며, 집회를 국가 권력이 막을 수는 없습니다(집회가 신고제가 아닌 허가제인 이유).
지금까지의 논리에 따라, 만약 국가 권력이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다면 그 국가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백남기 씨를 대하는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과 강신명 경찰청장과 새누리당과 마찬가지로요. 사람이 치명상을 입었는데 청와대 내에서의 진압 규정만 읊어대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사람이라면 전장에서도 동정심을 느끼기 마련인 데 말이죠. 그 처절한 얼굴 앞에서 뻔뻔한 그들에게 “개새X.”라는 욕이 나오는 것은 정신병이 아닙니다.
5. 표현의 문제
5-1. 표현은 곧 감정이다
말이 곧 그 사람이라고 하죠. 자, 몇 사람이 걸그룹 뮤비를 보고 있다고 가정해 보죠. 누구는 ‘와, 예쁘다.’라고 하고, 누구는 ‘화장이 이상해.’라고 하고, 누구는 ‘현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아이돌이라는 상품은·······’이라고 하죠.
사람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그에 따른 표현도 전부 다릅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 표현을 하는 것은 특정한 방식을 거쳐 왔기 때문에 그 사람이 무슨 심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100%는 아닙니다만, 어느 정도 강한 심증이 될 수는 있죠(이것이 정교해진 대표적 분야가 범죄심리학).
여러분이 밤거리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다리에 뭐가 달라붙었습니다. 섬뜩해서 내려 봤더니 웬 아이가 아빠인 줄 알고 잘못 엉긴 것입니다. 아빠는 죄송하다며 아이를 데려가고, 여러분은 아이가 귀여워 손을 흔들어주죠.
그런데 이번에는 어른입니다. 돌아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조용히 해”라고 하죠. 그런 상황에서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 사람에게 해를 가하려고 노력할 겁니다. “살려주세요!” 라고 외치거나 발을 밟고서 도망치겠죠. 그 상황에서 탈출해야 하니까요. 참고로 “어디로 갈까?”라고 묻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답니다. 이 글에서 나가주세요.
우리가 시도하는 “해를 가하려는 행동”은 무슨 감정에서 출발한 것일까요? 분명히 “공포”입니다. 모두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공포에 직면하면,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격렬한 표현을 하게 됩니다. 자 이점을 잘 기억해두자고요.
5-2. 표현에서 역추적하면 반응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는 일베에서 여혐을 조장하는 글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 여성을 “김치녀”라고 표현하며 싸잡아 비하하죠. 뭐, 굳이 직접 인용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걸 할 만큼 부지런하지는 않거든요. 이 점은 양해바랍니다.
그렇게 불특정다수의 여성들을 비하하는 것은 그들이 “공포”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글을 보면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들이 여성들을 비하하는 것은 주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취하는 행동들이기 때문이죠.
그들과 같은 생각이 불법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행동으로 옮겨진다면 문제가 됩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 정상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져서 사회에 해악을 끼치게 된다면 문제가 되지요(반사회성).
이러한 문제는 가볍고 흔하게 일어나는데요. 일반 커뮤니티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진지한 글에 조롱식으로 글을 댓글을 다는 것이죠. 이성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대상을 무시’하는 심리인데,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라고 들어보셨나요? 그 1단계가 바로 “부정”입니다. 사람은 감내할 수 없는 일은 무시해버리죠. 그것이 없다고 생각해야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거든요.
즉 조롱으로 다는 댓글은 2가지 의미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분출하는 것. 둘은 “나는 지금 이것으로 인해 스트레스 받고 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6. 글을 끝내며
공부하기 싫다. 하·······.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나도 이해 못하는 이런 글을 쓰고 있는가·······. 지금까지 뭐라고 한지 모르겠다·······.
이 글이 헛소리라고 생각되시는 분들은 적어주세요.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점점 개그를 안 치고 있습니다. 네, 졸려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고,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적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