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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umorstory_83764
    작성자 : Windy~windy~
    추천 : 4
    조회수 : 951
    IP : 220.76.***.141
    댓글 : 5개
    등록시간 : 2004/11/22 23:48:42
    http://todayhumor.com/?humorstory_83764 모바일
    삼국지의 잘못알고있던 이야기들~
    [마우스 노가다 죽임 =_=]

    음 ...난 7번까지 보다가 내린다에 올인...

    거꾸로 읽는 삼국지 1
    도원결의는 없었다
    유비, 관우, 장비는 삼국시대 촉나라의 중요한 인물들이다. 이 세 사람이 공적으로는 군주
    와 신하, 사적으로는 의형제 관계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송, 원대 이후 민간문학 분야에서 세 사람의 관계 및 이들의 천하평정 과정이 문
    학화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이야기는 미화되고 과장되었으며, 그 와중에서 서서히 도원결
    의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삼국지연]의 저자 '나관중'은 원대에서 명대에 걸친 혼란의 시대를 산 사람으로, 당시 많
    았던 농민본가의 대부분이 결의의 형식으로 조직되었다.
    나관중 자신도 왕이 되려는 뜻을 품었었고, 농민봉기와 깊은 관련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원나라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키려는 '반원기의'에 참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이유로 그가 도원결의 이야기를 쓸 때에도 송, 원대부터이며 형성되어 있었던 이야
    기에 현실사회에서 보여지는 결의의 형식을 전형화해서 이 이야기를 완성시킨 것으로 보인
    다.
    이 이야기는 역사를 합리적으로 연장시키고 발전시켜 만들어졌으며, 인물들의 성격을 독
    자들의 심리에 일치시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 결과 수백 년 동안 누구나 알게 될 
    정도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된 것은 물론, 다른 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진수'의 [삼국
    지]에 약간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장비는 관우를 형으로 대접했다고 하며, 유비는 두 사람을 특히 신뢰했
    다고 한다. 또한, 이들 세 사람의 관계를 '은혜는 형제와 같다', '은혜는 부자지간과 같다', 
    '의리에 있어서는 임금과 신하였다'는 등의 일반적인 형태의 서술만 있을 뿐 세 사람이 정식
    으로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 때문에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도원결
    의의 이야기는 작자가 꾸며낸 허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반드시 허구가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은 '은혜는 형제와 
    같다'라는 기록과 역사적 측면에서의 이들의 관계, 그리고 역사적, 문학적 사실성의 측면에
    서 도원결의 이야기는 실제로 그러한 사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이야기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간주되고 있으며, '하북성' 
    탁현에는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구체적인 지점인 '충의점'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
    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말하는 장비의 집 뒤뜰에 있던 '복숭아 나무가 있는 정원'이
    라는 것이다.
    사실 수백 년 동안 이러한 사실을 의심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탁현에는 또 하나의 주장이 있다.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곳은 복숭아 
    나무가 있는 정원이 아니라 탁현의 남쪽에 위치한 '수문구'의 옆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여기
    에는 세 사람의 의로운 사람의 묘인 '삼의묘'가 있었는데, 건물은 세 명의 의로운 사람인 유
    비, 관우, 장비를 비유해 길이, 넓이, 높이가 모두 1미터 정도 되었다고 한다.
    사실 유비, 관우, 장비는 [삼국지연의]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주인공들이다.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으며 힘을 합쳐 재난에 대처하고, 위로는 나라에 보은하며 아래로
    는 백성들을 재난에서 구하고자 맹세한 이야기, 또 동년, 동월, 동일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동년, 동월, 동일에 죽자고 서로 맹세한 이야기, 그리고 유비가 관우, 장비의 복수를 하기 위
    해 오나라를 토벌하는 이야기까지, 나관중은 전체의 반이 훨씬 넘는 지면을 이용해 세 사람
    의 충의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세 사람은 결의로 형성된 의협심을 위해서는 목숨을 희생하는 것도 아쉬워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 결의는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다.
    바로 이런 까닭에, 도원결의에 관한 이야기가 비록 허구일지라도 사람들은 그 이리 실제
    로 행해졌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2
    맏형은 유비가 아니라 관우였다
    중국문학사에서 [삼국지연의]와 같은 소설을 남남끼리 형제를 맺는 관계의 소설이라 일컫
    는다면, 이러한 소설의 흐름은 이미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의 소설 가운데 <와강채> 이야기, [설악전] 중의 <우고>, <탕회>, <악비>의 이야
    기, [삼협오의] 중의 <오서취의> 이야기 등은 모두 그런 류의 이야기들이다.
    이와 같이 결의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지금까지 세상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
    을 미친 것은 역시 유, 관, 장의 결의이다. 사람들은 도원결의를 의형제의 정을 표현하는 대
    명사로 여기고 있을 정도이다.
    [삼국지연의]의 도원결의 이야기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복숭아꽃이 만발한 정
    원의 숲 속에서 소와 양을 바쳐 제사를 지내고 하늘에 맹세함으로써 의형제를 맺는다. 이 
    때 나이 순으로 유비가 맏형, 관우가 둘째, 장비가 막내가 된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민간에는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을 때, 누가 형이 되고 누가 
    아우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한바탕 옥신각신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처음에는 세 사람 모두 형이 되고 싶어 그것을 나이가 많고 적은 순으로 결정하기로 했
    다. 그래서 서로 몇 년, 몇 월, 며칠에 태어났는가를 이야기했는데,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같은 연, 월, 일을 대었다.
    이때 유비가 태어난 시간으로 순서를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장비가 가장 먼저 자기가 태
    어난 시는 새벽녘이었다고 했고, 관우는 "나는 더 빠르다. 태어난 시는 첫닭이 막 울었을 때
    였다"라고 했다. 그러자 유비는 한술 더 떠 그전의 캄캄한 한밤중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되자 장비는 자신이 막내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서둘러 말했다.
    "둘 다 거짓말 마시오. 이건 없었던 일로 칩시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오?"
    유비가 물었다.
    장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큰 나무가 눈에 띄었다. 장비는 나무 오르
    기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무 오르기로 정합시다."
    장비는 이렇게 말하고는 유비와 관우의 동의도 얻지 않은 채 나무에 달려들어 단숨에 꼭
    대기까지 올라갔다.
    관우는 어쩔 수 없이 아예 응했지만, 그는 줄기 중간 정도까지밖에 오르지 못했다. 한가운
    데라면 위로는 형이 있고 아래로는 아우가 있으므로 이것으로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고 내
    심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비는 서두르지도 않고 침착하게 나무 밑둥에 다가서더니 선 채로 나무를 부둥켜
    안았다.
    장비는 의기양양해서 크게 외쳤다.
    "둘 다 형님이라고 불러!"
    유비가 말했다.
    "서두르지마! 자네에게 묻겠는데 이 나무는 뿌리가 먼저인가, 아니면 줄기가 먼저 자란 것 
    인가?"
    "물론 뿌리가 먼저 있었지."
    "바로 그거야. 그러니 우선 '나'라는 사람이 있고서야 자네들이 있는 것이네."
    장비는 이 말을 듣고 당황했다. 또 다시 번복을 하자니 이미 한번 스스로 약속을 깨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자신이 제안한 것이었기 때문에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
    우도 유비의 지혜가 뛰어난 것을 보고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고, 유비, 관우, 장비의 순으로 서열이 결정된 것이
    다.
    위와 같은 민간의 전설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정보
    는 얻을 수 있다. 곧 유비, 관우, 장비의 형제 순서는 나이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유비가 최
    연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들 중 최연장자는 유비가 아니라 관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연의]에 기록된 유비의 나이는 중평 원년의 도원결의 때 이미 28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의 <선주전>에는 태어난 연도는 없고, 장무 3년인 223년에 죽었을 때가 향년 
    63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은 사람의 나이는 만으로 계산하지 않는 것을 근거로 하면, 유비가 태어난 해는 연희 4
    년이 된다. 따라서 중평 원년에는 24세이지 28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관우의 나이는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장비전>에는 "관우는 장비보다 몇 살 연
    상으로, 장비는 관우를 형으로 모셨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전정방의 [소설총고]에 의하면, 청나라 때 관우의 고향에서 출토된 '관후조묘비기'
    에 , 관우는 연희 3년 6월 24일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여림의 [관공연보]에는 "관우는 실은 유비보다 한 살 위였다."라고 쓰여 있다.
    장비는 [삼국지연의]에 56세에 죽었다고 되어 있으니까, 221년에 이미 죽었다는 설이나 
    [관공연보]에 기록된 '장비는 유비보다 네 살 연하'라는 설을 가지고 추리해 본다면, 장비는 
    57세에 죽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의형제가 되었을 때 관우는 25세, 유비는 24세, 
    장비는 20세가 된다. 그러므로 나이순으로 볼 때의 맏형은 관우이지 유비가 아닌 것이다.
    [삼국지연의]의 설은 역사서의 '은혜가 형제와 같다'라고 하는 기술을 근거로 한 상상이
    며,,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므로 믿을 수 없다. 이런 점은 나관중의 삼국지가 정확성에 문제
    가 있다는 한 예에 불과하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3
    장비는 추남이 아니었다
    [삼국지연이]에서는 장비를 소개할 때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키가 팔 척에 표범 같은 머리, 반짝이는 눈, 근육질의 아래턱, 호랑이 같은 수염에다 목
    소리는 우레와 같고, 힘은 거친 말과 같다."
    완전히 거친 남자에, 추남의 전형이다. 성도의 무후사에 있는 장비의 인물 조각상의 생김
    새도 겁을 자아내게 하는 얼굴이다.
    무후사의 인물 조각상은 대부분 [삼국지연의]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기에 장비의 얼굴이 
    검은 것은 주로 야담가와 연극의 인물 이미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중국의 연극에 등장하는 과장된 인물 분장은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사람들의 도덕적4 평
    가와 미의식이 담겨 있다.
