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옵션 |
|
프로펠러처럼 빙빙 도는 전등 깃과 꿈의 잔영이 잠에서 깬 나를 반겨주었다. 흰 염료를 온몸에 바른 구릿빛 피부의 원주민들이 나를 붙잡고 헬기로 공수해온 소금을 부대째로 먹이는 꿈이었다. 침을 꼴깍 삼켰다. 바싹 마른 목은 미약한 동작에도 아파한다.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1:07(일).
이 정도 시간이라면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자도 될 것이다. 물을 안 마시고 자니 그런 꿈을 다 꾸는구나 하며 꿈을 되새겨보았다. 물을 마시고 거실을 보니 여느 때처럼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아무래도 아버지나 여동생이 보다가 끄지도 않고 그냥 들어가 자는 모양이었다.
버튼에 얹혀진 손가락이 버튼을 누르다 말고 멈췄다. 화면에선 쇼 호스트가 열심히 제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누가 홈쇼핑 채널을 틀어놓은 거지?'
우리 집에선 홈쇼핑 방송을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볼만한 사람은 어머니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어머니는 홈쇼핑 애청자였다. 그리고 우수 고객이었다. 어머니 말로는 그것은 드라마가 하지 않을 때 볼만한 유일한 것인 데다, 쇼 호스트의 말이 의사들이 잔뜩 나오는 건강 프로그램만큼이나 신뢰가 가서, 보고 있다 보면 어느새 주문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는 것마다 어딘가 결함이 있거나 전에 쓰던 물건보다 허술했다. 보다 못한 아버지와 다투고 난 이후 어머니는 홈쇼핑을 다시는 보지 않으셨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진한 녹색 액체가 담긴 주먹만 한 페트병을 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지금 소개해드릴 상품은 군인분들과 직장인분들, 그리고 우리 수험생분들에게 강력히 추천하는 상품인데요. 바로 마시면 절대 갈증이 생기지 않는 물입니다. 그것도 잠깐이 아니라 평생 갑니다. 이런 기능을 하는 제품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국내 최초. 아니, 세계 최초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아, 그리고 지금 상품 이름을 정해주시는 고객님께는 이 제품 삼십 개. 무려 삼십 개를 무료로 드립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맑은 전자음이 들렸다.
"아, 지금 고객님께서 이 제품 이름을 '평생단물'이라고 정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리고요. 감사하다는 뜻에서, 저희가 열 개. 무려 열 개를 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평생 단물 사십 개. 지금 배송해드렸으니까 확인해주시고요."
그리고 남자는 '평생단물'이라는 글씨가 조잡하게 인쇄된 라벨을 받아 병에 붙였다.
이 방송은 다른 홈쇼핑과는 달랐다. 제품이야 그렇다 치지만, 어디에도 회사 이름과 로고가 나와 있지 않았다. 심지어 주문을 위한 연락처도 없었다.
"이걸 마시면 정말 놀라운 것이 바로 소변 볼 필요도 없다는 점입니다. 물을 안 마셔도 되고, 소변을 보지 않아도 됩니다. 이건 정말 모든 사람이 한 번쯤은 꿈꿔본, 그런 상품 아니겠습니까? 정수기나 화장실을 찾아가는 시간이 아예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그 여유 시간으로 할 수 있는 것 많습니다. 다른 고객님의 사례를 보면, 하루에 무려 두 시간을 아끼셨습니다. 두 시간이요."
자세히 보니 남자 뒤에서 건강해 보이는 남녀가 런닝머신 위에서 계속 달리고 있었다. 입은 옷도 물기 하나 없이 깨끗한 게 꼭 방금 올라탄 것 같았다.
"혹시 주문하실 마음 드셨습니까? 아, 그러시면 지금 주문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이것도 업계 최초! 국내 최초! 세계 최초! 그리고 전 방송 통틀어서 유일한 주문 시스템인데요. 지금 계시는 자리에서 '살게요!', '사겠습니다!', 하시면 저희가 바로 배송해드립니다. 전화도 앱도 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말만 하시면 됩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보내드립니다."
그제야 나는 이 홈쇼핑의 정체를 알았다. 몇 달 전부터 학교에서 돌던 소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깊은 밤에 혼자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갑자기 채널이 바뀌고 특이한 것만 파는 홈쇼핑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방송에서 파는 것 중에서 평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며, 효과가 무척 뛰어나다고 한다. 하지만 부작용도 효과만큼이나 심하며, 차라리 주문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한다. 내가 제일 인상 깊게 들었던 것은 주문 방식인데, 그 방송에서 나오는 것을 주문하는 것은 말로 사겠다고 말하기만 하면 바로 택배가 온다는 것이었다. 돈은 즉시 내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돈을 내게 될 때를 스스로 알게 되며, 그때 돈을 내면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때 돈을 내지 않겠다고 하면 자신이 갖고 있던 무언가를 잃게 된다고 한다.
