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현행 공직선거법상 대통령 피선거권이 없다는 견해가 법학계와 법조계에서 폭넓게 제기돼 ‘후보 자격’ 논란이 커지고 있다. 더욱이 반 전 총장에게 출마 자격이 있다는 중앙선관위 유권해석이 전체 위원회의가 아니라 일개 직원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권위가 흔들리는 상황이다.
헌법학계 중진인 김선택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법전원) 교수, 이종수 연세대 법전원 교수, 임지봉 서강대 법전원 교수는 는 22일 <한겨레>에 “미국 뉴욕에 10년간 생활 근거를 뒀던 반 전 총장은 ‘최근 5년간 국내 거주’라는 대통령 피선거권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출마 자격이 없다”며 “그가 어느 당의 후보로 선출되거나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해도 이 문제로 가처분 또는 선거무효 소송 등이 제기돼 또다시 헌정질서에 혼란이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1997년 1월 선거법에 이 조항이 신설될 때 야당 간사로 참여했던 유선호 전 의원도 <한겨레>와 통화에서 “그것은 선거일부터 역산해서 최소 5년간 국내에 거주해 여러 사정에 밝은 사람 중에서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취지로 여야가 합의해 만든 조항이다”라고 설명했다. 법조계에서도 과거 시군구 선거관리위원을 지낸 임호영 변호사, 김종훈·위대훈·박훈·박찬종 변호사 등이 모두 같은 견해를 내놓고 있다.
■ 뉴욕에서 10년 살았는데 피선거권이 있다? 반 전 총장의 출마 자격 논란은 현행 공직선거법 제16조 1항의 대통령 ‘피선거권’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비롯된다. “선거일 현재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40세 이상의 국민은 대통령의 피선거권이 있다. 이 경우 공무로 외국에 파견된 기간과 국내에 주소를 두고 일정 기간 외국에 체류한 기간은 국내거주기간으로 본다”는 이 조항은 “대통령의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는 헌법(제67조 5항)의 위임에 따라 1997년 1월 선거법 개정 때 신설됐다.
중앙선관위는 이 조항과 관련해 최근 언론에 배포한 안내문에서 “반기문 전 총장은 국내 계속 거주 여부와 관계 없이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고 밝혔다. 생애 74년 가운데 5년 이상을 국내에 살았기 때문에 피선거권이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상당수 헌법학자와 법관을 지낸 변호사 등은 반 전 총장에게 피선거권이 없다고 말했다. 김선택 고려대 교수는 “중앙선관위가 신기한 해석을 하고 있다. 선관위는 그 조항에 ‘계속하여’가 없다는 이유로 그런 해석을 내놓았는데, ‘거주하고 있는’은 당연히 ‘현재진행형’을 뜻하는 것이어서 ‘계속하여’가 생략됐다고 봐야 한다. 적어도 선거 5년 전부터는 국내에 거주해서 이곳 사정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타당하다”고 했다.
이종수 연세대 교수도 “선관위처럼 ‘다 합쳐’ 5년으로 해석하면 저 조항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라며 “‘계속 거주’ 또는 ‘연속 거주’라는 해석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학계의 통설이 그렇다”고 말했다.
■ “반기문은 공무도, 일정 기간 체류도 아냐” 반 전 총장이 유엔 일을 했으니, “공무로 외국에 파견”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임지봉 교수는 “여기서 말하는 ‘공무’는 대한민국과 그 국민을 위한 공무, 이를테면 외교관 같은 것을 말하는데, 유엔 사무총장은 한국 정부가 파견한 게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출마해서 되는 것이고, 그가 하는 일도 한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반 전 총장은 ‘공무 파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그럼 일정기간 외국 체류는 어떨까? 이종수 교수는 “그것은 해외에 공무로 출장을 가거나 해외 주재, 연수, 여행 등을 다녀온 사람이 나중에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글자 그대로의 예외규정”이라며 “주소는 ‘생활의 근거되는 곳’이라고 민법에 나와 있다. 반 전 총장은 지난 10년간 생활의 근거가 미국 뉴욕이었다. 그러니 ‘국내에 주소를 두고 일정 기간 외국에 체류’한 경우로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주민등록이 한국에 있었다고 해도 ‘생활의 근거가 되는’ 주소가 여기 있지 않았으니 예외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중앙선관위엔 최고·최종해석권 없어” 법률가들은 중앙선관위의 유권해석이 마치 최종 해석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넌센스라고 지적했다. 임호영 변호사는 “법령 해석은 문리해석이 먼저고, 유권해석은 후순위”라며 “중앙선관위의 해석보다 앞서는 것이 법률가들의 문리 해석이다”라고 강조했다.
선관위가 엉뚱한 유권해석을 내놓았다가 법원에서 깨진 경우도 있다. 법령의 최종 해석권은 법원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이 선거를 치르면서 선거자금 모금이 정치자금법에 저촉되는지를 물었을 때 선관위는 “교육감은 정치인이 아니어서 정치자금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검찰이 이를 문제 삼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했고, 법원은 “선거를 치르면서 돈을 모금하면 정치자금법 적용 대상이 된다”고 판단했다. 선관위가 틀린 것이다. 최근 1심에서 무죄가 난 박선숙 의원의 ‘리베이트’ 수수 의혹 사건도 선관위가 무리하게 법 적용을 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 “불복 소송 제기되면 책임은 누가 지나?” 이들이 반 전 총장의 피선거권 문제를 지적하는 까닭은 그가 후보나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곧바로 법적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김선택 교수는 “반 전 총장이 후보가 되거나 대통령에 당선이 되는 경우는 물론이고, 후보로 등록할 때부터도 ‘자격 무효’ 소송이 걸릴 수 있다. 현직 대통령이 탄핵 당해 헌정질서에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으면서도 정통성·정당성 시비의 소지를 안고 가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종훈 변호사도 “대통령 후보의 피선거권 구비 여부는 선거 및 당선의 유·무효를 가르는 문제인 만큼 한시라도 빨리 공론화해 예상되는 조기 대선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