    장비를 표현하는 검은 분장은 바로 검은 얼굴로써 강직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녹색 분장은 잔인함을 표현하며, 흰 분장은 엉큼함을 표현하고, 붉은 분장은 충의
    를 표현한다는 등의 연극의 분장 약속과 일치한다. 이같은 인물의 조각상과 연극의 분장은 
    소설 묘사에 의거해 만든 것으로 재창조의 결과인 것이다.
    사실 [삼국지연의]에 나타난 장비의 인품에 대한 묘사는 솔직하고 거칠며 악을 미워하는 
    사람의 전형이다.
    예를 들면, 화를 참지 못하고 순찰관을 채찍질한 것이나, 유비가 제갈량에게 삼고초려의 
    예를 다하는 장면에서 불평을 하는 태도 등으로 장비의 호탕하고 솔직한 성격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 잠시 조조를 섬겼던 관우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 이야기나, 고성에서 영웅이 회합하는 
    장면에서의 장비는 거칠고 난폭해도 세세한 곳에 신경을 쓰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장판교에서 세 번 호통을 쳐서 적을 움츠러들게 한 그 모습은 정말 용맹스러운 것
    이었으며, 또한 의형인 관우의 원수를 토벌하기 위해 장비가 죽음을 맹세하는 장면도 의리
    에 불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가 만들어낸 장비의 인물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난폭하고 거친 장비'
    였다.
    그럼 실제로 장비의 용모는 어떠했을까?
    관련 자료를 분석해 보면 [삼국지연의]에 그려져 있는 것과 같은 추남은 아닌 것이 확실
    하다.
    나관중은 장비의 이미지에 대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인식을 토대로 해서, 그가 술을 팔고 
    돼지를 잡아 파는 장사를 했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는 민간설화도 많아서 오늘
    날에도 중국의 도축업에 관계하는 사람들은 장비를 자신들의 원조로 숭앙하고 있다.
    그러나 장비의 집안이 대대로 탁군에 살았고 전답과 금전도 충분했다는 것을 보면 그의 
    출신은 낮은 신분이 아닌 일정한 지위를 갖는 상인 계층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관중이 그린 장비의 인품과 기호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에다 거칠고 난폭
    한 덩치 큰 남자였으나, 원래의 그는 시문에 능할 뿐만 아니라 서화에도 일가견이 있는 사
    람이었다. 또한, 정사의 장비전을 보면 '소인을 귀여워하지 않고 군자를 경애하는'성품이었
    다.
    이것만 보더라도 확실히 장비는 도리를 모르는 거칠고 난폭한 남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4
    관우에게는 청룡언월도가 없었다
    [삼국지연의]의 제1회에는 유, 관, 장이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는다. 생사를 함께 하며 서로 
    협력해 위기에 대처하고, 위로는 나라에 총성하며 아래로는 백성을 재난에서 구할 것을 맹
    세하는 것이다.
    그 후 우선 준마를 사고, 유비는 도공에게 명해 쌍고검을 만들었으며, 관우는 무게 82근의 
    긴 자루가 붙어 있는 반달 모양의 큰칼인 청룡언월도(별칭 냉염거)를 만들었다고 쓰여있다.
    20여 년에 걸쳐 계속되는 정벌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관우의 이 청룡언월도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용맹한 관우는 평생 전장을 누볐다 청롱언월도에 의해 안량과 문추가 목숨을 잃었고, 다
    섯 관문을 지나는 장면에서는 조조의 부하 장수 여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밖에도 청룡
    언월도에 희생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민간전설에 나오는 청룡언월도는 더욱도 그럴 듯한 치장이 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관
    우는 마음에 드는 무기를 손에 넣기 위해서 도검 제작의 명인 몇 명에게 부탁해, 두 달에 
    걸쳐 강철을 담금질해서 겨우 푸른빛의 큰 칼을 만들었다고 한다. 장인들은 이것으로 다 되
    었다고 생각했지만, 관우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더 담금질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담금질은 다시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달이 하늘에 높이 뜨던 날, 장인들이 불 속에
    서 그 칼을 꺼내어 담금질하려고 하자 칼에서 하늘을 향해 한 줄기 빛이 솟았고, 바로 그대 
    하늘에서 한마리 청룡이 내려와 빛에 맞았다. 용의 피가 칼 끝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며 우레
    와 같은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놀라서 도망쳤다.
    관우가 다가가서 보니 맑고 투명해 마치 보석처럼 보이는 칼이 땅 위에 세워져 있었다. 
    바로 이 칼이 반달을 닮았고 청룡의 피로 담금질해서 완성된 것이라 하여, 청룡언월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민간에는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관우의 오른팔인 주창도 청룡언월도 한 자루를 가지고 있었는데, 관우의 칼이 이미 망가
    져 버렸기 때문에 관우는 주창의 청룡언월도를 얻기 위해 주창의 사소한 과실을 문제삼아 
    그에게서 청룡언월도를 받아냈으며, 그 이후 주창의 수중에서는 청룡언월도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의 민간전설 모두 그냥 믿어버리기에는 어딘가 어색하다.
    그럼 관우는 정말 청룡언월도를 사용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진수의 정사나 다른 역사책에도 명확한 언급이 없다. 정사에서는 두 곳에
    서 관우의 무기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관우전>에 나오는 안량을 벤 대목
    이다.
    "관우는 안량의 깃발과 수레를 멀리서 바라보더니 말을 채찍질해 다가갔다. 원소의 대군
    이 보는 앞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여러 장수들은 너무나도 
    강력한 관우의 위력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 중에 관우를 상대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하나는 <노숙전>에 나오는데, 관우와 노숙이 익양에서 회견하는 단도부회(한 자루의 
    칼을 지니고 회담에 나아가다)의 부분으로 여기에서는 '대도, 칼'등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양나라의 도홍경이 저술한 [고금도검록]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관우는 유비에게 총애를 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몸소 도산의 철을 캐서 칼 두 자루
    를 만들고 '만인적'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그러나 전투에 패하자 그는 칼을 아끼는 마음에 
    물 속에 던졌다."
    이상의 기술에서 관우가 사용한 무기는 확실히 칼이다. 그러나 그 칼이 자루가 긴 대도였
    는지, 아니면 청룡언월도라 불리우는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도 무후사 박물관의 담량소는, "관우의 칼은 청룡언월도가 아니며, 관우는 청룡언월도 
    따위는 본 적도 없었다"고 말한다.
    고대의 병기는 크게 장단(길고 짧은 무기), 원사(멀리 쏘는 무기), 방구(방어용 도구)등의 
    종류로 나뉜다.
    예를 들면 검이나 박도(자루가 짧고 폭이 좁은 장도), 비수 따위는 단병기이고, 여러 종류
    의 창은 장병기이다. 활은 주로 멀리 쏘는 무기이고, 방패와 갑옷은 방어도구이다.
    삼국시대에는 긴 자루가 달린 칼은 출현하지도 않았다.
    주위가 지은 [중국병기사고]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현대에는 극(끝이 두 가닥으로 갈라져 있는 창)의 제작이 성행했고, 모(자루가 긴 창)가 
    그 다음이었다."
    곧 당시의 장병기는 극과 모였다는 것이다.
    [후한서]나 [삼국지]에는 긴 자루가 달린 칼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장극백만(긴 극이 
    무수히 많음)'이라든가, '극을 얹어서 모를 잡는다'와 같은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한대 유적
    지에서도 긴 자루가 달린 대도는 출토되지 않았다. 창이나 대도가 장병기가 된 것은 당대부
    터이기 때문이다.
    그럼 사서 속의 관우가 사용한 칼은 어떤 무기인가.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은 단도
    이고, 안량을 찌른 무기는 당시 유행하던 '모'일 것이라고 담량소는 보고 있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5
    조조는 동탁을 죽이려 한 적이 없다
    조조(155-220)는 자를 맹덕, 아명을 아만이라 하고, 패국의 초현(지금의 안휘성 박현)사람
    이다. 삼국시대의 뛰어난 정치가, 군략가, 문학자로서 후한말 한대의 관리등용방법인 '지방장
    관이 각 지방의 효행과 청렴'으로 이름난 인물을 추천하면 조정에서 관리로 채용하는 효렴
    에서 선발되었다.
    조조는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관동의 제후들과 
    함께 동탁 토벌에 가담했다. 그러나 나중에 천자를 수중에 두고 제후들을 호령하고, 복황후
    를 죽여 조정을 독점한 일로 인해 천 년 이상의 기간 동안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으며, 나관
    중이 쓴[삼국지연의]에서도 희대의 간신으로 그리고 있다.
    [삼국지연의]의 제4회는 동탁이 조정을 독점해 어린 황제를 폐위시키고, 폭력으로 백성을 
    괴롭히며 정치를 문란케 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당시 왕윤을 비롯한 신하들은 나라가 기우는 것을 근심하며 슬퍼했다. 특히 효기교위(근
    위무관)인 조조는 한이 골수에 맺혀 있었다. 그는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동탁을 죽여 천하
    에 사죄하고 싶다며, 왕윤에게 '칠보도'를 빌려간다.
    조조는 마침 동탁의 부름을 받아 승상부로 갔다. 동탁은 조조가 자기의 부름에 늦게 오는 
    것을 탓했다.
    "마른 말이어서 늦었습니다."
    조조가 변명하자, 동탁은 여포에게 준마를 가져오게 했다. 여포가 없어진 틈에 조조는 동
    탁을 죽이려고 했지만, 상대가 힘이 장사인 동탁이어서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동탁은 뚱뚱했기 때문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옆으로 해서 누었다. 조조는 서둘러 
    칼을 빼려고 했지만, 동탁이 거울에 비친 조조의 움직임을 보고 방향을 바꾸었다. 동탁은'무
    슨 짓을 하려고 하느냐'며 조조를 경계했다. 마침 그때 여포가 준마를 끌고 왔다.
    조조는 재치를 발휘해 칼을 다른 손으로 바꿔잡고는 무릎을 꿇었다.
