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금요일, 인사동에 다녀왔다. 슥 둘러보고 광화문에 들러 책 한 권을 고르고 느긋하게 학교를 갔다. 피 같은 금요일에 전공과목 하나 든 게 오후수업이라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지만, 내 나름으로 이렇게 즐길 거리를 찾아 움직이며 보내고 있다.
그런데 너는 그게 아니꼬웠나 보다.
나는 기본적으로 SNS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페이스북도 계정이 없고(구글 계정으로 연동이 된다 하던데 모르겠다) 미투데이는 이름만 들어봤으며,트위터는 아래에서 위로 읽어야하는지 위에서 아래로 읽어야하는지 조금 헷갈리는 정도다. 너는 이런 나를 잘 알고 있다. 원시인이라고, 깔깔 웃던 네 얼굴이 선하다.
딱딱하기로 소문이 난 모 교수님이 페이스북을 하신단 소문은 학기 초부터 들어왔지만 오늘에야 그 사실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왜 하필 오늘이었는가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하지도 않는 페이스북 공연히 좀 둘러본다고 네 이름을 클릭한 것도, 왜 꼭 오늘이었는지 모르겠다.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었으면, 아니 모레였으면 넘쳐나는 게시글로 곧 그 글이 파묻혀버렸을 텐데.
너는 배부른 내 팔자가 부럽다고 했다. 누구는 아침부터 인사동 갤러리 도는데 본인은 알바에 치여 산다고. 글 끝에 장난스레 붙은 ㅠㅠ라는 모음 두 개. 아래엔 세상에 그렇게 여유넘치는 대학생이 있냐는 감탄의 댓글들. 이유랄 것도 없는 우연으로 나는 네 글을 봤고 사실 크게 기분 나쁠 것 없는 일인데 나는 왜 이렇게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이 마시고 싶었나.
나는 현재 이렇다할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매달 용돈을 받아 쓰는 건 아니고 틈틈이 모아둔 푼돈과 가끔 뛰는 단기 알바로 어지간한 필요는 충당한다. 덕분에 술도 안 마시고 점심은 늘 도시락 신세지만 그건 그것대로 건강에도 좋고 돈도 아끼니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술을 즐기지도 않는다. 환상의 조합이라는 치맥도 먹어본 경험 없는 대학생이 바로 나라고 한다면 너는 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랄까.
잘 안다. 네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괴짜 취급한다는 것. 요즘 세상에 소개팅 미팅 한 번 안 나가고 매일 같이 청바지에 운동화만 입고 다니는 여대생, 확실히 드물긴 할 것이다. 괴이쩍게 여기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작년 가을 교지에 내 글이 실렸다. 우연히 투고를 했는데 얻어 걸렸다. 너는 내게 물었다. 그래, 얼마 받았어? 적은 금액이었다. 나는 어물거리며 웃었다. 그 뒤로 글쓰기 수업 시간이면 너는 늘 나에게....
공모전에 한 번 나가지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교수님이 내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셨다. 지나가는 말인걸 잘 알아 어색하게 고개만 꾸벅이고 말았다. 그때 네 표정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나를 보는 네 시선이 달라졌을 때에 나는....
이 사회에서 남과 다르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남과 다르려면 항상 뛰어나야 한다. 무언가 잘하는 구석이 있고서야 비로소 따끔한 눈길이 조금쯤 수그러든다.
이해는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너보다 잘난 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또 네가 나보다 못났다고도 생각해본 일이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그냥 다르구나 했다.
너는 언제쯤 내게 세우는 가시를 거둘까. 네 앞에서 나는 늘 미운오리 새끼가 된다. 반드시 이 추레한 겉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아름다운 백조로 화해야만 할 어떤 의무 같은 것을 느낀다.
