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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달린 포니들은 끼리끼리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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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마음을 편하게 비워 보게, 영혼 인도 받으려면 그래야 하네."
제코라가 가부좌를 튼 채로 말했다.
나는 제코라를 따라 가부좌를 취했다. 뒷다리를 어정쩡하게 겹쳐서 앉는 게 영 불편했지만, 뭐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반 불구가 된 앞다리에서 오는 통증도 감당하면서 살고 있는데 뭐..
제코라의 집에서 나는 기묘한 향기는 오히려 내게는 집과 같은 마음의 안정을 주었으므로, 마음을 편하게 먹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마음을 비우는 게 문제였지.
아참. 트와일라잇은 캔털롯으로 돌아갔다. 트와일라잇이 돌아가고 나서 나는 혹시나 그때 내가 잠깐 보여준 성질머리 때문에 우리 관계에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닐지 영 걱정스러웠고, 제코라에게 이런 초조함을 달래려면 무슨 일을 하는 게 좋을지 조언을 구했다. 그랬더니 제코라는 나한테 '영적 체험'을 권했다. 다른 자들이 보는 시점으로 자기 자신을 관찰할 수가 있어서, 자기 성격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나 뭐라나..
"마음을 비운다 라..."
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제코라가 준 약을 마시고 났더니 모든 게 다 노곤해졌다. 따뜻하고 힘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주변 모든 것들이 다 물결처럼 울렁거리고 있었다. 스미스 할머니의 위스키를 마셨을 때만큼 뒤끝이 심할 것 같았다.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제코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깨달음과 꿈의 세계로 가는 길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나는 무의식으로 빠져들었고, 순간 내 주변의 모든 게 마치 허상처럼 잔상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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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마치 영원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갑자기 주변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흰색 대리석, 금색 장식, 우아하게 설계된 창문들....
그래.. 난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꿈속에서처럼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여기는 바로 캔털롯이였다.
순간 이유 모를 공포심이 나를 사로잡았다. 창밖을 보니 먹구름이 갑자기 하늘을 감쌌고 태양을 가렸다.
여기에서 나는 무단 침입자였다.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 나는 도망자였다. 셀레스티아가 나를 쫓아냈으니까. 여기는 이제 내 집이 아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뒤에서 갑자기 열기가 쏟아졌다. 가열된 오븐에 몸을 들이민 기분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선셋, 왜 그래? 내가 그렇게 싫어?~"
그건 나였다.
절대로 나였다. 저 모습이 얼마나 흉악하던 간에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괴물은 셀레스티아 정도의 크기에 새빨간 털가죽을 지녔다. 흰자위는 칠흑같이 새까맸다. 갈기와 꼬리 둘 다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커다란 박쥐 날개를 달고 있었다. 내가 언제나 바라던 나의 모습을 매우 어둡게 왜곡시키면 아마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그건 나였다.
절대로 나였다. 저 모습이 얼마나 흉악하던 간에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괴물은 셀레스티아 정도의 크기에 새빨간 털가죽을 지녔다. 흰자위는 칠흑같이 새까맸다. 갈기와 꼬리 둘 다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커다란 박쥐 날개를 달고 있었다. 내가 언제나 바라던 나의 모습을 매우 어둡게 왜곡시키면 아마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제..제코라가 이런 게 나온다는 말은 안 해줬는데!"
나는 말을 더듬으며 뒤로 물러섰다. 당초에 난 새나 거북이 따위가 나와서 무슨 우정은 마법이라느니, 산불을 막는 법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애매한 예언처럼 일러주는 걸 예상했었다. 절대 악마와 같은 모습의 또 다른 내 자신을 만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녀석은 점점 더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전에도 이런 악몽을 꾼 적이 있다. 그 꿈속에서 나는 무력했고 도망 칠 수도, 숨을 수도 없었다. 내 발굽은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고, 내 사지도 말을 듣지 않았다.
"분명 제코라가 내면의 영혼의 인도를 받게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내가 긴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네 내면이 딱 지금 내 모습이거든 선셋? 아 맞다, 무시무시한 그림자 포니라고 불러 줘야 되려나?"
녀석은 낄낄대더니 말을 이었다.
"포니들이 널 떠받들길 원하지? 아니, 널 볼 때마다 공포에 떨길 원한다는 게 적절하겠군. 탁월한 발상이야. 공포만큼 남들에게 경외감을 심기 쉬운 방법은 없으니까!"
"아니야! 그... 그럴리가!"
나는 초라하게 벌벌 떨면서 겨우 목소리를 짜내 외쳤다.
