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습니다.
국회의원 당선 확정 순간에 아내와 진한 입맞춤을 하던 용기 있는 남자.
아내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죠. 가장 큰 기쁨의 시간에 온 나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사랑하던 남자. 온 나라에서 가장 큰 용기를 가진 남자.
용기는 다시 온 나라로 퍼져나갔고, 용기 있는 조언자들을 찾아보려 하지 않았던 측은한 대통령을 역사의 뒤안길로 돌려세웠습니다.
대한민국의 부조리들에 대해 거침없이 내밀어지던 그의 체포영장은 처음으로 기각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회 구성원들이 이념, 정파를 초월하여 한목소리로 공유하고 있는 블랙리스트가 두렵습니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성을 향유하던 마광수의 사라를 구속시키던, 남성 중심의 광기의 시대에서 우리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마광수가 대학교수가 아닌 싸구려 만화가였다면 그렇게 큰 곤욕을 치렀을까요.
어쩌면 유신시대까지 회귀해버렸는지도 모르는 이 시대에, TV에서는 걸 그룹들이 꽉 끼는 바지를 입고서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경쟁합니다. 엄정한 군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아들들은 무대 아래서 환호성을 질러댑니다. 이곳에는 자유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화살은 그림의 작가가 아닌 표창원 의원을 향하고 있습니다. 국회라는 신성한 공간에 나체 그림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보는 9시뉴스는 어떠한지요. 나이 지긋한 남자와 어리고 예쁜 여자가 나란히 앉아 뉴스를 합니다. 중요한 뉴스는 남자가, 이어서 작은 뉴스는 여자가 합니다. 자켓은 몸에 밀착시키기 위해 집었습니다. CNN이나 BBC의 여성 저널리스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오늘도 우리 딸들은 그렇게 세뇌되어 가고 있습니다. ‘유리천장’을 당연시 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여성의 육체를 드러내는 것과 여성의 육체를 상품화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쁜 일이겠습니까.
여성분들께 호소 드리고 싶습니다. 설령 ‘더러운 잠’이라는 그림이 풍자와 해학이 아닌 조롱과 비하라고 느껴지시더라도 그 잣대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되짚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김기춘의 머리를 발로 차며 노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제 눈에 풍자를 넘은 우려를 자아내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선출직 공직자 연령제한이 ‘어르신’에 대한 무례함이라고 생각하는 이 나라의 광장에서, 여남노소를 막론하고 한 사람 당 하나의 촛불을 들고 100만의 평화집회를 이뤄냈던 성숙한 시민의 광장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라는 것은 집단적 감정 하에서 의외로 쉽게 허물어져버릴 수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 역시 그런 우려를 불러일으킵니다.
여러분은 ‘여성을 모독했다’는 생각에, 지금껏 남성들에게 억눌려 산 억울함 때문에, 표창원 의원에게 지나친 발길질을 가하고 계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올랭피아라는 작품의 기원은 조르조네의 비너스입니다.
‘더러운 잠’의 작가는 배경은 올랭피아를, 인물은 조르조네의 비너스를 차용했다고 합니다.
비너스가 아니지만, 몸을 팔아 먹고사는 현실의 여자이지만 관람자를 향해 당당한 시선을 던지는 올랭피아의 여인이 여성성에 대한 모독일까요?
올랭피아가 처음 출품되었을 때 관람객들이 분노했던 것은 여성에 대한 비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신적인 미의 상징이라는 위선적인 면죄부조차도 적용될 수 없는 현실의 여자, 그것도 일개 창녀가 자신들에게 시선을 - 당당함을 넘어 무심하기까지 한 - 정면으로 던지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들의 성적 이중성을 - 낮에는 귀부인들과 사교를 하고 밤에는 매음굴에 출입하는 - 아프게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여성성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 오히려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남성성에 대한 직시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올랭피아의 옆에는 충직한 하녀가 있었습니다.
반면 국회에 걸린 패러디 작품에는 최순실이 있습니다. 주종관계는 뒤집혀 있고 대한민국의 공주는 잠들어버렸습니다. 척박한 현실에서도 꿋꿋이 유지되던 올랭피아의 나라는 침몰해가고 있었습니다.
공주는 여왕이 되려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여자’로 남고 싶었습니다.
‘길라임’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늙은 육체를 비하했습니다. 독일의 메르켈처럼 당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녀 역시 여성 상품화 문화에 의한 또 한명의 희생자였던 것입니다. 번거로운 올림머리를 하지 않고서는 방문을 나서지 못했습니다.
누군가의 비너스가 되기 위해서 그 수고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작가의 메시지는 적확하고 명료합니다.
올랭피아 나라는 침몰하고 있었고 그 시간 동안 공주는 꿈에 빠져 있었습니다. 줄기세포로 되돌린 비너스의 육체에, 이제 곧 비너스의 얼굴이 되어갈 거라는 허황하고 혐오스러운 꿈에 빠져있었습니다. 그 얼굴에는 푸른 멍이 들어있었습니다. 하얀 실이 삐져나오고 있었습니다.
만약 비너스의 나신을 가렸다면, 얼굴과 신체의 상반된 이미지를 그토록 강렬하게 충돌시킬 수 있었을까요. 그만큼의 강한 불쾌감을, ‘더러움’을 창출해 낼 수 있었을까요.
박근혜 대통령을 벌거벗긴 것이 아닙니다. 그 분에게 던지는 물음입니다.
꼭 그런 꿈을 꾸어야만 했느냐고...
이 그림 어디에 왜곡이 있습니까. 여성에 대한 비하가 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나라를 침몰시켜버린 무책임한 행정부 최고책임자가, 군 통수권자가 있을 뿐입니다.
다시 한 번 호소 드립니다. 여성에 대한 비하가 아닙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아이들의 원망입니다. 질문입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느냐고.
그에 대한 대답일까요.
근엄한 표정의 ‘남성’ 국회의원들은 신성한 국회에서 여자 사진을 보고, 푸른 들판에서 힘없는 골프장 캐디들을 딸 같다며 희롱하고 있습니다.
누구와 싸워야 하겠습니까. 무엇과 싸워야 하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부디, 분노를 조금만 가라앉히시고,
지혜롭고 용기 있는 한 남자를 침몰시키지 말아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