피에타를 보고 왔다 하니 너는 역시, 라고 했다. 내가 B를 받았다고 하면 네가?라고 한다. 생판 남인 내게 환상이든 기대든 무언가를 가져주는 것은 고맙다. 그러나 다른 동기가 그 영화를 보고 왔으면 그런 반응은 아니었을 거다. 너와 항상 신촌 맛집 탐방을 다니는 그 아이가 B를 받았다면 낄낄거리고 웃었을 것이다.
나를 잘나신 년으로 만드는 것은 너다. 네 비꼬는 태도, 내색하려 하지 않지만 드러나는 표정. 내게 인사하려던 네 친구를 막던 그 손길. 어쩌면 그렇게 선명할 수가 있을까.
나는 그런 네 앞에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다. 네 머릿속의 내 모습에 맞추어, 재수없고 거만하고 도도한 나를 연기해주어야 할까. 그래야 네 속이 좀 풀려 화장실에서 나를 주제로 욕을 해대는 말을 그만둘까.
잘난 년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냥 나다. 명품 하나 없고 높은 굽은 신을 줄도 모르는 게 뭐 어떻단 말인가. 내 부모님은 내게 입학선물로 헬스장 삼 개월 이용권을 끊어주셨다. 그렇다고 내가 루이비통 핸드백을 사주신 네 부모님을 수준낮다 욕하고 무시한 적이 있던가.
나를 네 위에 놓는 것은 너다. 내가 너를 거만하게 깔아보고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네 오해이며 착각이다. 나는 그런 인간이지도,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가끔 나는 그런 네 기대에 맞춰 행동해버리고 싶어진다.
샤갈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고 웃는 너를 비웃어버리고 C를 받았다며 짜증을 내는 네 앞에 A+가 쓰여진 내 성적표를 보란듯이 흔들어버리고 싶다. 차라리 대단하신 인물인양 행세하고 네 그 이유없는 비난에 이유를 만들어 선물하고 싶어진다.
내가 그런 년이 되지 않도록 네가 날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날 그렇게 너나 네가 어울려다니는 친구들과 유리시켜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벽을 치고 전혀 이해 못할 다른 차원의 생명체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실 나는 그냥 너와 똑같은, 스물 한 살 여대생일 뿐이다.
샤갈을 모르면 뭐 어떻단 말이냐. 그 사람이 그린 그림, 태어난 나라 쯤 모르면 뭐 어디 탈이 나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것들은 지식이다. 하나도 신기하지도 대단하지도 않다. 알면 아는대로 좋겠지만 모르면 모르는대로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이다. 생각하는 방법이다. 머리는 창고가 아니고 발전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너도 그렇게 믿었으면. 내가 가진 지식의 양에 주눅들지 말고, 너와는 다른 취미, 다른 취향에의 이질감에 적개심을 가지지 말았으면. 부디 그래주었으면.
네가 피자를 좋아하듯 나는 순두부찌개를 좋아하고, 네가 예쁜 가방을 갖고 싶어하듯 나는 재밌는 책을 바란다. MAC에서 신상이 나왔다며 탐을 내는 너와, 베르베르 신작이라며 눈에 불을 켜는 내가 어디가 어떻게 다르기에 그리도 나라면 치를 떠는지.
너와 병존하고 싶다. 이해는 바라지도 않는다. 나조차 널 제대로 이해하는지 자신이 없는데 네게 그것을 바라는 건 실례라고 생각한다. 다만 너와 나란히 함께하고 싶다. 항상 버둥거리고 어딘가에서 상을 타와야만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름 자체로 있고 싶다.
이런 말을 네 페이스북 댓글에 달고 싶지만, 안 한다는 년이 알고보니 뒤에서 살금살금 훑어보고 있었다, 는 비난이 두려워 여기에 털고 말아버린다.
처음 마시는 술이 들어가 글이 두서가 없어 죄송합니다. 익명으로 남겨 또한 죄송합니다.. 읽어주고 감싸주는 이곳에 한 번 글로나마 남겨보고 싶었습니다.. 항상 묵묵히 들어주시는 오유 고게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