    "보도 한 자루를 승상께 바치고싶습니다."
    동탁은 보도를 여포에게 건넨 후 조조를 데리고 정원으로 내려와 말을 보여주었다.
    동탁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조조는 후환이 두려워 그 길로 낙양을 탈출해 곧장 남동쪽으로 
    말을 달려 초현으로 도망쳤다.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민간에 전해져 내려왔다. 또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럼 역사상 이 일은 확실한 것일까?
    정사의[위서]<무제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탁은 중평 6년(189)에 영제를 폐하고 헌제를 세운다. 또 조조를 효기교위에 임명해 함
    께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조는 동탁이 결국에는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
    서 명령에 불응하고 고향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이 일은 정사의 <원소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동탁이 실권을 잡았을 때, 
    조조가 확실히 효기교위에 임명되었다는 것과 조조는 내심 동탁이 언젠가는 실패할 것이라
    고 생각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조조는 나중에 동탁을 토벌하는 싸움에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효기교위를 임명받았긴 했지만 그 자리에 취임한 적은 없었다. 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조가 동탁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미수에 그쳐서 도망쳤다는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칼을 바치고 동탁을 찌르려고 했다는 장면
    은 완전히 가공된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조조가 동탁을 살해하려고 했던 일은 사서에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관중이 이 이야
    기를 꾸며낸 목적은 조조를 깎아내리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실제로는 반 동탁 
    싸움에서의 조조의 지도적 역할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원래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나타낸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6
    진궁은 조조를 붙잡은 적이 없다
    진궁(?-198)은 후한말의 동군(지금의 하남성 복양) 사람이며, 자는 공태이다. 처음에는 조
    조를 따랐지만 그가 악하고 어질지 못한 것을 보고 조조를 떠났다. 나중에 여포를 따르며 
    종종 계략을 세웠지만, 그의 계략은 여포에게 채용되지 않았다. 결국 싸움에서 패해 조조에
    게 살해되었다.
    진궁은 조조와 알기 전에 중모현 현령에 부임했고, 도망치는 조조를 붙잡았지만 곧바로 
    몰래 석방했다. 이 이야기는 [삼국지연의]의 제 4회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조조는 동탁 살해에 실패하고 낙양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에 중모 현령인 진궁을 
    만났다.
    "왜 동탁을 배신했는가?"
    진궁이 추궁하자 조조는 대답했다.
    "국가의 큰 적을 없애려 한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거짓으로 꾸며진 천자의 조
    서를 천하에 밝히고 병사를 일으켜 함께 동탁을 주살하기 위함이다."
    진궁은 이 말에 깊이 감동하여 몸소 포박을 풀어 석방한다. 또한 조조를 상좌에 모시고 
    '천하에 충성되고 의로운 무사'라며 칭송했다.
    이렇게 해서 진궁은 공을 세워 상을 받을 기회를 놓칠 뿐 아니라, 현령의 직무를 내던지
    고 그날 밤에 중모를 떤 조조를 따르게 된다.
    이 이야기는 수백 년 동안 널리 전해져서 오늘날에는 경극을 비롯해 사천지방의 연극인 
    천극, 운남지방의 연극인 전극, 산서지방의 연극인 진극, 호북지방의 연극인 한극 등 많은 
    지방극에서 '조조를 붙잡다'가 상영되고 있다.
    이 연극의 줄거리는 이렇다.
    '진궁과 조조는 함께 도망치던 주에 대대로 조조 집안과 교류가 있었던 성고의 여백사에
    게 들렀다. 여백사는 두 사람을 환대하지만 조조는 의심에 사로잡혀 여백사 일가를 몰살시
    켜 버리는데, 진궁은 조조의 어질지 못한 모습을 보고는 떠난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진궁은 확실하게 조조를 추종했지만, 나중에 조조가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여포에게 투신했다. 그리고 여포가 패해 죽자 그도 조조에게 살해되었다. 그렇다면 
    진궁이 조조를 붙잡았었다는 것은 사실인가?
    조조가 붙잡힌 적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정사 [위서]<무제기>를 보면, 조조가 낙양
    을 빠져나와 중모현에 당도했을 때, 확실히 그 마을 숙소의 관리를 맡은 사람인 정장에게 
    의심받아 붙잡혀서 현의 관청으로 호송되는 처지가 되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 중
    에 마침 조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힘을 써준 덕분에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중평6년에 조조가 몰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면 이'정장'또는'알아본 사람'이 바로 진궁일까?
    정사를 조사해 보면, 진궁이 조조를 처음으로 따른 것은 초평 2년(191)의 일이다. 따라서 
    조조가 붙잡힌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진궁이 풀어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평 6년 조
    조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진궁은 아직 조조와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행동을 함께 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조조를 붙잡았다'는 이야기는 진궁이 조조를 따른 것에서 헤어지
    기까지의 과정을 아주 단시간의 일로 설명하고 있다.
    진궁은 조조가 동군 태수였을 때 처음으로 따랐던 것이고, 흥평원년(494)에 조조가 구강 
    태수인 변양을 죽인 것에서부터 점차 의심을 가져, 마침내 여포 휘하로 몸을 던졌는데, 그 
    사이 3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처음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좋았었다.
    나관중은 '조조를 붙잡았다'는 이야기를 창작할 때, 교묘하게 진궁과 조조를 하나로 연결
    시켜 이야기를 부풀리고 앞뒤를 바꾸는 등 진궁이 조조를 붙잡는 파란만장한 장면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 연출한 것이다.
    나관중은 진궁의 비극을 긍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조조의 자기중심주의와 잔
    인함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7
    조조는 여백사를 죽일 수 없었다.
    '조조를 붙잡은' 이야기에서 진궁과 조조는 중로현으로 도망쳐 곧장 성고의 여백사 집으로 
    가 투숙한다.
    여백사는 크게 기뻐하며 환대하지만, 집에 술이 떨어져 밖으로 술을 사러 나간다. 조조는 
    여백사 아들들의 돼지 도살용 칼소리와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자신이 살해당할까봐 일가 여
    덟 명을 모두 죽여 버린다.
    그리고 조조가 마을에서 도망치려 할 때 여백사가 술을 사서 돌아오자 조조는 나중에 있
    을 재앙을 없애기 위해 여백사까지 죽여버린다.
    "여백사인 줄 알면서 죽이는 것은 단순한 불의"라고 진궁이 비난하자, 조조는 "내가 상대
    를 배반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상대의 배반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의 이 대목은 조조의 잔인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정사를 읽
    고 사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관중에게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정사의 <무제기> 주에 인용된 왕심의 [위서], 곽반의 [세어] 및 손성의 [잡기]에 의하면, 
    조조는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올 때 분명히 도중에 여백사의 집에 투숙해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 그리고 "내가 상대를 배반하는 일은 있어도 상대의 배반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고 말한 것도 확실하다.
    [위서]에서는 '백사가 부재중일 때에 아이들이 식객들과 함께 조조를 덮쳐 말과 짐을 빼앗
    으려 했기 때문에 '조조는 방어를 위해서 '수 명을 죽였다'고 씌여 있고, [세어]와 [잡기]에서
    는 '틀림없이 자신을 죽일 작정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죽였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공통되어 있다. 즉, 당시 '백사는 부재중'으로 '외출'하고 있었던 것이
    다. 때문에 조조는 여백사의 가족을 모두 죽이기는 했지만 여백사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8
    군량미를 적게 나누어준 사람은 관리인이었다
    [삼국지연의] 제17회는 조조가 17만 대군을 이끌고 원술을 공격하는 이야기이다.
    조조는 원술의 군사를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그들의 기세를 꺾을 수가 없었다. 이때 군량
    미의 조달이 지체되어 양식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군량관인 왕후가 조조에게 보고
    했다.
    "병사들이 불만을 가지면 어떻게 합니까?"
    왕후가 불안해 하며 묻자 조조가 대답했다.
    "그때는 나에게 생각이 있다."
    왕후는 들은 대로 시행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병사들의 불평과 불만이 쌓이고 사기가 꺾여 분위기가 좋이 않았다.
    조조는 몰래 왕후를 불러 말했다.
    "너의 목을 빌어 병사들의 불만을 진정시키고 싶다."
    왕후가 놀라서 외쳤다.
    "저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조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그의 목을 쳐 높은 장대 끝에 매달았다. 그리고 
    나서 왕후가 '관의 군량미를 훔쳐 가져갔다'고 발표했다.
    병사들은 감쪽같이 속았고 이로 인해 불평은 진정되었다. 조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3일 내로 성을 함락시켜야만 한다'고 명령했다.
    이처럼 나관중의 손이 닿자 조조는 엉큼하고 악랄하며 교활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럼 진실은 어떤가?"
    왕후가 살해된 이야기는 정사의 [위서] <무제기> 주에 인용된 <조만전>에는 "군량미를 
    관리하는 사람"이라고만 나와 있으며 왕후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또 작은 되로 군량미
    를 나누어준 것은 조조가 아니라 바로 관리인이의 생각이었다.
    조조는 나중에 그의 목을 베어 진영의 문에 매달아서 병사들의 불평을 진정시켰다는 것이
    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9
    길평은 동승과 조조 암살을 모의하지 않았다
    길평은 한말의 낙양 사람이다. 본명은 태, 자는 평으로 사람들은 그를 길평이라 불렀는데, 
    한나라 헌제 때 태의(궁중의사)였다.
    [삼국지연의]에서 길평은 건안 5년(200)에 차기장군인 동승과 함께 조조 암살을 모의하고, 
    마침 병을 진찰하는 기회가 생겨 조조를 독살하려고 한다.
    그러나 동승의 하인이 밀고해 길평은 체포되어 한 시간 동안이나 두들겨맞고, 전신의 피
    부가 찢겨 피가 바닥을 적실 정도로 고문을 당한다. 그러나 길평은 끝까지 자백하지 않는다.
