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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색의 여러가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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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스름한 골목에서 안절부절 트와일라잇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번에 내가 일지에다가 나 심하게 아프다고 트와일라잇에게 문자를 보냈던 까닭에, 트와일라잇이 거의 빌다시피 하며 날 찾아오겠다고 했었던 것이다. 트와일라잇은 내가 고위력 주문을 쓰는 방법을 가르쳐준 데다가, 복잡한 마법 이론에 과한 학술적 대화를 나눌 유일한 포니인데 이렇게 소홀하게 대해서야 되겠냐며 부득불 오겠다고 했었다.
트와일라잇은 셀레스티아에게 적당히 댈 핑계거리를 찾으려면 몇 달은 걸린다고 했었다. 좋은 소식이었다. '셀레스티아의 환영'을 본 이후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데에 몇 달 정도면 그래도 충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 주를 들여가며 내가 알고 있는 탐색마법들을 다 동원하여 셀레스티아가 진짜로 여기에 왔는지 확인했었다. 일단 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헛것을 봤었다.
물론 내가 배운 탐색마법들은 전부다 셀레스티아가 가르쳐 준 거였고, 당연히 그걸 회피하는 방법도 셀레스티아는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셀레스티아가 아직 가르쳐주지 않은 것들도 꽤 있을 테고.. 물론 내가 강박증 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나는 드디어 망토를 벗고 다른 옷을 입고 나왔다. 내 흉터를 안 가리고 다니자니 영 꺼림칙했지만 말이다.
오늘 나는 래리티가 만들어준 가죽자켓을 입고 나왔다. 예전에 쓰던 낡은 담요처럼 편안하기 그지없었고, 부드러운 착용감과 무두질한 가죽의 냄새가 좋았던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드디어 열차가 역에 정차했다. 트와일라잇과 전에 추적을 따돌리는 법은 충분히 상의했으니 오늘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나와 골목에서 만나 동시에 연속으로 순간이동 주문을 써 혹시 우리를 따라붙은 포니를 따돌리고 나서, 마을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 안전한 성으로 곧장 가기로 했다.
...기실 성은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별로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함정이 있는 곳이었으니 익숙하지 않은 포니에게 있어선 별로 안전한 곳은 아닐 것이다.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나한테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그래도 이거 왠지 불안한걸.. 어쩐지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선셋 언니! 아우.. 저기, 저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는데요, 일단 제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트와일라잇의 목소리가 들어와 난 반갑게 웃으며 트와일라잇을 맞이했-
트와일라잇의 옆에 다른 포니가 낯익은 한 기 있었다. 분홍색 털가죽에 삼색의 긴 갈기를 기르고 뿔과 날개가 동시에 달려있었다.
그 포니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다급히 순간이동으로 탈출하느라 표정을 제대로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나도 딱 저런 표정이었겠지..
몇 초 지나지 않아. 나는 마을 정 반대편에 와 있었다.
"캐이댄스가 왜?!"
나는 누구 집인지도 모르는 곳 뒤뜰에서 반쯤 으르렁대며 말했다.
"캐이댄스를 왜 데려온 거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트와일라잇?!"
이럴 틈이 없다. 지금 당장 적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빨리 성으로 가서 필요한 것만 챙긴 후 그리폰 왕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는 게 어떨까? 최근 그리폰 왕국은 여행 금지령이 풀어진데다가, 범죄마 인도 조약도 걸려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폰 군대에선 능력 있는 자라면 종족 불문하고 환영했으니, 나 같은 뛰어난 마법사는 틀림없이 두 발톱 들고 반길 것이다.
하지만 그리폰 왕국은 지금 제브리카와 소규모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그게 마음에 약간 걸렸다. 얼룩말 주술사를 지금 스승으로 두고 있는데 소위 '평화유지군'이라는 목적으로 얼룩말 부족들이 사는 곳에 가서 그들이 먹는 작물을 거리낌 없이 불태울 정도로 나는 양심에 털이 나진 않았다.
그럼 그리폰 왕국은 제외하자. 제브리카는 어떨까? 거기서 주술사는 (아무리 수습 주술사라도) 부족민들의 존중을 받는 계급이었고, 나 또한 거기에 가면 나름 대접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곳은 부족사회라 통일된 정부기관을 두지 않았고, 때문에 국가 수준으로 경비가 철저하달만한 곳이 없어 내가 자고 있을 때 이퀘스트리아에서 온 요원이 몰래 나를 납치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냥 사라지고 싶다면 이퀘스트리아 외각 황무지라는 선택지도 있었다. 에버프리보다 더 거친 자연 그대로의 마력이 날뛰는 곳이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거기에는 끔찍한 형상의 괴물들과 모습을 바꾸는 괴물들, 거의 도시 한 구역만큼이나 큰 거대 괴수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라고 했다.
젠장, 관두자. 곰을 피하려다 만티코어굴로 들어가는 셈이다. 차라리 그냥 자수하고 깜빵에서 썩는 게 낫지.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왜 트와일라잇이 갑자기 나를 배신했냐는 거다. 전에.. 그러니까 그 때 숲에서 만난 사슴을 쫓아낼 때 내가 트와일라잇에게 겁을 줘도 너무 심하게 준 건가? 아니.... 아니군.. 애초에 트와일라잇이 나를 싫어해서 이퀘스트리아의 공주를 데려온 거라면 왜 캐이댄스지? 셀레스티아가 아니라?
"말이 안 되잖아! 날 잡아갈 생각이었다면 왜 캐이댄스만 데려온 거냐고!"
나는 평정심을 잃고 크게 소리 질렀다.
