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집 근처 방송국에서 문화체험하는 날이라 상큼하게 버스를 타고 가려했음. 마침 건널목에 도착하니 빨간불이었고, 내가 타려는 버스는 신호에 막혀 정차장에 그대로 서 있었음. 꿀타이밍이라 속으로 쾌재를 내지르며 버스 앞에 갔는데 버스 기사가 나를 외면하는 것이 아님? 아....이때 나는 직감했음. 이 버스기사가 나를 두고 가시는 님이 될 것이란 것을.... 어이없는 승차거부를 당한 뒤 홧김에 정류장 앞 맥날에서 맥모닝세트를 흡입하고 택시를 잡음. 이제 본격적인 사건의 시작인 셈임. MBC삼주아트홀로 가자는 나의 말에 기사님은 아나운서나 기자시냐고 물어보셨음.
"아아뇨, 오늘 우리 학교 아이들 문화체험있어서 가는 겁니다."
"그럼 선생님이시네. 요새 나라가 참 많이 시끄럽다 그죠?"
택시기사분들 항설 좋아하시지만 이쪽지역이 극우성향이 강해서 좀 수줍게-_-*답했음
"아, 네. 그렇죠. 어른으로서 학생들한테 좀 미안하죠.ㅎㅎ"
"요새 교과서때문에 참 말 많던데, 선생님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올 것이 왔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 대화의 결이 결정될 것이임. 그러나 내가 누구임? 화작문을 두루섭렵한 대한민국 국어교사가 아님? 나의 이 심플한 대답으로 판단의 여지를 남길거임.
"ㅎㅎ...."
"왜요? 잘 모르겠어요? 별 생각이 없으신가?ㅎㅎ"
여지없이 실패였기에, 정공법으로 가기로 했음.
"아뇨, 말하면 욕할거 같아서 참고 있었습니다. ㅎㅎ"
그러자 아저씨께서 호쾌하게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니겠음?
"그게 다 국론분열하려는 거죠 뭐. 허허허"
오....이 분이 뭔가 좀 대화가 통할 기미를 보이시기에 흥겹게 받아쳤음.
"저희들도 욕 많이 해요. 어떻게 이런 교과서를 만들어냈는지... 말도 안되죠 진짜."
그런데 아저씨의 왈
"허허 그게 그렇게 욕먹을만큼 문제가 되나요? 국정화를 지금 나쁘게 보시는거죠, 그러니까?"
아니 기사님의 상태가...???
"국정교과서 자체를 문제 삼는건 아니에요. 저도 국정교과서 세대니까요. 다만 방식의 문제인거죠. 역사학자 한 명 없는 역사교과서라는 출발점부터 잘못됐으니까요."
"음...그럼 요새 계속 데모하는건 어떻게 생각해요?"
"저도 시간만 되면 가고 싶네요.ㅎㅎ"
"그런데 이제 헌법에 좀 맡겨야 되는거 아닐까요? 우리나라가 엄연히 법치주의국가인데, 이제는 탄핵됐으니 법원의 몫인걸 이 데모하는 사람들(국민이라고 하지 않으셨다-_-)이 자꾸 압박을 가하는 형태가 되니까 원..."
옛날 혈기왕성한 본인이었다면 여기서부터 돌아버리고 언쟁을 시작했겠지만, 나는 이제 27개월, 1개월된 두 아들의 아빠고 29명의 초등학교7학년 뚱뚱이들의 담임-_-임. 이런걸로 흥분하지 않음...후후
"그런데 애초 '국민들'이 광장에 나오는 게 탄핵이 아니라 즉각퇴진, 즉각 하야선언을 원한 것이고 이제껏 저지른 대통령과 측근의 비리에 대한 명쾌한 해명이 그 이유니까, 아직 나오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저는."
이 앞의 사람은 아조시가 아니라 키가 크고 노안-_-인 나의 뚱뚱이 중 한 명이란 생각으로 조곤조곤 말씀드렸음. 다행히 아저씨도 경우없는 분은 아닌지라 말씀하시는 내용과 달리 점잖게 말씀하셨음
"그런데 법치국가에서 광장정치를 한다는 건 질서에 어긋나는 부분 아닙니까?"
"당연히 법치국가에서는 법앞에 만인이 평등해야죠. 그런데 전 이런 부분도 있다고 봐요. 우리나라가 대의민주주의잖아요. 국회의원들은 말그대로 자기 지역구, 크게는 국민 전체의 민의를 대신 주장하는 사람이지 우리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죠.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그 국민들이 한목소리로 요구하는 부분은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 아닐까요? 하다못해 일개 동에서도 민원이 들어오면 내용 확인 후 규정을 수정하거나 상황이 시정되는 등의 조치가 취해지는데, 거대한 국가라면 말할 필요도 없겠죠."
나만의 특징이 아니라 국어선생들이 다 그렇잖음? 얇고 넓게 아는 잔지식....ㅋㅋ 어디서 주워들은 대의민주주의를 이렇게 써먹다니, 훌륭하다 나님녀석! 아저씨에게 묵직한 팩트를 날리자, 조금 당황하신 눈치셨음.
"아니, 그건 그래도 그렇게 계속 집회하면 분명히 피해보는 사람들이 있을텐데..."
오....던지지도 않은 미끼를 어찌 이리 덥석 무심?? 아조시가 보지 못하게 은근히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여쭈었음.
"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피해를 볼까요 기사님?"
"뭐 주변 상인들이나 그런 뭐...."
나는 직감했음. 지금이 바로 킬각이란 것을, Q→W→평→E→평→Q→점화→평 콤보를 쓸 타이밍이란 것을 말임.
"최근 JTBC에서는 주변 식당하시는 분들이나 편의점의 매출이 비정상적으로 올랐단 보도가 있었죠. 상인들 직접 인터뷰도 했고요. 어느 곰탕집은 아예 재료자체가 동나버려 더이상 장사를 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웃으며 말하기까지 하던데요. 편의점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사람들이 오래 머물다보니 그 근처 상권 접근성이 일시적으로 좋아지면서 매출이 오른다는게 기사의 주 요지였고요."
가만히 듣던 아조시께서 황급한 점멸을 쓰시듯 말씀하셨음
"아니, 그래도 누군가는 피해를 보겠지요..."
이제 내릴 때가 거의 다 됐다. 나는 이번 발언이 마지막이 될 것이란 생각에 맞점멸→평→점화→Q를 날렸음
"그렇죠. 저도 동의합니다. 왜 안그렇겠어요. 누군가는 피해를 보겠죠. 그런데 기사님, 어떻게든 발생할 피해때문에 무언가를 못한다면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거랑 같지 않을까요? 지금은 더욱 큰 변화가 필요하니까 어느정도의 불편을 감수할 필요는 있겠지요. 한가지 이 관련 예를 들어볼게요. 기사님께서 택시운전을 하시는데 누군가가 '택시운전을 할 때마다 배기가스 때문에 대기가 오염되니, 더이상 택시운전을 하지 마세요.'한다고해서 기사님이 '아, 네. 그런 피해가 있으니 그만해야겠네요.'할 수는 없잖아요. 애초 기사님께 그런말하는 사람이 이상한거기도 하지만요."
"아 뭐...생각은 다 다른거니까요. 허허....."
뭔가 더 말씀하시려는 것 같았지만 때마침 내려야만 했고, 정중한 인사를 나눈채 우리는 서로 헤어졌음
킬각이니 어쩌니 우스갯소릴 했지만, 오간 내용에 비해 굉장히 신사적인 분위기에서 이야기가 오갔음. 뭐..그냥 그랬다는거임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