"어떠십니까, 고객님? 주문하시겠습니까?"
갑자기 표정이 굳은 남자가 얼굴을 화면에 바짝 들이대곤 묻는 바람에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얼굴은 점점 가까워지다 어느새 화면엔 그의 눈만이 가득 차 깜빡거리고 있다. 텔레비전에 달린 카메라는 없었는데, 어째서일까. 그는 정말 나와 대화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만 말하고야 말았다.
"주, 주문할게요."
남자는 화면에서 물러나며 활짝 웃었다.
"알겠습니다, 고객님. 주문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금 여섯 개 배송해드렸으니까, 확인해 보시고요. 계속해서, 이 평생단물은......."
그리고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품을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정말 주문해버린 것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이라고 되뇌는 사이, 초인종이 울렸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인해볼 필요는 있었다.
문을 열었을 땐 아무도 없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골판지 상자 외에는. 몇 번 더 살펴보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상자를 갖고 거실로 돌아갔다.
텔레비전은 스포츠 채널에 맞춰져 있었다. 매끈한 몸매가 멋진 선수가 골프채를 시원하게 휘두른다.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내 방에서 소포를 열었다. 화면에서 본 것 그대로, '평생단물'이라고 적힌 녹색 액체가 담긴 페트병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구강청결제 같았다. 나는 오래간만에 깊게 고민했다. 분명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굳이 나를 두고 이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아냐, 아냐. 공원에 약을 탄 음료수를 두는 것도 있었잖아. 아니, 그렇다면 아예 이런 걸 공원에 두지, 굳이 내게 그런 방송을 보여주면서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야. 진짜배기 미친놈이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아. 아니, 그러면 방송은 어떻게 한 거지? 소포를 현관문 앞에 둔 건 또 어떻게 한 거고?
한숨.
만약 이것이 누군가 치밀하게 준비한 장난이라면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 십칠 년 인생 통틀어 이만큼 고민한 순간은 없었으니까.
몇 번 더 고민했지만, 역시 이런 건 부딪혀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다. 나는 만약을 위해 부모님의 방을 향해 절을 올리고, 한 병 집어 뚜껑을 따 바로 마셨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레모네이드 맛이었다. 그런데 방송에서 말한 것과는 달리 요의가 약간 있었다. 역시 소문은 소문이었나 보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까 그 방송과 이 음료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의문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나는 그런 의문을 안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 친구들에게도 줄 생각을 하면서. 뭔진 모르지만 맛있는 음료수임에는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꿈도 꾸지 않고 잘 잤다.
다음 날. 학교에 온 나는 '평생단물'을 책상에 모두 꺼내놓고 제일 친한 친구에게 먼저 줬다.
"이게 뭐야? 평생단물? 북한에서 산 거야?"
"너도 그 소문 알지? 왜, 밤에 티비 보다 보면 홈쇼핑 채널 나온다는 거."
전날 밤일을 설명해주자 친구는 내가 말리기도 전에 한 병을 다 비웠다.
"이야, 이거 맛있네! 다른 데서도 팔았으면 좋겠다! 이런 음료수는 처음이야!"
"이거 부작용도 있을 텐데, 그냥 마셔버리면 어떻게 해!"
"넌 생각하고 마셨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정말 목 안 말라? 그거만 확인하면 되잖아."
듣고 보니 나는 아침부터 목이 마르지 않았다. 아침에 화장실을 가긴 했지만, 정말 물은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별거 아닐 거야. 걱정하지 마."
그렇지만 나는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어느새 내 주변에 같은 반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평생단물'을 책상에 전부 꺼내둔 것이 화근이었다. 서로 자기도 마셔보고 싶다며 아우성이었다.
"이제 어쩌지?"
친구는 '왜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라는 표정이었다.
"그냥 버리자."
"버릴 거면 내가 마실게!"
친구 만기가 네 병을 다 갖고 달려 교실을 나갔다.
"야! 얌마! 그거 부작용! 부작용!"
나는 쫓아갈 생각도 못 하고 손만 뻗었다.
"어차피 금방 돌아오잖아. 그건 그렇고, 부작용이 뭔지 좀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물 한 번도 안 마셨다고 했지? 지금 마셔보는 건 어때?"
우리는 바로 식수대로 갔다.
"나부터 마실게."
쪼르르 나오는 물을 받아마시던 친구는....... 잘만 마셨다. 마시다 멈추지 않았으면 학교의 물을 전부 마셨을 것이다.
"뭐야, 괜찮은 것 같은데? 웁."