"저...사실.. 떠나기 몇 분 전에 갑자기 따라오시기에 떼어낼 수가 없었어요. 언니에게 미리 경고를 하거나 변명을 할 여유도 없었구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트와일라잇 혼자뿐이었다. 뻘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파이크는 겨우 캔털롯에 있는 집에 때놓고 왔지만.. 캐이댄스 언니는.."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뻔히 셀레스티아에게 일러바치겠지! 이곳에는 쭉 경비병들이 깔릴 테고...게다가 뻔히 너도 문제에 휘말릴 텐데.. 그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가...."
눈가에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캐이댄스를 암살할 수 있을까? 거의 불멸자 비슷한 존재가 됐는데 말이다.
"절대 안 그러실거에요! 캐이댄스 언니는 제가 망아지 시절부터 절 돌봐주신 분이라고요. 이제 전 보모는 필요 없지만, 가끔 절 보시러 와서 줄곧 같이 놀고는 하거든요. 사실 캐이댄스 언니는 지금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목적으로 오신 게 아니라, 내가 여행 갈 준비를 막 마치고 집을 나서려고 했을 때, 문득 나타나서 자기도 여행에 끼워달라고 한 것 밖에는 없다구요."
나는 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트와일라잇.... 넌 왜 그렇게 똑똑한 애가 기초적인 상식은 눈곱만큼도 없니.."
"죄송해요.."
트와일라잇이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후 절뚝거리며 다가와 트와일라잇을 안아주었다.
"물론 네 말대로 캐이댄스가 날 잡으려는 목적으로 널 따라온 건 아니겠지, 그래도 이건 여전히 큰일이라고.... 들어봐. 캐이댄스랑 나는 성에 있을 때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 당장 가서 셀레스티아에게 일러바친다고 해도 난 별로 안 놀랄 거라고..... 하아.... 그냥 캐이댄스에게 나 못 찾았다고 말 좀 해주라. 어떻게든 시간을 좀 끌 수 있으면 끌어주고. 그동안 난 성에서 필요한 물건만 챙겨서 재빨리 나갈 테니까."
나는 껴안았던 트와일라잇을 풀어주고 다음엔 뭘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냥 도망치시려구요?...."
트와일라잇이 아까보다 더 의기소침해졌다.
"그럼 뭘 더 어쩌라구?! 나 잡아가쇼 하고 경비병 올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을까? 셀레스티아 앞에 꽁꽁 묶인 채로 끌려가서 '날 더더욱 실망시키는구나. 너도 모자라서 내 새로운 수제자까지 타락시키려고 드느냐'라는 설교를 귀에 박히도록 들으라고?! 허... 이번엔 아마 내 뿔을 잘라버리려 들지도 모르겠는걸.."
트와일라잇은 놀라서 숨을 멈췄다.
"공주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그게 사실이래도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어!"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윽고 난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트와일라잇.. 걱정 마.. 이건 네 잘못은 아니니까."
사실 잘못 맞았다. 모두 트와일라잇 때문이었다. 오기 전에 무슨 수를 짜내서라도 경고만 해 줬더라면 내가 무슨 수를 썼을 텐데..
"선셋 언니. 캐이댄스 언니는 제겐 친언니와 같은 분이세요.. 한번 이야기라도 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
트와일라잇은 기대에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직접 만나 이야기 해 보시다 보면 어쩌면 그냥 못 본 척 해 주실 있잖아요."
"걔랑 대화를 해보라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전에 언니가 그러셨죠? 바뀌고 싶다구요."
트와일라잇은 얇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려면 다른 수단을 써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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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내가 한 결정 중 최고로 멍청한 결정이었다. 물론 내 마생은 멍청한 결정의 연속이었다지만, 그래도 이건 그 중 최대로 멍청한 결정이었다.
멀쩡한 세 다리와 병신이 된 한 다리로 다리가 닮을 때까지 도망가는 게 아무래도 현명한 판단이었겠지만, 그 대신 난 트와일라잇에게 이끌려 전에 같이 점심을 먹기로 약속했었던 카페로 끌려가고 있었다. 내가 지금 가고 싶은 방향과 완전히 반대 방향이었다.
지금 이 총체적 난국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 하나가 있다면, 캐이댄스가 갑자기 포니빌에 방문하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의 관심이 다 그쪽으로 쏠린지라, 내게 오는 관심은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오늘 내가 어두침침한 망토를 안 입고 왔다는 사실도 내게 쏠리는 관심을 더는데 한 몫을 했다.
제법 많은 수의 포니들이 카페를 에워싸고 있었다. 소위 '사랑의 공주'라는 포니를 발끝에서나마 보고 싶은 마음이었겠지...
"걱정 마세요 다 괜찮을거에요."
트와일라잇이 내 귀에 속삭이며, 카페 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나를 살짝 뒤에서 밀었다. 카페는 단 한자리만 빼고 다 비어있었다. 그렇다. 캐이댄스가 앉아있는 그 한자리를 빼고 말이다.
캐이댄스는 입구를 등진 채로 앉아있었고, 난 캐이댄스의 머리와 등만 볼 수 있었다. 일부로 입구를 등진채로 앉아있었나 싶었다.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케이댄스가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습을 봤다면 난 곧바로 튀었을 테니까. 아니.. 화염구를 발사해버렸을 테니까. 나는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게 있으면 줄곧 화염구를 날려 왔던 것이다.
트와일라잇은 앞장서서 캐이댄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트와일라잇을 따라갔다.