    조조는 길평을 동승의 집에 끌고가 서로를 대면시켜서 증거를 잡으려고 하지만 길평은 그 
    자리에서 조조에게 욕을 퍼붓고는 계단에 머리를 부딪쳐 죽어 버린다.
    그러면 궁중의사인 길평은 정말로 조조에게 고문당해 죽음으로 내몰렸을까?
    정사에 비추어보면 [삼국지연의]의 묘사가 역사적 사실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사의 <무제기>를 보면 길평은 길본이라고 해야 하며, 길평이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
    고 길본은 동승의 조조 암살계획에 참여한 적은 없고, 건안 23년(218) 탐기, 위황 등의 조조 
    암살계획에 참여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길본은 탐기, 위황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며, 승상장사 왕필과 영천전농중랑
    장 엄광이 그를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조조가 길본을 죽인 것이 아니며, 시기적으로도 건안 
    5년이 아닌 건안 23년의 일이 된다.
    그 외에[삼국지연의]제69회에는 길평의 아들인 길막과 길목이 탐기와 위황의 계획에 참여
    했고,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 또한 역사에 기록이 없으므
    로 나관중의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10
    관우는 화웅을 죽이지 않았다.
    화웅은 동탁의 부하 대장 중에 한 사람으로, 나관중은 그를 신장은 9척, 범 같은 체구, 이
    리 같은 허리, 표범 같은 머리, 원숭이 같은 완력이라고 묘사했다.
    [삼국지연의]제5회에는 관동군이 원소를 맹주로 받들어 동탁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원소는 손견을 선봉으로 삼아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사수관을 공격했고, 동탁은 화웅에게 
    5만의 병사를 주어 이에 대비하게 했다. 화웅은 공격해 온 포충을 죽인 후 손견의 선봉부대
    를 패주시킨 뒤 각 지방에서 온 구원병까지도 물리쳤다.
    각 지방의 제후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그때 관우는 유비의 부하로 일게 마궁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진해서 화웅을 죽이겠다고 
    나섰다. 신분이 낮은 관우는 원소 형제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조조만은 관우가 자
    진해 나선 것에 대해 뜨겁게 데운 술을 따라주며 격려했다.
    "술은 잠시 맡겨두겠습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관우는 이렇게 말하고 말에 올라 칼을 손에 들고 화웅을 향해 나아갔다. 잠시 후 북소리
    와 함성이 일어나며 천지가 갈라지고 산이 무너질 듯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제후들
    이 모두 무슨 일인가 놀라워 할 때, 이미 관우가 화웅의 목을 가지고 본직으로 돌아와 땅에 
    목을 내던졌다. 그때 술은 아직 따뜻했다.
    유비, 관우, 장비가 동탁의 토벌 싸움에 참가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관우가 화웅을 벤 
    사실은 없다. 화웅의 죽음의 대해 정사의 <손견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손견은 병사들을 맡아 사수관에서 화웅과 싸웠는데, 처음에는 패했지만 마지막에는 동탁
    의 군대를 대파하여 도독인 화웅을 죽이고 그 목을 옥문에 매달았다."
    관우는 당시 유비를 따라 공손찬의 밑에 있었으며, 손견의 부하가 아니었으므로 화웅을 
    죽인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화웅은 손견이나 손견의 부하
    에게 죽은 것이지 분명 관우의 공적은 아닌 것이다. 더구나 술이 식지 않은 동안에 해치웠
    다는 것은 소설가의 과장된 필법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11
    초선의 연환계는 호구이다.
    [삼국지연의] 제8회와 제9회에서는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한 후에 점점 천방지축으로 설치
    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왕윤은 동탁을 암살하려고 하지만 도무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평소 왕윤으로
    부터 딸처럼 귀여움을 받았던 기생 초선은 왕윤이 고심하는 모습을 보고 큰 일을 결행할 마
    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은혜를 갚으려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왕윤
    은 연환계를 짜게 된다.
    우선 여포를 연화에 초대해 초선으로 하여금 그를 유혹하게 하고, 여포가 미인계에 걸려
    들자 왕윤은 재빨리 초선을 여포에게 첩으로 바친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이번에는 동탁을 연회에 초대해 역시 초선에게 유혹하게 하고 동탁
    이 초선의 가무와 용모에 빠지자 재빨리 그녀를 동탁에게 바쳤다. 그 결과 동탁과 여포의 
    부자관계(여포는 동탁의 양자)가 이상해졌다.
    초선은 그 관계를 이용해 여포가 보면 아름답게 눈살을 찌푸리고 몰래 눈물을 흘림으로써 
    자신이 동탁에게 가게 된 것은 결코 본의가 아니라고 믿게 함과 동시에 추파를 보냈다.
    동탁은 마음 한편으로는 초선을 얻어 기분이 좋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포를 의심스러워
    했다.
    여포의 마음이 점점 달아올랐을 때 왕윤 등이 옆에서 여포를 부추겼다. 급기야 여포의 동
    탁에 대한 불만은 원한으로 바뀌게 되었고, 동탁을 죽이겠다고 맹세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왕윤은 사손서, 황완정 등과 모의해, 헌제가 황위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동탁
    에게 거짓으로 고함으로써 동탁이 조정에 들어가고 마침내 여포의 손에 죽게 된다.
    [삼국지연의]의 이 부분에 대한 묘사는 구상이 뛰어나고 문장도 통쾌해 독자로 하여금 쾌
    재를 부르게 한다.
    하지만 초선이 교묘히 연환계를 실행한 이야기는 이미 원대의 잡극 속에 있으며, [삼국지
    평화] 속에도 비교적 정돈된 형태로 그려져 있다. 또한 원대의 무명씨에 의해 만들어진 연
    환계라는 잡극의 이야기와 [삼국지평화]와는 아주 비슷하다.
    나관중은 이러한 선인의 창작을 기초로 초선과 연환계익 이야기를 개작해 두 편의 이야기
    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초선의 역할을 바꾸었다.
    초선은 과거에는 수동적으로 사건에 관계하는 조역이었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대의 에 
    밝고 절묘한 계략을 갖추었음은 물론, 적극적으로 사건에 관계하는 주역으로 바뀐다. 그뿐만 
    아니라 초선을 위험을 무릅쓰고 전력을 다해 동탁의 암살을 꾀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나관중이 묘사한 초선의 행위는 보통 여자의 수준을 넘어서 의협심이 넘치고 강렬하다. 
    또한 총명하고 기지가 넘치며 자기 희생을 아끼지 않는 여걸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럼 초선이 교묘히 연환계를 세워서 동탁을 암살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인가?
    우선 첫번째로 왕윤과 여포가 공모해 동탁을 살해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정사의[위서]<여포전>에는, 동탁의 기질이 과격하고 성질이 급해서 여포는 동탁에게 불만
    을 갖고 있었으며 원망하고 있었다 고한다. 또한, 그 후 왕윤 등이 동탁을 암살하려고 모의
    하는 것을 알고 내통을 약속한 것, 동탁의 죽음은 여포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등이 기
    록되어 있다.
    하지만 왕윤과 여포가 동탁을 암살하는 전체적인 과정에서 미인계인 '연환의 계략'을 정말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여포전>에는 '여포는 확실히 동탁의 시녀에게 손을 댔고, 발각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불
    안에 떨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시녀의 이름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그 시녀는 
    동탁의 시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포와 그녀가 밀통했다는 것을 동탁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
    다는 것을 보면, [삼국지연의]의 연환계는 전혀 근거가 없는 허구이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왕윤과 여포가 동탁을 암살한 사실과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밀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12
    차주는 유비가 죽였다
    [삼국지연의] 제21회에서 조조는 건안 4년(199)에 유비에게 명령해 원술을 서주에서 막고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조조는 곧 이를 후회하며 서주자사인 차주에게 편지를 보내 유비를 
    암살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차주는 진등과 모의해 유비가 성 밖으로 나가 영자의 백성을 둘
    러보고 오는 것을 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진등이 이것을 아버지인 진규에게 말하자 진규는 이를 유비에게 알려주었다. 이렇
    게 해서 유, 관, 장은 미리 음모를 알게 되는데, 성급한 장비는 화를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
    도 차주를 죽이러 가자고 한다.
    이때 관우가 장비를 말리며 말했다.
    "계략에는 계략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야음을 틈타 조조의 군이라고 속여 차주를 성 
    밖으로 불러내 죽이도록 하자."
    계략을 세운 관우와 장비의 군사는 장료의 군사들로 위장하고는 성 밖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라."
    그러나 차주는 문을 여는 것을 주저했다.
    이때 진등이 말했다.
    "괜찮소. 문을 여시오!"
    진등의 말에 차주는 말에 올라 병사 천여 명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적교를 빠져나오며 
    큰소리로 물었다.
    "장료 장군님, 어디 계십니까?"
    그 순간 불길이 오르며 관우가 한 손에 청룡언월도를 들고 말을 달려왔다. 관우가 차주를 
    공격하자 얼마 되지 않아 차주는 말머리를 돌려 도망쳤다. 서둘러 적교를 건너려 했던 차주
    는 성벽 위에서 진등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발사하는 것을 보고 성벽을 따
    라 도망쳤다.
    관우는 곧바로 도망가는 차주를 뒤쫓아가서 한칼에 말에서 떨어뜨리고, 그 목을 베어 돌
    아왔다.. 이렇게 해서 유비는 다시 한 번 서주를 손에 놓게 되었다.
    그렇다면 관우가 차주를 속여 성을 빼앗고 차주를 죽인 것은 사실일까?
    서주자사인 차주의 죽음에 대해 정사의 <무제기>와 <선주전>, <관우전>에는, "원술이 
    진류에서 패한 후, 조조는 유비에게 명해 서주에서 원술을 막아 싸우게 했다. 그러나 정욱, 
    곽가의 간언을 듣고 나서 조조는 유비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 그렇다고 해서 뒤따라잡을 수
    도 없었다.