친구는 곧바로 물을 토해냈다. 연방 기침을 해댄 친구는 기침이 멈추자마자 다시 물을 마셨다. 이번에도 마시고 난 직후 바로 물을 토했다. 나도 따라 마셨지만, 결과는 같았다.
"우리..., 설마 물을 못 마시게 된 거야?"
"그, 그런 것 같은데?"
우리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을 깬 건 친구였다. 친구는 굳은 표정을 풀고 웃었다.
"그럼 물을 안 마시면 되는 거 아냐. 부작용이 이것뿐이라 정말 다행이야."
그래도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불안한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내 입은 생각을 거르지 않고 마구 말하고 있었다.
"만약 모든 수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라면 어쩌지? 죽이나 국물을 마셔도 토하게 된다면? 밥알이나 반찬에 있는 수분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라면?"
내게 온 이상한 상황은 상상의 나침반을 항상 죽음 쪽으로만 돌리게 하였다. 친구도 마찬가지로 내가 불길한 말을 할 때마다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친구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두드렸다. 이것은 친구가 깊게 생각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러다 얼굴을 활짝 피우고 내게 물었다.
"맞아, 아침은 먹었냐?"
"아니."
다시 생각. 곰곰이 생각하던 친구는 나름의 방법을 떠올렸다.
"그럼 이것저것 먹어보고 괜찮은 거 찾아보자. 분명 괜찮은 게 있을 거야."
그리고 교복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육포였다.
"이건 그래도 좀 마른 편이니까 괜찮겠지?"
이 녀석. 평소에 급식을 무척 맛없게 먹는 이유가 뭔가 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었군.
우리는 육포 한 봉지-말이 한 봉지지, 손가락만 한 것으로 여덟 조각뿐이었다.-를 전부 먹었다. 다행히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시간이 지나도 구토는커녕 침도 안 뱉었다. 친구가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앞으로 육포만 먹으면 되겠네. 신난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모르는 거야." 내가 말했다. "겨우 그 정도 양으로는 판단할 수가 없어. 그리고 물만 토하는 건지, 다른 것까지 토하는 건지 알지 못하잖아."
친구는 복잡한 건 생각하기 싫다는 듯, 육포 포장지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말했다.
"무슨 소리! 설령 더 먹어서 뱉게 된다고 해도, 그 정도 양이면 충분한 거야. 우린 살아남은 거라고."
친구가 큰 목소리로 '난 살았다!'라고 외치자 '좀 닥쳐!'라는 메아리가 돌아왔다.
그래. 어쩌면 친구 말대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다른 부작용이 더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주머니에서 치즈 소시지를 꺼내 물었다.
"네 말대로 다른 것도 시험해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점심에 편의점 가자. 급식실에서 토하면 좀 그렇잖아?"
친구가 내민 소시지를 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교실 뒷문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런데 수업은 시작하지도 않았고, 선생님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내 뒷자리에 앉은 만기에게 물었다.
"아까 가져간 거 어디 있어? 다 마셨어?"
만기는 사과했다.
"아니. 사실 그거, 태석이랑 정호가 다 마셨어. 미안하다. 나중에 사줄게."
태석이랑 정호는 소위 말하는 일진이었다. 나는 손으로 내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거 그냥 음료수라서 그런 게 아닌데....... 큰일 났다."
"뭔데? 왜 그래?"
"설명해줄 테니까 점심에 나와라."
"그냥 지금 말해주면 되잖아."
그때,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복도에서 달려가는 선생님이 보였다. 온 반이 웅성거렸다. 아이들은 그 장면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앞다퉈 창밖을 보고, 문을 열고 복도에 고개를 내밀었다.
"저것 봐! 태석이랑 정호가 실려 가고 있어."
"정말이네."
내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도 그 아이들을 보려고 고개를 내밀었다. 구급대원들은 무척이나 신속해 이미 계단에 다다라 있었고, 곧 사라졌다.
"다들 앉아. 마음은 알겠지만 앉아라."
어느새 선생님이 들어왔다. 교실은 어느 정도 조용해졌지만, 간간이 나오는 잡담의 주제는 아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비극일 것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보았다. 그 아이들 입에서 계속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주변 아이들의 잡담을 들어보니 다들 복도에 길게 늘어선 물줄기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그 정체나 원인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만기에게 물었다.
"혹시 걔들이 그거 마시는 거 봤냐?"
"두 개씩 마시더라. 정말 미안하다. 꼭 갚을게."
"알았어."
만기의 사과를 대충 받아줬다.
"근데 그거 대체 뭔데 그래? 혹시 농약이야?"
"그런 거 아냐."
나는 만기의 의심이나마 피하고 싶은 마음에 황급히 얼버무렸다.
"그냥 좀 구하기 힘든 음료수라서 그래."