이거.. 영 어색하겠군.. 그리폰 대사관에서 저녁 만찬 때(셀레스티아가 이퀘스트리아마용 식단으로 주문하라고 미리 주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베이컨과 스테이크를 내 몫으로 받게 된 그 때보다도 어색하기로 따지자면 더 어색할 것 같았다.
아니, 뭐 그 때 그 자리는 분명 어색하긴 어색했지만, 그 때 먹었던 베이컨은 진짜 맛있었다. 송로버섯 채집용으로 애플잭이 키우고 있는 돼지를 볼 때마다 군침이 돌 정도면 말 다했지..
"저기... 음.."
트와일라잇이 어색하게 소개하려던 찰나 캐이댄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까지 쭉 이 마을에서 살았던 거야?"
작은 목소리였다. 화가 난 건지, 그냥 충격을 받은 건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여기선 아니고... 근처 숲에서.."
"세상에! 죽은 줄만 알았잖아! 다들 네가 그대로 죽은 줄만 알았다고! 널 찾는 포니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기나 해?!"
내가 밀어낼 틈도 없이 캐이댄스는 갑자기 날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와락 껴안았다. 캐이댄스가 이렇게 힘이 셀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격통이 내 반불구가 된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캐이댄스는 내 다리가 이 지경인지 모르고 날 통째로 포옹해버린 것이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화염구를 발사하려는 찰나, 다행이 트와일라잇이 재빨리 내 주문을 차단해서 애꿎은 가게 하나를 날려버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고통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좀 풀엇!!.. 내 다리! 다리!"
캐이댄스는 황급히 포옹을 풀었고, 나는 신음을 내며 나쁜 다리를 문질렀다.
"미안, 그러려던 게-"
"됐어!"
나는 버럭 화를 내며 캐이댄스의 말을 잘랐다.
"아주 옛날에 다친 거니까. 뭐 물론 지금도 세게 누르면 아프긴 하지만.."
아픔이 좀 가시자, 나는 심호흡을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좀 봐봐. 물론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난 여기 와서 내 삶을 찾았고-"
"싫어하다니 누가?"
이번엔 캐이댄스가 내 말을 잘랐다.
"나 너 싫어한 적 없는걸?"
"나보단 확실히 포니 됨됨이가 더 낫구나...난 언제나 널 질투했었는데.."
나는 거의 중얼거리다시피 말했고, 캐이댄스는 자리에 앉았다.
"트와일라잇이 누굴 몰래 보러가길레 누군가 했더니 설마 너였을 줄이야.. 진짜 꿈에도 몰랐어."
"됐고, 셀레스티아에게는 말하지 마라."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 때문에 괜히 트와일라잇까지 문제에 휘말리게 하지 마."
"무슨 문제가 생긴다구 그래? 선셋. 만약에 이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오히려 뛸 듯이 기뻐하실 텐데! 네가 죽었을... 아니 다들 네가 죽었다고 오해했을 때, 이모님은 워낙 충격을 받으셔서 일주일이나 국정을 다 미뤄두실 정도였었다구."
".. 커다란 실망만 안겨주고 수습은 안 해두고 간게 그 정도로 충격이 컸나 보지 그럼.."
"그런 이야긴 그만 좀 해. 그리고 실망이라니, 이모님은 나한테 말할 때 언제나 널 자랑스러워 한다는 말씀 뿐이셨는걸. 아무리 네가 나한테 약간... 못되게 굴었어도 말이지."
"'약간' 수준이 아닐 텐데.."
나는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말했지. 난 널 질투했다고. 내가 바랬던 건 뭐든 가져서.. 너를 볼 때마다 되게.. 거슬렸었거든.."
"잠깐! 언니들 서로 아는 사이였어요?"
트와일라잇이 눈을 끔뻑이며 질문했다.
"... 아.. 그랬겠구나.. 둘 다 성에서 사는 분이셨으니.. 어쩐지 아까 선셋 언니가 캐이댄스 언니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더라구요.."
"근데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모님은 우리 사이를 어떻게든 붙여놓으려고 했지만.."
그 다음으로 말을 꺼낸 것은 캐이댄스였다.
"선셋은 내가 가졌던 걸 질투했었고, 나는 선셋이 나보다 이모님이랑 더 가까웠던 걸 질투했던 까닭에 잘 돼진 않았지.."
"내가 셀레스티아랑 더 가까웠다고?"
의외의 말에 이번엔 내가 두 눈을 잠시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헛소리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단 네가 더 가까웠는데, 왕가 호적으로 입양까지 됐으니 말 그대로 빼도 박도 못하는 가족이잖아!"
"입양은 됐지만, 이모님은 대부분의 시간을 나보단 너랑 더 오래 보냈는걸."
캐이댄스가 질세라 맞받아쳤다.
"게다가 수업은 언제나 너한테만 해줬고 말야.. 나는 어쨌는지 알아? 이모님이랑 단 몇 분간 단 둘이서 국정에 관한 잡담이나 나눌 수 있으면 그 날은 아주 운이 좋은 날이였다구."
"훈련 같은 게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 진작 알리콘이면서 뭘..."
나는 두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마법 교육 없이 혼자서 놔둬도 창피당할 일은 없겠다 싶어서 셀레스티아가 널 그냥 놔둔 거겠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근데.."
캐이댄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 이모님이 어쨌는지 알아? 캔털롯 고등학교에 마법 교육을 받으라고 보내더라구. 그 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알기나 해? 내 나이의 절반도 안 되는 애들에게서부터 공주인데 마법도 못 쓰냐는 비웃음을 당하면서 버텨야 했었는데!"*
(*공식 코믹스 제 11~12권을 참조하세요)
"너 알리콘이잖아. 분명 나보다 쓸 수 있는 마력은 더 많을 텐데.."
