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발견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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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는 평범한 시민들이 살았다.
7월 11일 영화 "화려한 휴가" 서울 특별 시사회에 다녀왔다. 참으로 마음이 아픈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도중 내내, 당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 스스로에게 무거운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내 조국 대한민국에 패어진 깊은 상처의 한 대목을 호흡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내일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솟구쳐 오르기도 한 시간이었다.
안성기, 송재호, 나문희, 김상경, 이요원, 이준기, 손병호 등 가히 국민배우라고 칭할만한 스타들이 열연한 80년 5월 광주의 모습은 처절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폭도·빨갱이 소리만 들은 채 동원된 계엄군의 잔혹상, 시민군들의 놀라운 활약상, 그 속에 피어난 젊은이의 애틋한 사랑이 잘 묘사된 두드러진 영화였다.연기파 배우인 박철민, 박원상 콤비가 영화의 중간 중간 폭소를 터뜨리게 한 것들이 후반부에는 오히려 더없는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관객들의 반응은 대부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눈시울을 적시면서도 영화니까 그러겠지 하는 표정들도 적지 않게 보였다. 그러나 80년 실제의 광주는 훨씬 참혹했다.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의 증언뿐만이 아니라 희생자들의 상처 부위 등 지금 남아 있는 기록물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는 오히려, 너무 참혹해서 관객들이 외면하게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듯이 적절히 재미있고 적당히 유쾌했다. 위기상황에서 피어나는 인간승리를 다룬 잘 만든 재난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의 무거움에 짓눌리지 말고 일단 보게 해야겠다는 배려로 느껴진다. 근현대의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가르치지 못한 것이 오늘의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을 이 지경으로 만든 가장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니 이 영화의 제작자와 감독과 연기자와 스텝들에게 빚을 진 기분이다.
눈물로 탈출하던 나의 광주
영화를 보면서, 나의 마음은 80년 5월 걸어서 광주를 탈출하던 이십칠 년 전의 나에게로 돌아갔다. 80년 5월 당시 나는 광주 외곽지에서 3일간 머무른 일이 있다. 중앙부처인 내무부 예산계장으로 근무할 때였는데, 5월19일 차관이 고향이 전남인 계장(사무관)급 이상 간부 5명을 소집했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직후고 고향(광주)에서 시위가 심상치 않다는 풍문이 들려오는 터라 바짝 긴장했다. 차관 말씀은 "광주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올라오는데, 조용히 현지에 내려가 상황을 살펴보라" 는 것이다. 그러면서 광주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면 무리하지 말고 즉각 올라오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당시 광주는 외부와 교통, 통신이 차단되기 시작한 상태라 곧바로 광주시내로 들어가지 못하고 외곽지역인 송정리(지금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로 내려갔다. 장성으로 갔던 3명은 장성역에 내리자마자 분위기가 살벌하여 서울로 되돌아갔고, 나의 일행 2명만 송정리 역에 내려서 지인 집에 3일간 머물 수 있었다.
광주시내와는 전화통화는 물론 시내버스도 끊기고, 시내로 연결되는 교량을 계엄군이 지키고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간간이 총소리가 들리고 방송에서는 폭도·오열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으니 시민들은 출입을 삼가라는 내용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런 사이에 학생들이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뒤에는 빨갱이들이 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유언비어들이 나돌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믿기지가 앉았다. 간첩들이 조정해서 시민·학생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니, 절대로,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무부에서는 광산군청을 통해서 빨리 올라오라는 독촉이 빗발쳤다. 그런데 막상 서울로 올라가는 방법이 막막했다. 이제는 송정리역까지 폐쇄된 상태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전북 정읍까지 무작정 걸어가서야 겨우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죄송함과 무력감에 걸음을 멈추다가 말다가 하면서, 나는 독재의 하수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라고 스스로 다짐을 하고 또 하면서 겨우 내무부로 복귀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5월 21일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의 가장 번화가인 금남로 도청앞에서 비무장 시위군중을 향해 집단 발포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하게 했고, 분노한 시민들이 엽총을 들고 나오기 시작하여, 예비군 무기고, 파출소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이 철수하였고, 시민들이 도청을 탈환한 후 5월 22일 최규하 전 대통령은 녹음한 내용을 헬기로 방송하고 다녔다.
위대한 시민정신을 기억하며
영화는 그날의 슬픔과 공포와 공포를 이겨내는 용기를 잘 그려내고 있었다. 다만, 영화는 광주가 고립되었던 며칠간의 아름다운 행적을 제대로 담지는 못하고 있다. 단 한 건의 범죄도 없었고, 약탈이나 폭력사태 등 고립된 도시에서 흔히 일어나는 소요도 없이, 한 도시 전체가 부족한 물품을 서로 나누면서 압도적 군사력 앞에 저항했던 광주의 위대한 시민정신을 그려내지는 못했다.