"핏! 거짓말쟁이.."
악마는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악마의 뜨거운 열기가 내 몸에 생생히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화염이나 열에는 면역이었다. 심지어 그 셀레스티아라도 나한테 불을 붙이려면 엄청 고생해야 될 정도의 수준이었단 말이다!
"내..내가 너 같은 괴물인줄 알아?!"
나는 악마를 노려보았다. 내 얼굴에 자꾸 떠오르려는 공포를 애써 숨겼다.
"그럼 왜 다른 포니들에게 자꾸 너를 나쁜 포니라고 소개하고 다니는 건데?"
악마가 내 얼굴에 대고 말했다. 지독한 유황냄새가 내 코를 괴롭혔다.
"인정해. 너도 결국엔 이렇게 되고 싶은 거잖아. 네가 자부하는 그 힘을 너도 마음껏 부려보고 싶지? 응? 힘을 쓰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 줄 알아? 네 앞길을 모든 걸 다 박살내는 데에 쓰는 거지! 그럼 모든 포니들이 겁에 질려 알아서 네 발굽 아래 고개를 조아릴 테고! 자.. 인정해! 인정하라고!"
"아니야!!!!!"
악마의 두 발굽이 내 목덜미에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발굽의 모서리가 내 목가죽을 뚫고 들어왔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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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게!"
제코라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내 눈앞에 있었던 악마는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벌벌 떨기 시작하기에 깨웠네
무엇을 본 건지 당장 말해주게."
"그게... 내 모습을 봤어... 그럼 가볼게."
나는 일어서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제코라가 날 부축해주었다.
"그게 어째서 무서웠던가?
설명을 좀 하지 않겠나?"
"아니."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잠시.. 혼자 있고 싶어.."
나는 훌쩍거리며 잠시 입을 닫았다.
"제코라... 나 진짜..."
제코라는 내가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됐어, 그냥 말 안 할래. 성으로 돌아가야겠어."
"...선셋, 조심하게 부디
충격이 꽤나 심한 것 같으니.."
"걱정 마.. 금방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아마도..."
나는 오두막을 나섰다. 제코라를 차마 돌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제코라에게 도움을 청했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구제 불능인건가? 그 괴물 같은게.. 진정한 나의 모습일까? 다른 포니들은 나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는 건가? 그 악마가 그 때 트와일라잇이 내게서 본 모습이었나?
나는 내심 그 악마가 날 두려워하길 바랐다. 그런 식으로 타락해버린 그 녀석보다야 내가 더 나은 존재라는 이야기를 녀석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자기는 그저 내 자리를 차지하러 온 굴러온 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트와일라잇처럼 말이다.
물론 내가 트와일라잇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건 아니다. 내가 트와일라잇의 공부를 도와줬을 때, 나는 캔털롯에 다시 돌아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전에 캔털롯에 있었을 때, 내는 어려운 줄곧 시험을 통과하고 주변의 찬사를 받았었다. 나 혼자 오롯이 세상의 정상에 서서 아래를 내려 보는 기분이었다. 트와일라잇도 나와 같았다. 똑같이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고, 똑같은 주문들을 배우고, 똑같은 질문들을 하면서...
트와일라잇은 배우는 게 빨랐고, 나도 그게 대견했다.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예전의 내가 연상되었으니까. 트와일라잇이 기뻐하면 나도 덩달아 기뻤다. 하지만 언젠가 셀레스티아가 트와일라잇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트와일라잇이 직접 내게 말을 해 준 이후로, 난 더 이상 순수하게 트와일라잇의 성장을 기뻐할 수가 없었다. 셀레스티아가 나도 아닌 그 다른 누군가를 자랑으로 여긴다니.. 게다가 트와일라잇에게 들은 바로는 셀레스티아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그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난 애초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눈에서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만티코어나 키메라가 좀 나와 줬으면 좋겠다. 나오면 그냥 순순히 잡아먹혀줄 생각이었을 정도로 나는 삶의 의욕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하던 만티코어나 키메라 대신 갑자기 웬 푸른 덩어리가.. 좀 더 정확히는 푸른 털가죽의 포니 한기가 무지갯빛 잔상을 달고 맹렬한 속도로 나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피할 사이도 없이, 그 포니의 당황한 얼굴과 내 얼굴은 정면으로 충돌했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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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악몽을 또 한 번 꾸지도 않았고, 의식을 잃었을 때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히지도 않은 것이다. 평소의 에버프리 숲을 생각해볼 때 그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더디게 움직였다간 곳 잡아먹히는 곳이 에버프리 숲인데도 말이다.