"난 원래 페가수스로 태어났어 선셋. 이걸 쓰는 법은 아직 잘 모르겠더라구."
캐이댄스는 자기 뿔을 두드리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도 이모님이 나한테도 수업을 약간 해 주셨다면 그래도 너를 반이나마 따라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네. 여기 있는 트와일라잇의 마법 실력은 날 초월한지 이미 꽤 됐고.. 넌 아마 모를 거야. 내가 건 주문을 자기도 모르게 척척 해제해버리는 망아지를 돌보는 게 얼마나 처참한 기분인지.."
나는 코웃음을 쳤다. 애플잭 여동생만한 나이의 트와일라잇이 캐이댄스에게 투정을 부릴 때, 정작 캐이댄스는 자기 몸에 붙은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는 장면을 상상하니 기분이 꽤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모님은 너한테 수업을 해 주셨어."
캐이댄스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님은 네가 엄청난 가능성이 있는 아이랬어. 그래서 난 생각했지. 나는 아마 너 만한 잠재력이 없는가보다 하고.... 지금 막 생각해본 건데.. 우리가 서로를 질투에 찬 눈으로 흘겨보기보단, 그래도 서로 어울리려고 노력 정도는 해 봤다면.. 아마 둘 다 지금보다 더 나은 포니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아마도.......하지만 나 때문에 결국엔 불가능했을 거야.... 난 못된 포니니까.. 난 셀레스티아의 애정을 독차지하길 바랐어. 셀레스티아의 딸과 학생, 모두가 되고 싶었지. 그런데 방해꾼이 끼어드는걸 용납을 했으리라고...."
".... 너 진짜 많이 달라졌구나.."
캐이댄스가 내 발굽에 자기 발굽을 올리며 말했다.
"겨우 몇 분간 이야기하고 성급하게 판단하지 마. 그냥 내가 오늘 썅년짓을 좀 쉬는 것일 수도 있잖아."
"아니, 넌 확실히 달라졌어. 예전의 너라면 트와일라잇의 공부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거고, 전후관계를 떠나서 네가 잘못했다는 말은 절대 한 마디도 안 했을 테니까.."
"당연히 그랬겠지.."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땐 내가 워낙 근자감 덩어리였고 또 멍청했었으니까.. 미친.. 나 지금 무슨 노마가 자기 어릴 적 말하는 것처럼 말하네..."
나는 몇 년간을 캐이댄스를 증오하느라 낭비해왔다. 캐이댄스는 앙갚음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보면 알아서 슬슬 피했었다.
"언니들.. 잠깐만요."
아까침부터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던 트와일라잇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캐이댄스 언니. 우리 오빠랑 아직도 사귀고 계시죠?"
"응. 그런데?"
캐이댄스가 어안이 벙벙한 채 되물었다.
"분명 고등학교 때 만나셨다고 했는데... 아까 언니가 '내 나이의 절반도 안 되는'이라는 말을 하는 걸 분명 들었거든요."
트와일라잇의 두 눈이 예리해졌다.
"언니.. 지금 정확히 몇 살?"
"우와! 트와일라잇 이것 좀 봐! 여기 용암케이크도 파네!"
캐이댄스가 필사적으로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고 용을 쓰는 것 같았다.
"아하하..음.. 저기.. 방금 그 이야기 말인데.. 그냥 좀 넘어가주면 안될까? 커피 사줄게 커피!"
"전에 공주님이 제가 서쪽 정원에서 커피 마시다가 사고 친 이후로는 커피 마시지 말랬는데.."
"이 때 아니면 언제 또 마셔보겠어?.... 뇌물은 얌전히 찔러 줄 때 받아!"
"....콜!"
"...이런 포니가 이퀘스트리아의 공주라고? 웃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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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가 거의 진동 수준으로 몸을 부르르 떠는 건 내 마생들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트와일라잇은 내가 한 세잔까지 세다 포기할 정도로 커피를 많이도 마셨다. 저러다가 심장에 무리가 오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걸..
"이거 진짜 좋다! 이 좋은걸 왜 내가 끊었었지?! 선셋 언니! 언니도 커피 좋아해요? 차보다 더 좋아요 이거!"
트와일라잇이 진짜 보기 흉할 정도로 입이 째진 미소를 지었다.
"진짜 기분 좋다! 생각도 막 빨라지고! 잠 평생 안 자도 될 것 같은 기분이야!
"네가 왜 커피를 금지 당했는지 알만도 하네. 적당히 좀 마셔."
난 코웃음 치며 말했다.
"아. 쟨 괜찮을 거야 아마."
캐이댄스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내가 여기 온 진짜 이유가 뭔 줄 알아? 트와일라잇이 몰래 만나고 있는 수말친구가 있나 싶어서였어."
"쟨 책을 폈다하면 끝장을 보는 포니들에게만 관심 있을걸 아마? 어쩌다 내가 운 좋게 얻어걸린 것 같다만, 일단 난 수말은 아니지."
"아항! 선셋 언니 농담하신거구나! 그러니까 끝장이란 게 책의 마지막 장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말 그대로 끝을 보다. 쫑을 내다라는 의미도 있으니까-"
"참 나.. 농담을 자세히 설명하면 그게 뭐가 웃기겠냐고..."
