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불법으로)
위험한 생각
우리는 우주에 홀로 존재한다.
무생물로부터 생명체로 자연발생적 전환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지극히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게 밝혀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 단 한 번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무기물로부터 지구상에 생명이 출현한 것을 말한다- 태양계에 인류만 홀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다지 큰 충격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휠씬 넓은 은하계, 심지어 우주 전체를 통해 인간만이 홀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우리는 절망감을 느낄 것이다.
로드니 브룩스[MIT의 컴퓨터 과학 및 인공지능연구소 소장
페르미의 역설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다. 1940년대의 어느 날, 엔리코 페르미를 비롯한 몇몇 물리학자가 지구 바깥에 지적인 생물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은하계에 별이 1천억 개나 있고, 그 중 하나인 지구에서 아주 급속하고 연속적으로 생명의 진화가 이루어져, 지적이면서도, 기하급수적인 번식력을 자랑하는 생명체(인간)가 몇 백 년 만에 은하를 지배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논리적으로 보면-우주의 역사가 수십억년이나 되고 은하계에 1천억개의 별이 있기 때문에- 지금쯤이면 이 은하계에 외계의 지적인 생명체가 널리 퍼져 있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때, 옆에서 죽 이야기를 듣고 있던 페르미가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거지?"
자유의지가 없다면 행위의 책임을 인간에게 물을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우리의 인지 과정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헬름홀츠가 제기했던 '무의식적인 추론'이라는 개념을 확장한 것이다. 헬름홀츠는 신경계에서 발생하는 전기 신호를 처음 측정했는데, 다소 이상한 현상을 깨닫게 된다. 신경계에서 발생하는 전기 신호는 구리선 같이 1초에 30만 킬로미터로 전달되어야 할 것으로 추측했는데, 막상 측정을 해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한참 미치치 못하는, 1초에 90미터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람들이 외부 자극에 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를 실험해보았다. 그는 반응시간은 감각기관이나 운동기관이 활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길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과를 통해 그는 뇌에서 일어나는 활동 중 상당수는 의식적 지각보다 앞서서 무의식중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86년 벤자민 리버트의 실험이었다. 한스 콘후버가 이전에 했던 실험을 불발점으로 삼았다. 콘후버는 실험참가자들에게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움직이도록 했다. 그런 다음 집게손가락을 움직이는 데 걸린 시간과, 뇌 속에서 전기적인 신호가 활동한 시간을 머리에 설치한 전극을 통해 측정했다. 수백 번의 반복된 실험 끝에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즉 집게손가락을 움지이기 조금 전에 뇌 속에서 전기적인 스파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콘후버는 뇌 속의 이 전기를 준비 전압이라고 부르면서 이 전압이 자발적인 움직임보다 1초 정도 앞서서 작동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실험들은 마음을 다루는 철학자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했다. 만약 하나의 선택이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겠다고 결심하기도 전에, 뇌에서 무의식적으로 결정된다면, 자유의지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자유롭게, 우리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다고 느끼는 것은 착각에 불과한 것인가?
어떤 행동을 인식하는 것과 결정하는 것 사이에 시간 차이가 존재하는 까닭이 무엇이든지, 리베트의 발견은 다음과 같은 윤리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의 결정이, 자신도 의식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행해진다면, 그 결정에 대해서 그 사람에게 책임을 붇는 것은 올바른 일인가?
에릭 캔들 2000년 노벨생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도킨스 [진화생물학자, 옥스퍼드대학교 교수 <이기적 유전자>저자]
중대한 죄를 저지른 범죄자는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고, 그래서 사형이나 장기 징역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지를 물어보라. 유사한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자의 갱생을 위해서라는 이유를 대겠지만, 그 어떤 미사여구를 붙이더라도 본심을 숨길 수는 없다.
사람들은 끔찍한 범죄에 대한 보복으로 범죄자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인공 지능 컴퓨터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본다. 우리는 컴퓨터가 오작동을 일으킨다고 해서 컴퓨터를 처벌하지는 않는다.
영국의 유명한 시트콤에서 베이절 폴티가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출발을 하지 못하자, 자기 성질을 참지 못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자동차에게 엄하게 경고한다. "셋 셀 때까지 기회를 주겠어." 그래도 차는 꿈쩍하지 않는다. 그는 한 번 더 기회를 주고는 이렇게 말한다. "좋아! 난 너에게 분명히 경고했어. 네가 네 무덤을 판 거야!" 그는 자동차에서 내려 차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몽둥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는 그의 불합리한 행동을 보면서 웃음을 참지 못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차를 때리는 대신 차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왜 우리는 살인자나 강간범 같은 결함 있는 사람에게는 고장 난 자동차를 대하듯이 반응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범죄자를 처벌하는 판사에게는 베이절 폴티를 비웃는 것처럼 비웃지 않는가? 살인자나 강간범은 결함 있는 양육, 혹은 결함 있는 교육, 혹은 결함 있는 유전자의 탓이 아닌가?