    조조가 우려한 대로 유비는 동으로 진출해 재빨리 하비를 점령하고, 서주자사인 차주를 
    공격해 죽인 후, 관우에게 하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알 수 잇듯이 [삼국지연의]의 묘사방법은 정사와 크게 차이가 있다. 속
    여서 성을 빼앗고 차주는 죽인 것은 유비이지 관우가 아니었다. 그런데 원, 명 이래의 잡극, 
    문학작품, 연극 등에서는 예외없이 차주는 관우가 베어 죽인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나관중도 이 이야기를 창작할 때 선인들의 창작성과를 헤아려서, 앞뒤는 안 맞지만 차주
    를 벤 공적을 관우의 이름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렇게 한 목적은 관우의 이상적 상을 만들
    어내기 위함에 있었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13
    관우는 여섯 명의 장수를 벤 적이 없다
    관우는 유비가 원소의 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의 감, 비 두 부
    인을 지키면서 천리 길을 전전하며 유비가 있는 하북을 향했다. 그러나 황하를 건널 때 유
    비가 이미 원소의 곁을 떠나 여남의 유벽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많은 고생을 
    하면서 결국 고성에서 유비와 장비를 만나게 된다.
    이 동안에 관우 일행은 조조 군의 다섯 관문을 지나갔는데, 관우는 조조의 곁을 떠날 때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으므로 통행증이 없었다. 그 때문에[ 도중에서 종종 길이 저지되
    었다. 이 과정에서 관우는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여섯 명의 무장을 죽이는데, 이 다섯 관문
    의 여섯 장수들은 동령관의 공수, 낙양의 맹탄, 한복, 사수관의 변희, 영양의 왕기, 황하 나
    루터의 진기이다.
    이 이야기는 관우의 충의를 말하는 전형적 사례일 뿐만 아니라, 그의 업적 중에서도 중요
    한 구성요소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러한 사실이 있었을까?
    정사의 [촉서] <선주전>을 보면 당시 유비는 하북의 원소를 떠나서 여남에 가 있었다. 관
    우가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허창에서 곧장 황하를 건너면 되며 그 거리는 결코 멀지 
    않다.
    하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낙양을 향했다가 다시 돌아가 사수, 영양을 지나 황하의 나루
    터로 향한다. 삼각형 모양으로 크게 돌은 후 남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길을 택한 
    것일까. 과연 그럴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이는 나관중의 과장이 너무 심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에 대해 정사의 <관우전>, <유비전>을 보면, 관우가 도망쳐 유비에게 향할 때, 조조의 
    부하 장수 하나가 그를 쫓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조는 '그는 그 나름대로 자신의 주
    군을 위해 진력하고 있으므로 쫓아가서는 안된다"면서 말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관우는 조조의 묵인하에 떠났으며, 낙양과 영양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허창에서 
    여남으로 간 것이었다. 길이 실제의 상황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육장의 이름도 정사에는 
    보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다섯 개의 관문을 지나면서 여섯 명의 장수를 베었다는 것은 허
    구이다.
    나관중이 이처럼 관우가 유비 곁으로 돌아간 이야기를 과정하고 허구화한 것은 관우의 충
    의심, 무용, 고상한 성격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14
    유비, 관우, 장비는 고성에서 만난 적이 없다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은 서주전투에서 패해 동서로 흩어져 도망쳤다. 장비는 우선 망
    갈산으로 도망쳤다가 나중에 유비가 있는 곳을 찾아 고성으로 와서 현의 관리를 내쫓고 성
    을 점령한다.
    관우는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를 찾으러 여남을 향하는 도중에 장비가 고성을 빼앗아 병
    마와 군량미를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바로 사람을 보내 자신의 일을 알린
    다.
    그러나 장비는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하며 관우를 받아들
    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의리를 알지 못하는 놈'이라며 공격한다. 관우가 유비의 두 부인
    이 아무리 해명해도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조조의 부하 장수인 채양이 유벽을 공격하기 위해 여남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관우는 장비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성을 지나가는 채양을 베었다. 그때서야 장비는 겨우 관
    우를 믿었다.
    그 후 관우는 유비를 찾으러 여남으로 가지만 유비는 이미 원소의 곁으로 돌아간 후였다. 
    어쩔 수 없이 하북으로 되돌아가 유비를 데리고 함께 고성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유, 
    관. 장 세 형제는 고성에 모이게 되었고 헤어져 있던 기간의 일을 서로 이야기한다.
    그러면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은 정말로 고성에서 만났을까? 사서의 기록 기록과 대조
    해 보면, 고성에서 만났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첫째, 정사의 여러 곳을 찾아보아도 유비와 장비가 서로 떨어졌다거나, 장비가 고성을 빼
    앗았다는 기록은 없다.
    둘째, 관우가 채양을 베었다는 것은 정사의 <관우전>에는 보이지 않으며, 다만 <유비전>
    에 "조조가 채양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니 유비가 그를 죽였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채양은 유비에게 죽은 것이지 관우에게 죽은 것이 아니다. 게다가 죽은 시기 역시 
    관우가 유비 곁으로 돌아온 후이지 세 사람이 만나기 전은 아니다.
    셋째, 관우와 장비가 충돌했다는 이야기나, 유, 관, 장 세 사람이 고성에서 만나 연회를 베
    풀었다는 것은 모두 허구이다. 요컨데 유, 관, 장이 고성에서 회합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전
    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송대의 [삼국지평화]에 나오며 줄거리는 [삼국지연의]와 비슷하다. 나관
    중이 고성에서 유, 관, 장이 만났다는, 전혀 없었던 이야기를 [삼국지연의]에서 채택한 목적
    은 간단하다. 그것을 통해 유, 관, 방의 충성스러운 생애를 한층 파란만장한 것으로 만듦으
    로써 그들의 일생이 얼마나 곤경에 처했었던가를 사람들에게 알리려 했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15
    손권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손권(182-252)의 자는 중모인데, 오군의 부춘 사람으로 손견의 둘째 아들이고 손책의 동
    생이며 오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손책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15세에 오주의 중임을 맡아 
    강동 6군의 땅에 웅거했다.
    그는 인재를 불러모아 산월(오의 산지에 웅거하는 부족의 총칭)을 진압하며 서서히 힘을 
    키워 건안 13년(208)에 유비와 연합해 조조군을 적벽에서 대파했다. 뒤이어 형주를 공격해 
    관우를 사로잡고 유비를 이릉에서 패배시켰다. 그리고 황룡 원년(229)에 무창에서 제위에 올
    라 나라 이름을 오라 하고 건업(지금의 남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지연의] 제7회에서는 손견 일족을 소개하고 손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아주 간
    단하게 되어 있다. 사실[삼국지연의]에서 손권이 등장하는 장면은 약 50회에 이른다. 그러나 
    적벽대전의 전투와 유비와 손부인의 혼인 등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대개 그냥 덧붙인 정도
    에 불과하다.
    손권 세력의 내부에서는 시종 유비와 연합해 조조에게 대항할까, 아니면 조조에게 항복할
    까 하는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손권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을 더러운 짓으로 여겼고, 또 오의 땅에 제약이 가해지는 것
    을 싫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조의 군사력을 감안할 때 자신을 중과부적이라고 보았다. 
    화의와 전쟁 양면을 두고 항상 망설이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연의]를 읽는 사람은 손권에게 인재를 등용하는 부분에서 강한 인상을 받
    게 된다. 그는 인재를 손에 놓는 것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열쇠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
    었는데, 오나라를 세운 후 널리 인재를 받아들였으므로, 계략이 출중한 천하 명장이 속속 모
    여들었다. 인재가 풍부하다는 것이 강동의 자랑이었다고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연의]에도 손권의 인물상을 그릴 때 이 특징을 포착해, '그가 항상 선을 따르며, 의
    심하지 않았으며 결코 소홀히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손권의 등장은 손책의 죽음 이후부터로, 처음부터 사람을 보는 눈과 넓은 도량을 갖춘 군
    주로 나타난다. 이처럼 나관중이 그린 손권은 어질고 재능있는 사람을 발탁해 강동을 지킨
    다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손권이 인재등용에 뛰어났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삼국지연의] 제29회에서 손책은 죽기 직전 자신의 자리를 어린 아들 손소가 아니라 동생
    인 손권에게 물려주면서 말한다.
    강동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군과 아군의 대립 속에서 유리한 시기를 잡아 천하의 여러 영
    웅과 승부를 겨루는 일이라면 내가 너보다 낫다. 하지만 뛰어난 사람을 찾아내고 각자의 능
    력을 발휘시켜 강동을 지키는 일이라면 네가 적임이다. 아버지와 형의 창업의 고통을 잊지 
    말고 스스로 이를 잘 도모하라."
    사실 손권은 형의 부탁에 응해 제업을 완수한 것이었다.
    제갈량의 유비를 위해 천하의 대세를 분석한 융중대책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
    다.
    "손권은 3대에 걸쳐서 강동에 확고한 기반을 잡았습니다. 그 땅은 장강의 요새가 지켜주
    고 있고 민생은 안정되었으며, 유능한 막료가 보좌하고 있습니다."
    진수가 "세기를 초월하는 영걸"이라 평가한 조조도 손권의 큰 뜻과 인재를 등용하는 자세
    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아들을 낳는다면 바로 손중모와 같아라'며 그에게 감탄
    했다.
    정사의 작자 진수는 손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고 있다.
    "위나라에 대해 창피를 무릅쓰고 겸손해 할 줄 알며, 재능있는 사람을 임용하고 계략을 
    중히 여기는 등 월왕 구천과 닮은 비범함을 갖춘 인물이었다."
    진수 역시 재능에 맡기고 계략을 숭상하는 손권의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손권은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손견, 손책이 남긴 모사나 장수 그룹에는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택한 보다 젊은 모사나 장수에게 의지한다. 특히 그는 주유의 재능을 
    알아차리고, 평범하게만 보이는 노숙을 등용한다. 또한 여몽을 병사 중에서 발탁하고 육손을 
    총애했다.
    적벽의 전투, 이릉 전투의 빛나는 승리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삼국지연
    의]에서의 손권은 아버지나 형보다도 용감하고 생기가 넘친다.