나는 고개를 절래 절래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책에 관련한 농담 진짜 아는 거 많은데 제가 더 해드리면 되죠! 수염 난 스타스윌이 한참 유명세를 떨칠 때부터 전래되어온 고급 유먼데요, 어떤 유니콘이 도서관에 가서 사서에게 스타스윌이 지은 마법서를 하나 대여하고 있었는데, 마침 저 멀리 엄청 낯익은 포니 한 기가 지나가고 있었더래요. 그래서 사서에게 '저 자는 누구지?' 라고 물어보니까, 글쎄 사서가 '저자는 수염 난 스타스윌인데'이라고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는 거 있죠? 그러니까 그 유니콘이 '저 포니는 누구냐.'라고 물은 것을 사서는 '이 책을 지은 포니는 누구냐'라고 오해한 게 이 유머의 요점인데 그게-"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 세상에.. 쟤한텐 진짜 커피 안 먹여야겠다. 분홍색 누군가보다도 더 징하네.."
"분홍색 누군가?"
내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캐이댄스가 한 쪽 눈초리를 올리며 나를 추궁했다.
"너 말고. 이 마을에 사는 분홍색 포니가 한 기 있는데 걔가 진짜.... 아니, 됐다. 모르는 게 나을 거야. 어쨌든, 트와일라잇은 특별히 내게 자기 교우관계나 다른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어. 말을 안 해주는 바람에 너랑 알고지내는 사이인지도 몰랐는데."
"정말 보면 볼수록 너랑 트와일라잇은 닮았다니까."
캐이댄스의 말이었다.
"공부와 마법에 목을 매는 모습만 해도 그렇고.."
캐이댄스는 트와일라잇의 갈기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너 만한 자신감은 없다는 게 차이점이긴 하지만.. 이모님이 왜 트와일라잇을 수제자로 들였는지 약간 알 것도 같네. 그만큼 너희 둘은 서로 닮은 구석이 많거든. 그분은 여전히 언젠가 네가 돌아와서 너희 둘이 좋은 선후배 관계이자 친구 사이가 되길 바라는 희망을 놓지 않고 계셔."
나는 그 말에 약간 수줍게 웃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닮은 점이 꽤 있긴 해. 트와일라잇이 나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만 빼놓고."
캐이댄스가 매우 놀랍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잠깐.. 너 방금 진심으로-"
"진심으로 다른 포니를 나보다 더 낫다고 인정했냐고? 그래.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캐이댄스의 표정만 봐도 그 생각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래. 알아. 내 자리를 다른 포니가 차지했다는 생각을 극복하는 건 정말 힘이 들더군, 하지만 어쩌겠어? 사실이 그런걸. 개다가.... 와.. 진짜 쟨 마법 이론학에 있어선 나보다 더 천재적이더라. 난 수학같은건 딱 질색인데 말야."
"아..아니에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언니도 수학 잘 하시잖아요! 저번주에도 고위력 주문이 효력이 다하는 시기의 산출 값을 정확히 계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으면서...."
"그게 딱 내가 알고 있는 마법 이론중 가장 어려운 거야. 그걸 이해하는데 나는 엄청 애를 먹었는데, 너는 그걸 나보다 2배는 더 빠르게 배우더라... 그리고 넌 나보다 주문을 더 많이 알고 있고.."
"언니.. 전..."
트와일라잇은 머뭇거리며 무언가 말을 해보려고 했다.
"좋아. 이 언니는 더 이상 너한테 가르칠 게 없다."
"안 돼요!"
트와일라잇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미 우리는 온 마을 포니들의 구경거리였다는 게 위안 아닌 위안이였달까...
"그..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언니가 봐주셔야 전 더 빠르게 배운다구요!"
"빨라도 너무 빨랐지.."
나는 농담하듯 말했다.
"날 이미 넘어섰는데, 내가 뭘 달리 더 해줄 수 있겠어?"
"아...아니.. 그래도 제가 인정 못 해요! 유일하게 편하게 맘 터놓고 말 할 포니가 언니뿐인걸요! 그리고 언닌.."
트와일라잇이 얼굴을 붉히며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한 쪽 눈초리를 지긋이 올렸다.
"제가 친구들도 별로 없고 해서..."
..말 되는군. 쟤가 진짜 나와 닮았다면, 아마도 다른 학생들을 무시(물론 내가 했던 것처럼 오만불손하게는 말고, 그냥 있어도 없는 취급했었을 것이다.)하고 자기 학업만 계속했을 테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 잘못도 있긴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나랑만 교신해오며 비밀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을 테니, 다른 친구를 사귈 틈도 없었겠지.. 오히려 나와의 관계가 트와일라잇을 더 폐쇄적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는 것 같았다. 좋구만.. 양심에 찔릴 거리가 또 하나 늘다니..
"저기 트와일라잇."
혼자서 상념에 잠겨있을때, 캐이댄스의 말이 문득 내 주목을 끌었다.
"뭔가 착각을 약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선셋이 더 이상 너한테 가르칠 게 없다고 해서 너랑 선셋의 친구사이가 깨지는 것은 아니잖아."
"그치만.. 우리 사이가 뭔가 바뀌는 건 싫단 말이에요."
"가끔은 변화가 좋을 때도 있는 법이야. 전에 너, 자질 있는 유니콘을 위한 학교에 입학할 때 기억나니? 그때도 가기 싫다고 하다가 학교에 있는 도서관을 보고 생각을 바꿨잖아."
"그치만.. 선셋 언니가 제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게 우리가 어울리는 유일한 방법인걸요.. 그리고 언니가 절 가르쳐 줄 때가 전 진짜 좋단 말이에요..."
트와일라잇은 나와 캐이댄스의 시선을 피하면서, 컵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기 선셋. 너 새로 나온 마법책이나 학술지는 거기서 못 구하지?"
