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지루한 꿈을 꾼다. 나는 꿈에서 홀로 텅빈 지하철을 타고 있다. 가로등도 꺼진 어두운 밤 지하철은 쉴새없이 덜컹거리며 부드럽게 진동하고 나는 앉지도 않고 서서 창밖을 바라본다. 창 밖으론 언젠가 한 번쯤 봤을법한 풍경이 지나가지만 어딘지는 모른다.
지하철을 꿈에서 꼭 한 번 멈춘다. 우습게도 꿈에 나오는 지하철역은 4호선의 그것이다.
어젯밤엔 성신여대입구역에서 내렸다. 나는 분명히 그 역이 지하에 있는 역인것을 알고 있지만 꿈에선 지상에 있는 역으로, 허허벌판에 조잡한 역사가 성신여대입구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지하철이 멈추면 나는 겁도 없이 내려 역 내를 한바퀴 돌아보고, 내가 탈 때 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지하철로 돌아가 탄다. 꿈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건지 알 수가 없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며 가벼운 멀미를 일으키는 지하철과, 냉기서린 은회색의 지하철 내부. 나는 조용히 손잡이를 잡고 서서 창밖을 내다본다.
어제는 수유역이었다. 맨 처음 내렸던 역은 아마도 노원역이었을 것이다. 혹시 이 꿈이 무언가를 예지하는게 아닌가 싶어 꿈을 꾼 다음날 꿈에서 나왔던 역을 찾아간적도 있다. 하루종일 역에서 배회했으나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어지는 꿈을 꿨다는 사람들은 놀라운 경험을 겪었다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꿈에서 나왔던 숫자들이 알고보니 로또 당첨번호였다고 한다던가, 꿈에서 했던 대로 따라서 했더니 나쁜일을 피했다던가. 그러나 나는 그저 지루하게 지하철을 타고 갈 뿐이다. 잠을 잘때마다 지하철을 타니 웬만해선 지하철을 기피하게 된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워 잠이 들기를 기다릴때면, 그 꿈의 끝에 뭔가 엄청난 것이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슬며시 눈이 감기고, 의식이 가물가물하게 멀어질때면 저 멀리서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지하철 의자와 손잡이, 기둥이 보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오늘밤 지하철을 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영원히 지하철에서 내릴수 없을지도 모른다던가. 꿈을 꾸기 시작한지 한 달을 좀 넘겼을 것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퇴근이 조금 늦어졌고, 버스에서 조금 일찍 내려 평소보다 조금 더 걸었다. 그리고 집 앞에서 도어락 키패드에 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엄청나게 강한 충격이 후두부에 가해졌다. 뒤통수였는지 정수리였는지 세세한건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내 머리가 반쯤 박살이 날만큼의 충격이었고, 나는 지금 이 어두운 창고 안에서 뒷통수에서 시꺼먼 피를 줄줄 흘리며 일어났다는거다. 창고가 차라리 넓기라도 했으면. 내가 간신히 눈을 떴을땐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어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달조차 붉게 보인다. 교실, 중학교 교실만한 크기의 창고. 그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내 뒷통수를 때리고 엎어놨는지 코와 입은 피와 먼지로 꽉 막혀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저릿저릿한 손으로 간신히 입안에서 먼지와 핏덩이, 온갖 오물을 긁어냈다. 코를 팽 하고 풀자 어둠속에서 짙은 냄새가 뇌속으로 빨려들어왔다. 이런 장소에 어울리는 냄새라면 시체 썩는 냄새라던가 피 냄새라던가 하는 것들이 나야 할테지만 여긴 아무런 특징있는 냄새가 나질 않는다. 그저 짙고, 아주 무겁고, 눅눅하게 습기가 들어찬 냄새가 난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주변의 형체가 분간되기 시작한다. 위협적인 '무기'들. 곡괭이, 삽 같은 것들도 보이고,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수없는 포대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눈물은 나지 않는다. 나는 아마도 이미 피를 많이 흘렸을 것이고. 공포에 앞서 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심장을 쥐어짠다. 망가진 인형처럼 아무렇게나 던저져 있던터라 온몸의 관절이 뻐근하고 근육이 뻣뻣하다. 이 창고 바깥엔 무엇이 있을까. 나는 그걸 창고 문을 활짝 연 뒤에야 걱정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창고는 허허벌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엔 공장도 없고, 저 멀리 어딘가에 가로등켜진 인가가 언뜻 보일 뿐이다. 나는 혹시나 누군가 나를 공격할까 싶어 삽을 짊어지고 나왔지만 아무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하지. 무턱대고 인가로 갈수는 없다. 나를 잡아온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니라고 단정지을수 없기 때문이다. 주변엔 온통 산뿐이다. 우리집 뒤에도 산이 있지만 전혀 낯선 산이다.
무거운 다리를 끌고 차 바퀴자국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길 양옆으론 논두렁이 펼쳐지지만 사람도 도둑고양이도 하나 보이질 않고, 벌레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불규칙적으로 깜빡이는 가로등만 길을 밝힌다. 뒤통수에서 흘러내린 피로 목덜미가 불쾌하게 끈적거린다. 나는 틈틈히 뒤통수를 훑어 피를 닦아내 옷에 문지른다. 그리고 저 앞에서, 단 하나 있는 표지판에 오이도 역이 머지 않았다고 쓰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이도 역이라니! 누군지 모를 작자는 나를 서울의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싣고 달려온 것이다. 지금이 몇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하철역에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삽을 질질 끌면서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바삐 옮긴다. 뒤통수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진다. 지하철역에서 사람을 만나면 아마도 병원보다 먼저 경찰서로 끌려갈지도 모른다.