    그런데 [삼국지연의]를 자세히 읽어보면, 손권의 영웅 자질과 재능이 나타나는 곳은 어디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유비와 연합해 조조에 대항하는 장면과 조조에 
    반대하는 장면에서만 손권은 영웅이 되는 것이다.
    또 [삼국지연의]는 말년의 손권에 대해 다루지 않았다. 그래서 후기의 인재기용 실패에 대
    한 얘기는 별로 없다. 그 때문에 독자는 손권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재를 등용하여 재능에 
    맡기는 총명한 군주였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럼 손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한 군주였던 것일까? 대답은 '아니오'이다.
    229년에 손권은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신하들을 신뢰하지 않고 점점 
    독단에 빠지게 되었다. 인재등용의 측면에서 이러한 변화는 오나라에서 손권의 지배력이 점
    차 쇠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수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의심 많은 성격이어서 가차없이 사람을 죽였는데, 그러한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심
    해졌다."
    그는 국경을 지키는 장수를 신뢰하지 않아서 그들의 처자를 인질로 잡아두었다. 그리고 
    반역하거나 도망가는 일이 있으며 즉시 인질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그뿐만 아니라 교사
    나 찰전과 같은 감시직을 설치하여 기회만 있으면 마구 잡아들였으며 죄없는 사람을 함정에 
    빠뜨려 죽였다.
    예를 들면, 당시의 중서전교인 여일은 성격이 모질고 법을 마음대로 적용하여 항상 사람
    을 함정에 빠뜨렸는데, 태자인 손등과 육손, 보즐 등이 종종 간언했지만 손권의 인사정책은 
    고쳐지지 않았다. 나중에 여일은 살해되었지만 대신들은 여전히 손권의 의심병을 두려워해 
    안심할 수 없었다.
    나중에 손권은 자신이 택한 유능한 장수인 육손마저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몇 번이나 
    육손의 책임을 추궁해 억울하게 죽게 한 것도 바로 의심병 때문이었다. 손권의 인사정책은 
    초기에는 매우 좋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이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16
    유비는 말을 타고 계곡을 넘은 사실이 없다
    원대의 [삼국지평화]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유비가 말을 달려 계곡을 뛰어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지평화]에서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 간옹에게 편지를 들려보내 
    성 하나를 빌리는데, 유표는 유비를 양양으로 초대해 장남인 유기와 차남인 유종을 같이 자
    리에 앉게 한다. 그 자리에서 유표는 형주의 패인(주를 맡은 장관의 옥패와 도장)을 유비에
    게 준다.
    그러나 유비는 유기에게 주어야 한다면 사양한다.
    유종은 이 때문에 유비를 원망하게 되고 과월과 체모로 하여금 인마를 매복시켜 유비를 
    죽이려 하는데, 이를 알아차린 유기가 유비에게 귀뜸해 도망치게 한다.
    유종은 가신인 왕손에게 명해 유비가 타고 있던 말인 적로를 훔치게 하지만 유비가 사정
    을 설명했기 때문에 왕손은 유비를 성 밖으로 내보낸다. 그렇게 도망치던 유비는 계곡에 이
    르러 잡힐 뻔하지만, 말을 뛰어오르게 해 건넘으로써 위험을 피한다.
    [삼국지연의] 제34회에서는 위의 이야기를 대대적으로 고쳐서 극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유비가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지했을 때였다. 채부인은 유비를 몹시 싫어해 유표의 측
    근인 괴월, 채모와 함께 유비를 제거할 계획을 짠다. 그리고 형주 각 군의 관리를 양양에 모
    은다는 구실로 그들을 유표 대신에 유비에게 응대시킨다. 그 틈을 보아 죽이려는 계획이었
    다.
    그날 유비가 양양으로 향하자 체모와 괴월은 밀의를 거듭해 양양의 동, 남, 북 세 성문을 
    막아놓았다. 다만, 서쪽 성문 밖은 계곡으로 막혀 있었으므로 병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주연이 시작되고 머지않아, 유비는 연회석의 모습이 이상하게 살기가 넘치는 것을 알아차
    렸다. 다구나 유표의 손님인 이적의 눈짓에 따라 급히 뒤뜰로 나가자 이적이 모든 사정을 
    유비에게 말했다.
    유비는 서둘러서 적로를 타고 서문을 향해 도망쳤고, 그 소식을 들은 채모는 병사를 이끌
    고 뒤를 쫓았다. 계곡까지 도망친 유비는 추격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말을 탄 채
    로 골짜기의 흐르는 냇물로 들어갔다. 그러나 몇 걸음도 가지 못해 말의 앞발이 꺾어졌다.
    "적로야! 적로야! 나를 방해할 작정이냐?"
    유비가 이렇게 외친 순간 적로는 물 속에서 벌떡 일어나 단숨에 삼 장(열 자의 길이) 너
    머 서쪽 절벽으로 뛰어올랐다. 추격자는 당연히 계곡을 넘지 못했고, 유비는 간신히 살아났
    다.
    정사의 <유비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유비가 싸움에 패해 유표의 곁에 몸을 의탁하자, 유표는 예를 갖추어 그를 받아들이고 
    군사도 증강해 주었다. 그러나 그 후로 형주의 뛰어난 인재가 계속해 유비의 휘하에 가담하
    는 것을 보고 유표는 유비에게 형주를 빼앗을 속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
    다. 그래서 그 야망을 막으려고 했다."
    즉, 유표와 유비 사이가 믿을 수 없게 된 것을 기록하고 있을 뿐, 유표가 양양의 모임을 
    만들어 유비를 죽이려 했다는 서술은 없다. 더구나 유비가 말을 뛰어오르게 해서 계곡을 뛰
    어넘었다는 기록은 없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유비전>에서 배송지가 인용하고 있는 [세어]에 기록되어 있다. [세어]에 나
    오는 이야기는 [삼국지연의]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만, 나관중이 이 이야기를 근거로 창작
    한 것은 분명하다.
    [삼국지연의]의 이야기에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진나라 때의 손성은 "모두 세속의 망설이
    지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유비와 유표의 대립을 작자가 합리적으로 그럴싸하게 꾸몄기 때문에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유적은 양양의 서남쪽 2리 밖에 위치한 구궁산(현재는 진무산)에 있다. 이곳의 산기슭 
    바위 위에는 후세 사람이 새긴 '마약단계처'라는 다섯 글자와 깊이 파인 말굽 흔적이 있는
    데, 바로 이곳이 적로가 몸을 날려 계곡을 건넌 곳이라 한다. 이 이에 적로교라는 다리도 있
    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17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한 시기가 다르다
    서서는 영천(현재의 하남성 우현) 사람으로 자는 원직이며, 초명은 서복이었다. 원래 제갈
    량과 친구 사이였고 나중에 유비에게 귀의했는데, [삼국지연의] 제36회부터 유비를 보좌하는 
    역으로 나온다.
    그는 조조의 부하장수인 여강, 여상, 조인을 격파하고 번성을 공격해 빼앗는다.
    조조는 서서의 뛰어남을 알고, 정욱의 계략을 이용해 서서의 모친을 허창으로 잡아와 그
    녀의 필적을 흉내낸 편지를 보내 서서로 하여금 모친을 구하려면 항복하라고 했다.
    효자였던 서서는 편지를 받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유비의 곁을 하직하는데, 유비는 송별연
    을 열어 그를 보내면서 못내 이별이 아쉬워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를 따라간다. 결국 서서
    가 간 후에 유비는 말을 멈추고 비 같은 눈물을 흘렸는데, 서서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까
    지도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서서는 가다가 문득 중요한 것을 생각해내고는 말머리를 돌려 돌아왔다. 그리고 유비에게 
    관중이나 악의보다 뛰어난 인물이라며 제갈량을 추천했다.
    "그 사람이야말로 천지를 헤아리는 재능을 가졌으므로 천하에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서둘러 들리시어 대면하십시오."
    또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유비는 사마휘가 말했던 '복룡과 봉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얻는다면 천하를 편
    안히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생각해 내고는 즉시 관우, 장비와 함께 제갈량에게 세상에 나올 
    것을 요청하러 간다.
    그 후에 서서는 허창에 가지만, 모친은 '거짓 편지에 눈이 멀어 전후 생각도 하지 않고 현
    명한 군주를 버렸다'며 꾸짖고는 자살해 버린다. 이 일로 인해 서서는 몸은 조조의 진영에 
    있으면서 마음은 유비에게 있어, 종신토록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하나의 계략도 바치지 않았
    다.
    이상이 수백 년 동안 세간에 널리 전해져 온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처럼 서서는 지극한 효심과 제갈량을 추천했다는 두 가지 점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200년에 조조는 관도에서 원소를 물리쳐 북방을 통일하고, 이어서 대군을 이끌고 남방에 
    있던 유비를 공격한다.
    유비는 조조의 군사력에 압도되어 유표에게 의지해 신야에 주둔한다. 서서가 유비에게 투
    신한 것이 바로 그때로 재능이 뛰어나 유비에게 중용되었다. 그리고 유비의 한실의 부흥과 
    패업 달성을 돕기 위해 207년 즈음에 유비에게 친한 친구인 와룡 제갈량을 추천한 것이다.
    이처럼 서서가 유비에게 제갈량을 추천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그러나 문제는 
    서서가 언제 제갈량을 추천했는가이다. 나관중이 말하듯이 유비와 서서가 이별했을 때일까?
    앞에 밝힌 대로 제갈량을 추천한 것은 207년 일이다. 당시 서서는 유비의 유능한 모사였
    다.
    그럼 서서는 언제 유비의 곁을 떠났을까?
    역사의 기록을 보면 208년이 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 해에 유표가 병사하자 조조는 군사
    를 이끌고 형주를 공격했고, 유표의 아들인 유종은 강대한 군사력 앞에 굴복해 조조에게 투
    항했다. 번성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는 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남방으로 철수했는데, 그때 서
    서와 제갈량은 군중에서 함께 유비를 보좌하고 있었다.