캐이댄스가 나를 돌아보며 질문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천 년 전이라면 모를까, 당연히 최근 건 못 구하지. 물론 고대의 지식을 발굴하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긴 한데... 그래도 최근 나오는 정리가 과학적으로 잘 된 학술서에 비하면야 거기에 있는 건 거의 문예수준으로 난잡하게 서술되어있으니.."
"그럴 줄 알았지. 그런데 여기 있는 트와일라잇은 지금 네가 못 구하는 최신 마법학, 비전학에 대한 책들을 마음껏 구할 수 있거든? 혹시 선셋. 네가 시대에 뒤쳐질 생각이 없다면-"
"트와일라잇에게 가르쳐달라고 하라고? 어쩐지 그런 말이 나올 것 같더라니.."
나는 한 쪽 눈가를 올리며 말했다.
"음.. 너보다 어린 포니에게 뭔가를 가르쳐달라는게 좀 맘에 걸리면-"
"아니.. 그게 꼭 싫다는 건 아니고.. "
나는 트와일라잇을 보고 활짝 웃어주었다. 안심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쟤한테 혹시나 부담을 줄까봐 그렇지. 지금 쟤는 자기 공부하기도 벅찬데-"
"아! 괜찮아요!"
트와일라잇은 거의 외치다시피 말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자기에게도 큰 공부가 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럼 저도 좋아요!"
트와일라잇은 나와 캐이댄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음.. 일단 학습 계획서랑 도표부터 짜둬야겠네.."
"됐으니까 그냥 네 공부나 열심히 하세요. 네? 지금 와서 중간고사랑 기말 때문에 골머리 앓기는 싫거든?"
트와일라잇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보며 말했다.
"곧 그렇게 되실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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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이댄스가 몰려든 포니들에게 사인을 해주거나 연애 상담을 해주는 등, 군중들의 시선을 끌어줄 때를 틈타 우리는 몰래 가게에서 나왔다.
트와일라잇과 나는 호수 근처에 둘이 같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어쩐지 트와일라잇이 좀 긴장한 눈치인데..
"걱정 마. 캐이댄스는 괜찮을 거야. 걔야 뭐 관심 받는 건 익숙할 테니까."
"알아요. 아는데.."
트와일라잇은 신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문질렀다.
"아우... 아까 마신 커피 때문에 머리가 다 아프고 어질어질하네.. 저.. 사실 다른 포니를 가르쳐본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도..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스승이 되는 거죠? 게다가 전 아직 학생일 뿐인데?"
트와일라잇이 공황감에 휩싸이는걸 나는 뻔히 알 수 있었다. 나도 여러 번 극심한 공황감에 휩싸인 적이 있다 보니 자동적으로 알게 된다.
"넌 잘 해낼 거야. 그냥 날 가르칠 때 약간 인내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는걸.. 난 너보다 별로 똑똑한 편은 아니라서."
나는 트와일라잇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트와일라잇은 얼굴을 붉히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럴 리 없어요. 언니도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수제자였잖아요.... 하아... 그리고 언니가 별로 똑똑한 편이 아니라면 제가 미리 알았겠죠."
"그런가?.."
그리고 우리는 잠시간 말없이 있었다. 어색한 침묵은 아니었다. 우리는 남에게 자기 의사를 잘 표현하는 포니는 확실히 어니였으므로, 오히려 우리 사이엔 이런 게 더 편안했다. 저번에 만날 때에도 서로 조용히 책만 읽고 해어졌었다.
....근데 이번엔 어쩐지 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은걸.. 기분 탓인가..
"저기 언니.. 떠난 걸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캐이댄스 언니 말처럼 언니는 언제나 돌아오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물론 셀레스티아 공주님께는 물어보지 않았지만요. 어..... 셀레스티아 공주님께 제가 언니를 안다는 사실을 숨기느라.."
"후회했지.."
나는 어께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가끔씩은... 하지만 떠난 것보다는, 셀레스티아에게 극심한 실망만 안겨주고 간 게 더 후회되더라고.. 만약 셀레스티아가 날 용서해준다 치더라도, 셀레스티아를 다시 볼 면목이 없을 정도로.."
"어째서요?"
"시간이 지나다보니 내가 정확히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으니까. 하지만 이미 사과를 하기엔 너무 늦었어..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을 혹시 셀레스티아가 나를 흑마법 장서실에 감독 없이 무단 침입한 죄로 나를 잡아넣는 건 아닐까 무서워서 도망 다니는 데에만 허비했거든.."
나는 내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건 뻔히 잘 알지만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어... 그리고 이젠 셀레스티아를 다시 만날 생각만 해도... 음.. 저도 공황감이 갑자기 찾아올 때 그 기분 잘 알지?"
트와일라잇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하늘 위의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이 눈에 들어와 나는 눈을 찡그렸다.
"그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게 가장 크나큰 문제야. 사과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괜스레 불안해지고 막 그래서... 무지 바보 같은 소린 거 나도 알지만, 그게 내겐 일종의 반사 신경 비슷한 게 되고 말았지.. 왜냐고? 난 바보니까. 이제 네가 나보다 낫다는 걸 왜 내가 순순히 인정했는지 이해가 돼지?"
"그렇다고 제가 더 똑똑해진 것 같진 않은걸요.. 게다가 전 캐이댄스 언니가 따라오는 것도 제대로 못 따돌렸다구요.. 이렇게 일을 엉망진창으로 하는데..."
"아냐. 신경 쓸 거 없어. 오히려 캐이댄스를 만나게 돼서 좋았으니까. 같이 이야기를 해보고 서로 사과하고 나니까 가슴이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더라... 여전히 나한테 사과를 받아야 할 포니들이 꽤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트와와일라잇은 한숨을 쉬고 내 몸에 머리를 기댔다.