그랬다. 그 때 광주는 모두가 하나 되었다. 주먹밥과 김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나눠주는 아주머니들, 부상을 당한 사람들을 위한 피가 모자란다는 호소에 팔을 걷어 부치며 너도 나도 헌혈을 했던 시민들이다. 깡패도, 양아치도, 도둑도 없는 민주 시민의 도시였던 것이다.
광주가 위대했던 것은 단순히 군부독재의 만행에 대한 저항때문만은 아니었다. 대도시에서 잃어가고 있던 공동체의 따스함, 약자가 좌절 앞에서 서로를 향해 폭력을 들이대지 않고 뭉쳐 스스로를 지키려 한 그 성숙함, 극한적 상황에서 도피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용기, 악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 등등, 이것은 정녕 광주만이 아닌 한국인 모두의 자부심이다. 그러나 그 기간동안 국내 언론들은 이들을 폭도라고 불렀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한국인의 참 정신을 스케치로라도, 또는 다큐 형태로라도 좀 집어넣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진실과 거짓을 대조하는 당시 화면과 기사를 흑백화면으로라도, 1-2분만이라도 보여주었더라면, 또는 마지막 크래딧 올라갈 때라도 설명이 좀 되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하는 여운이 남는다.
아무리 해도 다 갚을 수 없는 빚을 갚기 위해
그로부터 14년의 세월이 흘러 나는 1994년에 고향인 광주광역시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던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데 일조할 기회였다.
맨 처음 시도했던 일은 망월동 묘역 성역화 사업을 착수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 당시는 전임 시장들이 해결하지 못한 난제중의 하나였다. 유족들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전에는 일체 손을 못 댄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몇 날 며칠을 유족들과 토론하고 호소했다. "여러분의 심정은 충분히 압니다. 역사 속에 진실은 반드시 밝혀집니다. 진상규명은 시장인 저부터 앞장서겠습니다." "그러나 당시 관도 없어서 제대로 장례도 못 치르지 않았습니까? 이제 제대로 장례를 치르고 좋은 데로 모십시다." 이런 간절한 호소가 받아들여져 그해 11.1 시민의 날을 기해서 5.18 묘역 성역화 사업의 첫 삽을 뜨게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유가족에 대한 의료보호 및 희생자등에 대한 추가보상을 실시하면서, 광주광역시청안에 과감하게 5.18 광주민주화운동 사료실을 설치하고 시민들이 보관하고 있었던 각종 사료들을 공개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피묻은 태극기, 옷가지, 탄피, 군복, 철모, 기록물, 사진 등이 봇물 쏟아지듯 들어 왔다.
그런 사이에 여기저기서 유무언의 압력이 들어왔다. 시장이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비록 5.18광주사태가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군의 사기도 생각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사실 사료실 설치는 중앙부처와의 사전 상의 없이 시장인 내가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당당하게 말했다. "군의 사기를 회복하는 것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진실을 밝혀야 제대로 되는 것이지 덮어 놓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 뒤로도 나는 광주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그 정신을 국민 전체의 것으로 돌리기 위한 노력을 힘닿는 대로 했다. 이것이 그날 죽어간 사람들을 제대로 위로하는 일이고 살아남은 나 자신의 부채를 조금이라도 갚는 일이기도 했다. 97년 내무부장관 시절 우여곡절 끝에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국경일로 삼은 것도 나의 조그만 속죄이다.
내가 광주 사람이라서 죄책감을 느낀 것만은 아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폭동에서 사태로, 사태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다시 민중항쟁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본질은 단 한 가지다.
그것은 민주·자유·평화·정의의 바탕 위에 모든 국민이 살맛 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민·관·군이 따로 없고 동서가 따로 없고 모든 국민이 대한민국의 형제자매로서 함께 더불어 사는 신명 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도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갖도록 하는 사회다. 인류문명사를 밝게 비추는 빛나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다. 광주의 5월정신은 이미 대한민국의 정신으로 계속되고 있다.
광주 시민은 폭도가 아니야
영화의 종반부에 시민군의 일원이었던 주인공은 이렇게 절규한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야. 개xx들아 ”
그렇다. 80년 5월의 광주는 빨갱이도, 폭도도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그리고 내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이웃들을 사랑하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정권을 찬탈한 군부에 협력하여 그런 그들을 폭도로 몰고 갔던 언론은 지금이라도 과거사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해야 한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준 제작진들, 배우들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80년 5월의 광주도 이제 27년이나 지났다. 그 당시 어린 아이들이었거나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들은 80년 5월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른다. 그런 젊은 세대들에게 그날을 알려주고 잊지 않게 해준 영화 ‘화려한 휴가’의 김지훈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수고해주신 제작진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연기자들의 대사, 호흡, 몸짓, 표정하나까지 그 모든 것들이 잊혀지지 않는 진한 여운과 감동을 준 영화였다. 이 좋은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보고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2007년 7월 13일
강운태(전 광주광역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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