    조조의 대군은 장판까지 추격하며 유비 군을 완전히 깨뜨렸다. 그리고 조조는 서서의 모
    친을 인질로 잡고 서서에게 귀순하도록 협박했는데, 서서는 모친이 조조의 진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유비에게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세상에서 나온 것이 서서의 공로라고 했지만, 실은 많은 사
    람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나관중의 이야기는 이밖에도 자세한 줄거리
    에서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첫째, 정사의 [촉서] <제갈량>과 배송지의 주에서는, 서서의 모친이 조조에게 붙잡히자 
    서서는 바로 그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 조조가 거짓 편지를 쓴 사실은 없었다고 되어 있다.
    둘째, 서서는 조조에게 귀순한 이래로 조비의 황초 연간까지 계속 관직에 있었으며 우중
    량장과 어사중승을 역임했다. 평생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한 가지 계략도 진언하지 않았다면 
    과연 이러한 높은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나관중이 시기를 나중으로 돌리고 역사적 사실을 고친 이유는 서서와 제갈량의 재
    능의 고하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며, 또 한 조조를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었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18
    제갈량의 원래 성은 갈 씨였다
    제갈량의 성씨에 대해 정사는 아무런 의문점도 제기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제갈량전>
    에는, "제갈량의 자는 공명이고 낭야군 양도 사람으로 한의 사령교위 제갈풍의 후예이다."라
    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배송지는 정사에 주를 달면서 제갈량의 본래의 성은 '제갈'이 아니라 '갈'이라고 했
    다. 그 주에서는 응소의 {풍속통], 위요의 [오서]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갈량의 일족은 원래 갈 씨 성으로 진말에 진승과 오광의 봉기에 가담한 장군인 갈영의 
    자손이다. 갈영은 전공을 올렸지만 진승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한의 문제 때 그 공적을 인
    정해 자손을 제현후(제현은 낭야군에 속한다)에 봉했다.
    그 후 여러 대가 지나서 그들의 일족이 제현에서 양도로 옮겨갔는데, 양도에는 원래부터 
    갈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둘을 구별하기 위해 양도의 사람들은 그들을 제갈
    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후 언제부터인가 두 글자인 제갈이 통용되게 되었다.
    이 설에 대해서 중국 성씨의 뿌리를 고찰하는 입장에서 이의가 제기되었는데, '길'이라는 
    성은 상고시대 중원에 있었던 갈천 씨라는 부족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들은 평화를 즐기고 생업에 힘쓰며, 춤과 노래를 즐기는 부족이었다. 유명한 '갈천 씨의 
    가무'가 여기에서 생겨났다. 갈천 씨의 자손이 바로 갈 씨이다. 하 왕조에 이르러 백익의 자
    손이 제후가 되어 갈백(갈은 하남성 영릉현의 동북쪽)에 봉해졌다. 갈백의 자손도 갈 씨라 
    칭했다.
    제갈이라는 성씨는 백익의 후예인 갈백의 나라가 멸망한 후, 갈씨의 일족이 산동의 여러 
    성에 옮겨 산 것에서 비롯되었다.
    진말에 진승이 봉기했을 때 갈영은 여러 번 공적을 세웠는데, 중상모략을 당해 진승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그 후 한의 문제 때 갈영의 자손을 제현후에 봉한 이래고 그의 자손을 제
    갈 씨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갈이라는 성은 제현에서 양도로 옮긴 후에 그곳의 다른 갈씨와 구별하기 위해 
    고친 것이 아니라, 양도에 옮겨 살기 전부터 봉지와 관련해 고쳤다는 것이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19
    제갈량의 호 '와룡'은 방덕공이 지었다.
    사서에 의하면 제갈량은 숙부가 죽은 후에 남양군 등현의 융중에 숨어 살면서, 낮에는 밭
    일을 하고 밤에는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동료들 중에서도 그는 뛰어난 존재였으며, 뜻도 원
    대해 항상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견주었기 때문에 '와룡선생'이라는 칭호가 붙었다고 한
    다.
    그럼 제갈량을 왜 와룡이라 칭했는가? 와룡이라는 칭호는 자칭인가?, 타칭인가?
    [삼국지연의]에서는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하는 장면에서 그의 입을 빌어 설명하고 있는데, 
    서서는 제갈량이 살고 있는 곳에 와룡강이라는 언덕이 있어서 스스로 와룡선생이라고 칭했
    다고 말한다.
    그러나 와룡강이라는 지명은 후세 사람이 [삼국지연의]에 억지로 갖다붙였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당시 융중 일대에는 와룡강이라는 이름의 언덕은 존재하지 않았
    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제갈량을 와룡이라고 칭했는가?
    사서에 의하면,, 당시 융중에서 제갈량의 지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은 그의 두 
    스승, 곧 방덕공과 사마덕조였다. 그들은 오랜 기간의 접촉과 이해를 통해 '제갈량은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않을 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꿰고 있고 계략을 잘 짜는 열걸'이라고 간
    파했다. 그래서 방덕공은 제갈량에게 와룡이라는 아호를 내렸으며9동시에 방통을 봉추라 칭
    송했다), 사마덕조는 그를 세상 정세에 밝은 준걸이라고 칭송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와룡의 칭호는 타칭이며 제갈량의 재능과 덕에 대한 평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
    다.
    또한, 융중이 위치하는 양양 일대는 지방의 유력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유명한 대
    호족을 들자면 방, 황, 괴, 채, 마, 습 등의 세력이 있었다. 후한의 중, 후가 이후로 지방은 
    거의 호족세력에게 장악되어 있었으므로, 만일 그들의 지지와 인정이 없었다면 그 땅에 발
    판을 쌓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표가 형주 입성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방, 채 양 세력의 지지
    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었다.
    제갈량도 총명한 사람이었으므로, 외지인에 이러한 지지와 인정이 없다면 그의 정치적 이
    상을 실현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융중에 있을 때에 형주의 
    호족세력 중에서 영향력있는 인물, 특히 덕망있는 명사와 많은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들
    에게 가르침을 청함으로써 자신의 식견을 넓히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하라고 애
    썼다.
    양양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물산이 풍부했고 엘리트 문화인이 집중되어 있
    었다. 또한, 이 지방에는 많은 인재가 나온 것 이외에도 다른 곳에서 이주한 준걸이 많았다.
    제갈량도 그 중 하나로 적지 않은 사람들과 우정을 맺어 자신의 영향력을 넓혔다. 예를 
    들면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 조카인 방통, 의성의 마량, 마속 형제, 박릉의 최주평, 영주의 
    서서와 속도, 여남의 맹건 등 젊은 명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들과는 우정이 특히 돈독해 
    왕래가 잦았다.
    청년 시절의 제갈량은 비범한 뜻을 가져 스스로를 관중, 악의에 견주고 있었으므로 미친
    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제갈량을 잘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
    었다.
    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제갈량은 혼인이라는 루트를 활용했다. 그의 큰 누이는 괴기
    와 결혼했고, 둘째 누이는 방산민에게 시집을 갔다. 그 자신은 황승언의 못생긴 딸을 처로 
    선택했다. 황승언은 체모의 매부였기 때문에 체모는 제갈량에게 처의 외숙부가 된다. 그렇게 
    제갈량은 양양의 여섯 대호족 모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또 제갈량은 방덕공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방씨 가문의 방덕공은 양양의 호족 중에서도 우두머리격인 인물로 상당한 명망을 지닌 인
    물이었다. 교류 범위가 넓고 식견이 높아 유표는 몇 번이나 그를 맞이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거절당했다. 그의 신변에는 재주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모여들어 학문을 서로 교류하고 
    시국을 논했으며, 방덕공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 당시 그이 인물 품평은 사대부들 사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제갈량은 방덕공을 끊임없이 방문해 가르침을 청했다. 게다가 늘 겸허한 태도로 마루 밑
    에서 절을 했고 가르침을 받을 때에는 무릎을 꿇었다.
    방덕공도 항상 그에게 책을 빌려주며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 인연으로 인해 서서히 그는 
    제갈량의 성격, 재능, 포부를 깊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와룡이라 칭한 것이다.
    이 품평은 제갈량을 큰 호수에 엎드려 있는 용에 비유한 것으로, 시기가 오면 반드시 구
    름 위로 날아올라 그 비범한 본 모습을 발휘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처럼 와룡이라는 아호가 평가받아 널리 알려지자 제갈량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는데, 제
    갈량이 이같이 와룡이라는 아호를 얻은 것은 그가 이상을 위해서 분투한 결과물이며, 당시
    의 사회로부터 지지받고 인정받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20
    제갈량은 유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웠던 후한 맒에는 제위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이 무수히 많아 재능있
    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군주를 택해 섬겼다.
    그러나 당시 재능있는 인사 중에서도 발군으로 여겨지던 제갈량이, 왜 영웅의 기상을 가
    지고 크게 천하를 경략하던 조조나, 어질고 능력있는 사람을 등용하기로 소문난 손권과 손
    잡지 않고 기반도 정치력도 없는 유비를 택했을까?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제갈량에게 삼고의 예를 다한 후 천하의 대세에 대해 가르침
    을 청한다. 그리하여 '천하삼분지계'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고는 출사를 재촉한다.
    하지만 제갈량은 애초에 출사할 의사가 없었다.
    "저는 오랜 세월 밭일을 즐겨 세상일에 게을러졌습니다. 아무래도 명을 받들기 어렵겠습
    니다."
    유비는 실망의 빛을 나타내며 말한다.
    "선생께서 나오시지 않으면 고통받는 저 백성들을 어찌하란 말입니까?"
    유비는 이렇게 호소하며 눈물을 흘렸고, 제갈량은 유비의 뜻이 매우 진실됨을 알고는 견
    마지로를 다하겠다며 응한다. 제갈량은 집을 나서며 동생인 제갈균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삼고의 은혜에 감동하여 나아가지 않을 수 없구나."