"언니랑 단 둘이 있는 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네요. 캐이댄스 언니는 제 마음도 몰라주고 따라와서는 계속 누구 사귀는 포니는 없냐고 계속 귀찮게 굴지 뭐에요.."
"아. 하나 생각났다. 애플잭이라고 내가 아는 포니가 한 기 있는데, 걔 오빠가 진짜 잘생겼거든? 만나고 싶으면 말만 하라구~"
내 농담에 트와일라잇이 날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언니마저도 그러지 마요. 캐이댄스 언니가 그러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저번엔 블루블러드 왕자한테 나를 소개시켜 주더라구요. 사실 꽤 잘생긴 포니긴 한데, 저랑 맞는 부분은 하나도 없어서 그냥 만나다 말았어요."
"블루블러드? 하..."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맞다. 기억난다. 그놈은 얼굴만 잘생겼을 뿐이지, 그걸 제외하면 꽤 짜증나는 작자거든? 나랑 만났을 땐 자기 가문 자랑만 쭉 늘어놓더니 내가 고아원 출신인 걸 알자마자 날 대놓고 무시하더라고. 나 참, 열 받아서 그 새끼에게 확 불을 싸질러 버렸는데, 다른 포니에게 불을 붙여도 셀레스티아가 대놓고 뭐라고 한 적이 없는 포니는 그 놈이 유일하더라."
"잠깐, 그 이야기는 그 전에도 여러 번 포니에게 불을 붙여봤다는 이야기에요?"
"내가 마녀인 거 너도 뻔히 알면서 왜 그래?"
트와일라잇은 또 한 번 한숨을 쉬더니, 자기 고개를 나한테 더 기댔다....혹시 내 이야길 듣고 기분이 상한 건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근데 언니.. 전에 언니는 분명 전에 있었던 일에 거의 셀레스티아 공주님 탓을 하셨었죠? 공주님이 언니에게 바라는 것을 명확하게 일러주시지 않았었다구요."
트와일라잇은 초초하게 앞발로 자기 앞의 땅을 파고, 꼬리를 한번 세게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잠자코 트와일라잇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오늘은 전부 언니 탓이라고 하시던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 거기에 대해선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될지..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어께를 으쓱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전에 내가 내 친구 얼룩말로부터 주술사 수업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었지?"
트와일라잇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영적 체험이라는 걸 해본 적이 있었거든. 얼룩말들의 언어로 부르는 말이 따로 있는데 까먹었네.. 어쨌든 거기서 내가 본 게.."
여전히 내 모습을 한 그 악마만 생각하면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 내면의 모습이 최악이었는지를 봤어. 그것뿐이야."
"언니는 최악이 아닌걸요!"
트와일라잇이 내 목에 얼굴을 부볐다. 가..갑자기 얼굴에 열이 화끈 오르네.. 너무 포니들에게 다가가면 부담스러워한다고 나중에 가르쳐 줘야겠다. 아니면 캐이댄스에게 귀띔을 넣어주던가.
"트와일라잇. 저번에 너랑 나랑 처음으로 만났을 때 난 사실 바짝 쫄아있었지만, 애써 그러지 않은 척 애써 나를 속였어. 내 고집 때문에 눈앞에 있는 진실을 외면하는 게 내 성격 중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고 이미 고치지 못할 정도로 중증이 되었지.. 그래. 셀레스티아랑 그 일이 있었을 때도 셀레스티아가 날 믿지 않아서 그런다고 제멋대로 날 속였어. 물론 셀레스티아는 절대 그러지 않을 테고, 내가 그걸 받을 가치가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지. 썅.. 근데 깃털독감을 심하게 앎을 때 그 꿈을 꾸고 나서..."
나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아니 그냥 꿈 이야기는 신경쓰지 마."
"무슨 꿈이길래 그래요?"
트와일라잇은 아주 궁금한 눈치였다.
"중요한 거 아냐. 바보 같은 꿈이었으니까. 그냥... 그냥 그게 내 잘못도 컸었다는 걸 일깨워주는 꿈이었어.. 아니... 셀레스티아와 나 쌍방 간에 서로 실수를 한 게 많다는 걸 일깨워줬다는 게 적절할려나.."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트와일라잇을 내려다보았다.
"셀레스티아가 이번에는 주의를 바짝 기울인 모양인가본데... 새로 수제자로 들어온 너는 확실히 나보다 더 나으니까 말이야."
"아니.. 아니에요.. 전 긴장할 때마다 하는 일을 망치는걸요.... 제가 목록들을 길게 만드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뭘 할 때마다 그게 제 긴장을 푸는 유일한 방법이여서 그래요. 언니는 언니가 최악이라고 하지만, 제 눈에는 언니는 언제나 똑똑하고, 경험 많고, 늘 자신감이 넘치는 그런 포니인걸요.."
나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트와일라잇이 내 목에 얼굴을 푹 묻는 바람에 내 말은 쏙 들어갔다.
"그래서 언니가 절 더 가르쳐줬으면.. 그리고 쭉 친한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아니면....그것보다..."
트와일라잇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는 코를 살짝 훌쩍였다.
".....꼭 캔털롯으로 안 돌아오셔도 괜찮아요. 제가 직접 찾아가도 상관 없으니까.."
"..그래. 쭉 친한 친구로 지내자. 알았지?"
나는 트와일라잇이 긴장감에 지쳐 제풀에 쓰러지기 전에 몸을 부축해 안아주었다.