한참을 걸어도 지하철역은 가까워지지 않는다. 나는 새삼 지난밤 꿈에서 내가 내렸던 역이 어디였는지 떠올려보려고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낯설어 입에 익지 않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꿈에서 오랜시간 지하철을 타고 왔던 건 기억하는데.......
그 순간 멀리서 지하철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가느다랗게, 마치 한숨소리처럼. 이곳의 지하철역도 지상역이다. 마지막 역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지하철은 저 멀리에서 달려와 지하철 역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설마 마지막 열차는 아니겠지? 나는 애써 지하철을 들여다보려고 했지만 지하철은 3,4층 높이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내린다. 나는 똑똑히 내가 지하철에서 내리는 것을 봤다. 아니 보고 있다. 내가 내린다. 어두운 역사에 환하게 빛나는 지하철 문이 열리고, 잠옷 차림의 내가 내려 멍하니 역 내를 둘러본다. 나는 단 한 번도 나를 제 3자의 시선으로 본적이 없지만 저 단 한 명의 승객이 나라는 것을 알아볼수 있다. 나는 갑자기 쌩쌩해져서 지하철역으로 달려가 계단을 뛰어올라 승강장으로 들어선다. 지하철에서 내렸던 또다른 '나'는 온데간데 없다. 나는 뒤늦게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죽는다는 도플갱어 괴담을 떠올랐지만 어두운 역안은 조용하고, 아무도 없고, 그저 지하철 문만 활짝 열려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혹시 누가 나를 뒤쫓아오진 않았나 하고 돌아보지만 아무도 없다. 만약 내가 타는 순간 지하철이 무너져내리며 꿈 속의 어느 수렁으로 가라앉으면 어떡하지?
하지만 내가 조심스럽게 지하철 열차에 발을 내딛어도 지하철은 미동이 없다. 나는 숨을 멈추고 지하철에 오른다. 지하철은 내가 타서 자리에 앉자 문을 닫고, 온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꿈에서 지하철을 타면 창밖을 내다봤지만 이번엔 볼수가 없다. 만약 창밖에서 또다른 내가 달려오고 있는 걸 본다면 난 이자리에서 다신 일어설 수 없을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인채 누군가 나를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린다. 등 뒤로 찐득한 피가 흐른다. 아주 잠깐, 내가 이 지하철을 탄 오이도 역에는 개찰구가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내지만 나는 애써 잊으려고 노력한다.
그 뒤론 늘 있을법한 일이 일어났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나를 발견하고, 나는 그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님에 기뻐했다. 병원에서 이런저런 치료를 하고 경찰들은 몇번이고 찾아와 나에게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하지만 나는 똑같은 말을 반복할수밖에 없다. 누군가 집앞에서 내 머리를 후려쳤고, 눈을 떠보니 어느 작은 창고 안이었으며 나는 한참을 걸어 오이도역에 도착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그 역엔 개찰구가 없었다고. 경찰들은 서로 옥신각신 싸우고 나한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달라는 시민단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하기만 할 뿐 별다른 재밌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돌아온 이후, 내 발 근처를 느리게 기어다니는 여자가 내가 그 일에 관해 이야기 할때면 고개를 들고 내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었다. 그 눈, 흰자가 샛노랗게 물든 눈이 피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옆으로 찢어져 마치 설법을 듣는 것처럼 차분히 나를 바라보는데, 나는 차마 거기서 또다른 나를 봤다고 할 수가 없다. 여자는 내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걸 기다리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를 마치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내 발치를 느리게 기어다닌다.
기어다니는 여자뿐 아니라 온 세상 천지에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을 본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미쳤거나, 꿈에서 지하철을 타기 시작하면서 미쳤거나, 혹은 처음부터 미쳤다가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게 분명하다. 남자의 하반신이 방 벽을 타고 달리며 타다다다닥하는 소리를 내고 길가엔 수천 수만개의 손이 제각각 손가락으로 걸어다닌다. 다른 살아있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건가? 나는 몇번이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내가 운을 띄우면 그 모든 것들이 동작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기 때문에 나는 입을 열수가 없다.
그저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는 말을 할 뿐.
집 앞에 내가 흘렸던 핏자국이 날이 갈수록 흐릿해진다. 나는 며칠이나 그 핏자국을 밟고 다니다가, 공구상자에서 망치를 꺼내 그 핏자국을 두들겨 시멘트 바닥을 깨는 순간 지하철에서 내렸던 또다른 나를 떠올렸다. 잠에 취한건지 아님 뭔가에 홀린건지 멍한 눈으로 지하철을 내리던 나를.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 혹시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이 아닐까. 만약 그녀가 꿈을 꾸던 나라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반쯤 죽은 세상이 혹시 내 꿈 속이 아닐까. 망치는 꽝, 꽝, 하며 시멘트 바닥을 부수고, 나는 게속해서 바닥을 파고들어간다. 나는 이제 깨어나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