만기는 물러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무언가 불안했다. 그때 좋은 소문이 떠올랐다.
"맞아, 재들 요즘에 마약을 구해 피운다던데, 혹시 학교에서 피운 건 아니겠지?"
"아, 정말."
만기는 씨익 웃었다.
"걔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수업하기 직전이었기에, 우리는 책을 펴고 자세를 고쳐잡았다. 나는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생각에 잠겼다.
태석이랑 정호 입에서 물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역시 두 개를 다 마셔버려서 그런 것인가?
나는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것처럼 고개를 재빠르게 저었다. 아니다. 그건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미 끝난 것이다. 그건 이미 끝난 일이다. 지금 내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이것을 마시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척 잠깐이었지만, 나는 아사의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사람이 평소에 먹던 것을 삼키자마자 뱉게 된다는 것은 갈증을 겪지 않는 축복이 있어도 저주임에 분명한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이 되었을 때, 나는 바로 친구와 운동장으로 갔다.
"일단 다 토해보는 거야. 그러면 그 음료수도 아예 바깥으로 나오지 않을까?"
"그래. 그런데 어떻게?"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내 배를 후려갈겼다. 그걸 본 친구도 자신의 배를 계속 때렸다. 그러나 십 분 넘게 해봐도 아프기만 할 뿐, 침 말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토해서 빼낼 수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빼내는 거야."
"어떻게?"
친구는 달렸다.
"땀으로 빼보는 거야!"
나와 친구는 삼십 분 정도 달렸다. 친구가 숨을 몰아쉬었다.
"어때? 좀 나온 것 같아?"
"아니."
신기하게도 우리의 옷은 하나도 젖지 않았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것이다.
"빌어먹을. 대체 뭐지?"
"그러게."
그러고 보니 배가 고팠다. 그런 일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욱 배고프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학교를 나가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를 나가니 웬 중년 남자가 내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학생. 삼만 원만 줘요."
"뭐야, 그냥 가자. 우리 급하잖아."
하지만 나는 친구가 말하기도 전에 지갑을 열고 돈을 꺼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물건값을 내야 할 때가 지금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돈을 받은 남자는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친구는 나를 질책했다.
"돈을 대체 왜 준 거야? 안 그래도 됐잖아."
나는 홈쇼핑 소문을 다시 설명해주었다. 그제야 친구는 돈 아주 잘 줬다며 칭찬했다.
우리는 편의점에 가서 이것저것 사 탁자에 늘어놓고 하나씩 먹어보았다. 국물은 떡볶이 국물도 먹을 수 없었고, 죽도 먹을 수 없었다. 우리가 먹을 수 있었던 것은 국물에서 건진 면과 밥. 그리고 고기와 빵이었다.
"이 정도면 죽진 않겠다."
친구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도 그런 친구를 봐서일까. 마음이 놓였다.
"이제 다른 부작용이 뭔지 찾아보자."
"글쎄, 있긴 있을까."
젓가락을 입에 물고 있던 친구는 그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냥 이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떡볶이 국물을 못 먹는 건 정말 아쉽지만, 평생 물을 안 마셔도 된다니. 능력이라기엔 뭣하지만, 그래도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는 거잖아. 나는 만족해."
하긴 그건 그랬다. 어쨌건 우리는 무언가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되었다. 그 능력 자체만 놓고 본다면 독이 되지 않을 것은 분명한 것이었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평소의 생활로 돌아갔다. 만약 다른 이들이 우리가 남들과는 무척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그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저녁 노을은 정말 아름다웠다.
텔레비전에선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물건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상품은 바로 '리얼 인생게임'인데요. 이건 재미도 재미지만, 시청자분들께서 주목하셔야 할 것은 바로 이것."
남자는 옆에 놓인 항아리를 들었다.
"예언 자판기인데요. 이건 게임을 하지 않을 때도 무척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항아리를 탁자에 놓고 지폐를 꺼내 안에 넣었다. 그러자 항아리 안에서 바람이 부는 듯하더니, 길고 흰 종이를 뱉어내었다. 남자가 종이를 잘 보이도록 들었다. 종이엔 예쁜 붓글씨로 '갈 것도 올 것도 없다.'라고 적혀있었다.
"이름 그대로 예언 기능인데요. 아, 아쉽게도 오늘은 구매하실 고객님을 만나지 못할 것 같네요. 정말 아쉽네요."
남자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저는 계속 있으니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사주시길 바랍니다."
======================================================
소재를 떠올렸을 땐 나름 기묘하면서도 무서웠는데, 막상 써보니 그렇지도 않네요. :-<
장편으로 쓰려고 했는데, 소재가 그만큼 있질 않아서 단편으로 썼습니다.
만약 반응이 좋다면 다음 편도 쓸게요. :-)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