    또 제갈량은 나중에 유선에게 바친 전출사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제께서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일부러 세 번이나 모옥을 방문하셔서 천하의 형세를 물으
    셨습니다. 저는 이에 감격하여 선제를 섬길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랬을까?
    [삼국지연의]와 전출사표에 나오는 '삼고의 은혜'설은 사실이라는 것이 대개의 견해이다.
    제갈량은 은거하면서 농사만을 지을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견주
    었으며,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천하삼분의 융중대책은 제갈량이 적극적이고 진
    취적인 야심가라는 것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그가 융중에 숨어 지냈던 것은 위업을 실현
    할 수 있는 사람의 출현과 자신이 나설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조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당시의 걸출한 정치가이자 군략가였다. 그러나 조조의 곁에는 
    이미 인재가 모여 있었다. 순욱, 곽가, 순유, 최염 등은 모두 문무의 계략을 갖춘 일류 인재
    들이었다. 만일 제갈량이 조조에게 투신한다면 그들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하고, 일거수일
    투족이 결정적인 힘을 갖는 카리스마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조조는 잔인한 성격으로 의심이 많음은 물론 늘 
    권모술수를 부렸다. 그리고 제갈량의 정치저기이상이 조조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에 조조와 
    행동을 같이하기는 어려웠다.
    손권도 걸출한 인물이었지만, 그에게는 천하통일의 웅대한 뜻이 결여되어 있었다. 부친과 
    형님이 쌓은 기반을 지키기에 급급해 강도의 한쪽 구석에 안주하고 있었다. 이것도 제갈량
    의 뜻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더구나 손권의 주변에는 노숙, 장소 등이 있었기 때문에 관중, 
    악의의 재능을 부릴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유비는 제갈량의 이상에 부합되는 사람이었다. 당시 유비는 몇 번이나 좌절을 반
    복해 자신의 몸 하나도 의지할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천하를 제패할 재능과 책략이 
    있었다. 또한, 천하의 영웅이라는 칭호도 얻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유비의 뜻은 위로는 국가에 보은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에 있었다. 
    그러므로 천하통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않는 한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런 점이 제갈량의 정치 목표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비는 재
    능있는 인물을 만나면 허리를 굽혀 맞이했으므로 인심을 얻고 있었다. 게다가 그이 신변에
    는 재능있는 신하가 부족해 제갈량이 그에게 투신하면 중용될 것이 확실했다.
    당시 형주의 선비 일부는 유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더불어 유비 자신도 제갈량을 매
    우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결국 출사한 것이다. 제갈량이 유비를 택한 이유는 심사숙고 끝에 
    이루어진 선택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처럼 유비의 삼고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는 단
    순한 동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21
    융중대책은 제갈량 혼자만의 지혜가 아니었다
    유비의 삼고초려가 있고, 나서, 제갈량은 천하의 대세를 분석하여 유명한 융중대책을 내세
    웠다. 당시 천하의 대세에 의거해 정치, 경제, 군사, 지리, 인사 각 측면을 구체적으로 분석
    해 반복과 비교를 거듭하면서 일련의 정합성이 있는 전략과 책략을 내세운 것이다.
    우선 단기목표로는 첫째가 형주의 유표를 쓰러뜨리는 것이었으나 유비는 그 일을 바로 실
    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유표가 죽고 적벽대전의 전투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형주의 일
    부가 유비의 손에 떨어졌다.
    둘째는 익주의 유방을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익주는 남서에 편재되어 있었지만, 이곳이야
    말로 유비가 뿌리를 내릴 장소이며, 기회를 보아 빼앗아야 한다고 제갈량은 보았다.
    셋째는 손권의 역량을 인정하고 그와 동맹하는 것으로, 손, 유 동맹은 쌍방이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장기목표라는 촉을 지내하는 것, 중원을 북벌하는 것, 한실을 부흥시키는 것 등이었
    다.
    종합적으로 보면 융중대책은 확실히 길을 열기 위한 진취적인 방법이었다. 당시의 시대상
    황에서는 예상과 다르게 벌어지는 일이 많고 정세도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융중대책이 
    예상만큼의 효과를 올리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상만큼의 효과는 아니라도 그 효과가 매우 현저했다는 것은 융중대책이 길이 전
    해질 가치가 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그래서 주자학으로 알려진 사상가 주희는 제자에게, 
    "역대에 몇 마디 말로써 천하는 도모할 계략을 정한 것으로는 우선 제갈량의 융중대책을 철
    거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제갈량이 유비를 향해 융중대책을 피력했다는 것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융
    중대책의 내용은 제갈량 혼자의 지혜인가?
    융중대책은 제갈량의 입에서 나온 것이므로 학자들은 그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도 없
    고 깊이 연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제갈량이 살고 있던 형주의 선비 그룹과 당시 사람들이 
    남긴 천하의 형세에 대한 논의와 구상 등을 분석해, 융중대책은 결코 제갈량 혼자의 지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한말 동탁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말발굽으로 중원을 유린하고 서로 다툰 결과 정
    치, 경제, 문화의 중심인 낙양과 장안은 온통 폐허로 변했다.
    한편 행주는 기본적으로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중언 사람들은 전란을 피해 
    속속 형주로 몰렸는데, "선비의 고장 형주로 피난한 사람은 무도 천하의 준걸이었다."라고 
    역사서는 전하고 있다. 물론 형주 자체도 인재 배출의 땅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방덕공, 
    사마덕조, 황승언, 서서, 방통, 제갈량 등 쟁쟁한 인물들이 형주에 운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유표와 함께 대업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관직에 오르라는 요청을 
    계속 거부했다.
    그렇다고 마냥 세간으로부터 초연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때를 기다렸다가 봉황의 나래를 
    펴기 위해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으며, 명군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대문에 그들은 자주 회합
    을 가지며 고전이나 역사서를 연구하여 천하의 대세를 논하고, 당시 군벌 지배의 암흑시기
    를 공박했다.
    이렇게 해서 형주, 양양 일대에서 명사와 청년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그룹이 형성
    되어 중소 지주층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제갈량은 그런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는 석광원, 서서, 맹공위 등과 함께 방덕공, 사마덕조 
    등의 명사와 친하게 지내며 가르침을 받았다. 게다가 황승언의 사위이기도 했다.
    제갈량은 그들과 끊임없이 왕래하며 토론을 주고받음은 물론, 학문을 닦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는 스승이나 친구를 통해 적지 않은 정치적 소양을 길렀고, 그들에게 깊
    은 영향을 받았다.
    제갈량은 학식이 비범하고 지혜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사회적 명성을 얻었으며, 형주, 양양 
    선비 그룹의 관심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유비가 형주에서 제왕의 혈통과 천하의 영
    웅이라는 신분을 바탕으로 현명한 사람을 찾고 있을 때, 유비에게 호감을 가진 형주, 양양의 
    선비 그룹은 그 지방에서 가장 뛰어난 와룡 제갈량과, 봉추 방통을 추천한 것이다.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서 융중대책을 강구했고, 방통은 방통대로 '지금 천하는 동으로는 오
    이 손씨, 북으로는 조씨가 있으므로 익주를 손에 넣어야 비로소 셋이서 대립하는 형세를 만
    들 수 있다고'고 진언했다.
    이같은 방통의 견해가 그만의 생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제갈량의 융중대책도 제갈량 
    혼자만의 것은 아니며, 그것은 형주, 양양의 선비 그룹에 의한 집단적 지혜의 결정체였다.
    더욱이 후한말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란은 사람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제갈량 외
    의 다른 식견있는 선비들도 모두 각자의 경험과 그 시야가 미치는 만큼 시국의 동향을 관찰
    하고 장래의 움직임을 헤아려 자신이 갈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에서는 노숙이 제갈량의 융중대책 이전에 손권을 향해 '한실의 부흥은 불가능하다는 
    것', '조조를 제거하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강동에 자리를 잡고 천하를 도모할 기
    회를 엿보는 것' 등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유표를 정벌하고 장강 전역을 지배하에 두고, 
    제위에 올라 천하를 도모해야 한다고 진언하고 있다.
    정사와 배송지의 주에 의하면, 후한말 오의 감령, 주유, 형주의 방통, 익주 유장의 재능있
    는 신하 법정 등은 모두 '천하삼분'이라든가, '그 하나의 다리를 공격한다'라든가 하는 논의
    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구상이 비슷한 것은 제갈량의 융중대책이 당시의 정치적, 군사적 투쟁의 산물이며, 
    한 사람의 천재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방통과 제갈량은 모두 형주, 양양의 선비 그룹에 속하는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노숙은 오
    나라 사람이지만 형주, 양양의 선비들과 밀접한 유대가 있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
    다. 게다가 융중 대책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방통, 노숙의 견해가 제갈량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제갈량의 융중대책을 그 혼자만의 지혜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유
    비를 위해 천하삼분지계를 구상해 망설임을 없애 준 공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제갈량이 나
    온 다음에야 비로소 당시의 정세를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으므로, 천하는 반드시 삼분
    된다고 예측한 그의 판단을 평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22
    박망파 싸움은 유비의 계획이었다
    [삼국지연의]의 제39회는 박망파에서 벌인 화공 이야기이다.
    제갈량을 삼고의 예로 맞이한 후에 유비는 제갈량을 스승으로 섬겨 예를 다했는데, 유비
    의 제갈량에 대한 환대는 관우와 장비가 불만을 품을 정도였다.
    이때 조조는 하후돈에게 병사 10만을 주어 신야를 공격하게 했는데, 유비는 제갈량에게 
    이에 대적하도록 지휘를 맡긴다.
    제갈량은 조운을 선봉으로 삼아 적을 유인하게 하고, 관평과 유봉에게 병사 5밸 명을 주
    어 박망파에에 숨기고 화공을 펼치도록 했다. 관우, 장비에게는 각각 병사 천 명을 주어 박
    망파의 좌우 여산과 안림에게 숨게 하고, 불길이 오르면 일제히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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