"약속할게."
트와일라잇도 날 꼭 껴안았다. 우리는 잠시 그렇게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트와일라잇의 긴장도 살짝 풀린 것 같았다. 트와일라잇은 한숨을 쉬며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음.. 이렇게 단 둘이서 있으니 하는 말인데요.. 어.... 언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어요. 너무 개마적인 이야기라 캐이댄스 언니가 있을 땐 차마 못 물어본 건데..."
"그럼 당장 물어봐. 지금쯤이면 아마 캐이댄스도 마을 포니들이랑 볼장 다 봤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그러니까 여러 번 숙고해보고, 여러 가지 연구 문헌들을 찾아보고.. 그... 캐이댄스 언니에게도 약간 물어보고 나서 내린 결정인데요.. 아.. 걱정 마세요. 제가 표면적으로 던진 질문만으로는 캐이댄스 언니는 제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예측하기 힘들-"
"서문은 그쯤 해둬 트와일라잇."
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뿔에 약간 뻐근한 기분이 드는 것 때문이라면, 그건 뿔의 핵이 더 많은 마력을 사용하는데 익숙해지는 과정이니까 오히려 더 바람직-"
"뿔 이야기가 아니라고요! 물론 뿔에 좀 뻐근한 느낌이 든 적은 있긴 하지만, 그 문제는 차라리 의사한테 상의하고 말죠! 굳이 캐이댄스 언니에게 상담하거나 여러 가지 상담서를 읽어본 이유는 제가 최근 느끼고 있는 이상한 감정 때문인데요.. 저기...... 언니는 절............."
트와일라잇은 심호흡을 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위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캐이댄스가 우리 위의 나무에 앉아있었다. 여우 비슷한 웃음을 얼굴에 만연하게 짓고 말이다.
"아! 난 그냥 신경쓰지 마! 그림 좋네. 계속해. 왜 다들 딱 좋은 순간에 끊어버리는 거람?"
트와일라잇과 나는 재빨리 포옹을 풀었다. 캐이댄스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야..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트와일라잇은 의외의 출현에 허겁지겁 제 정신을 추스르라 바빴으므로, 내가 대신 질문을 던졌다.
"방금 왔는데? 끼어들기 애매한 상황을 만든 게 애초에 누군데..."
캐이댄스가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내가 적당한 코스라도 알려줄까? 마침 근처에 멋진 곳을 내가 알고 있거든. 음료 값도 내가 내 줄게. 걱정 마. 방해꾼은 금방 사라져 줄 테니까. 단 둘이 있을 시간은 충분히 내드리지요~"
트와일라잇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아...아니.. 중요한 건 절대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요. 저기 언니. 선셋 언니 성에 같이 한번 안 가보실래요?"
트와일라잇이 뻣뻣한 미소를 지었다. 식은땀이 트와일라잇의 목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야기의 화제를 돌리고 싶어 하는 게 확실해보였다. 아마도 이 주제로 트와일라잇과 이야기를 하려면 다음을 기약해야 될 것 같았다. 물론 캐이댄스가 우리를 향해 두 눈을 부라리고 있지 않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래. 갈 곳 없으면 거기나 같이 갈래? 자고 갈 생각이야? 근데 멀쩡한 침대가 두 개 밖에 없으니 만약-"
"상관없어요!"
트와일라잇의 말이었다.
"캐이댄스 언니는 공주님이니까 손님 방 혼자 쓰게 하시면 되겠고요. 저랑 언니는.. 음... 다른 방법을 한번 찾아보죠 뭐..."
"...그러지 뭐.."
나는 어께를 으쓱 했다.
"잘 됐다. 거기서 내게 마법 쓰는 법 좀 가르쳐 줄 수 있지?"
캐이댄스가 끼어들었다.
"차라리 트와일라잇을 더 도와주고 말지. 우리 둘을 합친 것보다 마력양도 많은 포니가 대체 뭐가 아쉽다고.."
나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셀레스티아가 너한테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지는 않았을 거 아냐."
"아냐!.. 여전히 난 그냥저냥 보통 포니 수준인걸.."
"까고 있네.. 그게 그렇게 억울하면 그동안 마법 공부할 생각 말고 대체 뭘 공부한 거야? 성교육?"
"선셋!"
캐이댄스는 약간 낯빛을 붉히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말이 되네요.."
트와일라잇이 무언가를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캐이댄스 언니랑 오빠가 같이 방에 들어갈 때마다 무슨 이상한 소리가 날 때가 있는데, 아빠가 설명하길 캐이댄스 언니가 오빠에게 성교육을 해주고 있어서 그런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그랬구나.. 하긴 경비병으로 들어가려면 왕성 구조같은건 잘 알아야 되는 거니까... 근데 그런다고 쳐도 그 희한한 신음소리는 대체..."
나는 폭소를 터트리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캐이댄스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그래. 오늘은 내 처음 예상만큼 최악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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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키 파이인 줄 알았죠?
안됐네! 캐이댄스였습니다!
이 평행 세계의 선셋은 원래 세계의 인간들이 살고있는 평행세계로 도주하는데 성공한 선셋보다 개심이 더 빠르군요. 원래 세상의 선셋보다 몇 년 더 앞서게 된 듯 합니다. 물론 평생 갈 흉터를 얻은 것과, 다리 한쪽이 반불구가 되는 등 고생은 더 죽어라 했지만...
사실 어제 올릴 수도 있었지만, 갑자기 넷북이 다운되는 바람에 열 문단을 날려버려서 멘붕한 나머지 몇시간을 블러드본 하는데 소비했다는 슬픈 사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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