비난과 책임 같은 개념들은 도덕적으로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든 꺼리낌 없이 떠돈다. 한 소년이 어떤 할머니의 돈을 강탈할 때, 우리는 그 소년이나 그의 부모를 비난해야 하는가? 혹은 그가 다니는 학교를 비난해야 하는가? 주의를 게을리 한 사회 복지사를 비난해야 하는가? 만약 법정에서 그 소년이 정신능력이 박약하다는 판정을 받는다면, 정신이상자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방어수단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는 피고의 책임이 작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불행한 유년기, 아버지의 학대, 혹은 불운한 유전자까지도 지적할 것이다.
왜 범죄자 자신이 아니라 범죄에 이르게 된 생리적, 유전적, 환경적 요인을 다져보자는 견해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가? 왜 어린이를 살해한 사람, 혹은 파괴적인 약탈자들에게 감정적인 증오를 드러내는 데만 몰두하는가? 왜 그들을 수리나 부품 교체가 필요한 결함이 있는 대상으로 불 수 없는가?
물론 비난과 책임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더 잘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간편하고 유용한 수단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려고 만든 허구적인 매개물일 뿐이다.
나의 위험한 생각은 우리가 마침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베이절폴티가 자동차를 매질할 때 그를 비웃는 것과 똑같이 범죄자 개인을 비난하고, 그에게 책임을 묻는 일을 비웃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 계몽의 수준에 영원히 도달할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더욱 드렵기도 하다.
선하고 옳은 말만하는 사회
대니얼 길버트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
'위험하다'는 것은 자극적이거나 대담무쌍한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큰 피해를 야기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위험한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다. 즉 "생각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침묵을 깨고, 잡담을 하고, 어떤 의견에 동조했다는 이유만으로 참수당하고, 투옥되고, 강등되고 비난받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 지껄임이나 수다스러움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어리석음이나 소외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런 지껄임이나 수다스러움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어리석음이나 소외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불쾌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은 다양한 생각들이 거래되는 시장으로 입장하는 데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다. 증오에 차 있고 모욕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히고 상스럽고 무례하고 무식한 의견들이야말로 자유로운 사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바보들의 끊임없는 주절거림은 우리가 서로 하나라는 걸 알게 해주기도 한다.
공적인 대화에서 사용하는 모든 말들이 공정하고, 선하고, 옳기만 하다면, 그때야말로 그 사회로부터 도망쳐 나와야 할 때이다.
도덕이야말로 허점투성이다
(데이비드 피짜로 코넬 대학교 심리학과 조교수)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는 도덕적인 진리를 지각할 수 있는 극히 신성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신성한 능력이란 사실은 보다 단순한 심리적 기제들이 뒤범벅된 것일지 모른다. 또 그 심리적 기제들 중 일부는 도덕적 진리를 지각하려는 것과는 상관 없는 목적을 위해 발전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도덕관념은 직관, 경험 법칙 및 감정적인 반응들이 상당히 느슨하게 결합된 것일 뿐이라는 점은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다. 감정적인 반응들 중 몇몇은 원래 윤리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기능을 위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이 기제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추론능력이 끝날 대, 인간이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인 것 같다. 예를 들면 행동이나 고의성, 통제에 관한 직관은, 부도덕한 행위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지각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그 밖에 감정이입과 혐오감이라는 감정적인 반응은, 도덕적 보호를 받을 만한 사람은 누구이며, 그렇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가리는 판단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의도를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은 아마도 누가 도덕적 비난을 받을 만한지 결정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혐오감이라는 감정적인 반응은 누가 도덕적 보호를 받을 만한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썩은 고기와 배설물로부터 우리가 안전하도록 발전되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도덕관념이 있기 때문에 도덕적 진리에 쉽게 이를 수 있다고 믿는 태도는 이제 버려야 한다. 물론 그런 생각은 마음을 편치 않게 할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결국 도덕적 현실주의자이다. 그들은 수학 무넺의 해답처럼, 행위는 객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험한 생각은, 우리의 직관은 우리를 도덕적 진리로 이끄는 데 시원치 않는 안내자일지도 모르며, 우리가 매일같이 내리는 도덕적 결정에서 쉽게 우리를 엉뚱한 길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위험한 생각
나는 독자들이 호의적으로 고려해주길 기대하면서, 어떻게 보면 터무니업싱 역설적이고 엉뚱해 보이는 원칙을 하나 제안하겠다. 그것은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어떤 근거도 없을 때, 그 제안을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버트란트 러셀 <회의적인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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