나는 머리를 문질렀다. 혹이 나 있었지만, 다행히 피가 나지는 않았다. 나는 나랑 부딪힌 포니는 어디에 있는지 찾기 위해 주변을 두런거렸다.
"으으으.. 어지러워..."
높고 살짝 째지는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그곳을 노려보았다. 하늘색의 페가수스가 어지럽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나보다 더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그 페가수스는 휘양찬란하다고밖엔 할 수 없는 색의 갈기와 꼬리를 달고 있었다. 애플잭네 농장의 번쩍사과가 딱 저런 색깔 이였던가..
"나랑 머릴 부딪혔으니까 당연히 어지럽지 이 등신아!"
나는 버럭 외치고는 마력으로 페가수스를 집어 들었다. 페가수스는 아등바등 발버둥을 쳤다.
"어지럽기는 원래부터 어지러웠거든!?... 내가 병에만 안 걸렸어도 애초에 댁이랑 박을 일도 없었단 말씀야!"
페가수스는 코를 훌쩍이며 기침을 했다. 진짜로 아픈 건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아직 가지 않았다.
"아플 때 연습해도 이 몸은 끄떡없으려니 했는데... 생각을 잘못했네. 내가.."
"단순하긴.."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마력으로 잡고 있던 페가수스를 살짝 흔들었다.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니 제법 재미있었다.
"잠깐.. 저.. 저거!"
내 모습을 이제야 제대로 본 페가수스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당신 그림자 포니였어? 맞지! 핑키 파이가 침이 마르도록 말하던 그 그림자 포니 맞죠!?"
페가수스가 입이 째질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끝내준다! 쩌는 마법 하나만 보여줘요!"
"??...너 내가 안 무서워?"
나는 페가수스를 마력으로 거꾸로 들며 말했다.
"분명 걘 날 무서워하던데.."
"엥? 진짜요? 그럴 리가.... 아! 계속 언니 앞에서 도망가는 것 때문에 단단히 착각하셨구나.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언니가 그걸 좋아하는 것 같길래 걔도 장단을 맞춰준거란 말야."
"내가 좋아해서.. 장단을 맞춰준 거라고?"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진짜 다른 포니들이 내 앞에서 도망가는 걸 즐겼었나?
"네! 걔 말로는 언니 진짜 멋있다던데요? 도망가는 건 무슨 언니랑 하는 게임 비슷한 거라던데.."
"그래?..."
나는 수줍게 웃었다.
"걔도 생각보다 멋진 얘였네. 다음에 핑키랑 만날 땐 날 보면 꼭 도망갈 필요는 없다고 전해줘. 나중에 내가 컵케익 하나 사준다고도 해 주고. 알았지?"
"에이 냅둬요. 삼시 세끼보다 단 걸 더 많이 퍼먹는 얜데."
말을 마치고 페가수스는 껄껄 웃다가 또 콜록콜록 심하게 기침을 했다. 진짜로 아픈 모양이군...
"내가 집에 데려다줄까 꼬마야?"
마을 쪽으로 걸어가며 나는 말했다.
"꼬마라니! 엄연히 레인보우 대쉬라는 이름이 있는데!"
병에 걸린 데다가 거꾸로 뒤집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꼬마는 가슴을 꿋꿋이 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생명체가 누군 줄 알아요? 바로 나에요!"
"날 거의 죽일 정도로 빠르긴 했지 꼬마야. 어쨌든 망아지 혼자 여기 있는 건 위험하니까, 내가 데리고 나가줄게."
"망아지 아니거든요! 15살이나 먹은 데다가 독립해서 제 집까지 있다고요! 콜록! 콜록!"
"쌘 척은.. 언니가 코라도 흥 하고 풀어주리?"
제코라에게 대려가볼까? 그럼 이 꼬마에게 약을 처방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꼬마가 약이 필요할 정도로 증상이 심각해보이지는 않았다. 대쉬는 지금 가벼운 감기에 걸린 것처럼 보이니 그냥 집에 들여보내 재우는 게 아무래도 나을 것이다.
"근데 저.... 구름집에 살거든요.... 언니는 아마 못 올라갈 텐데.."
"어이구.."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 근처 흰색꼬리 숲에 내 친구가 사는데 수의사 비슷한 일을 하는 친구걸랑요? 보통 동물들을 돌보는데 간혹 포니들을 돌볼 때도 있어요. 제 집보단 거기가 가까우니 그쪽으로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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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포니나 에버프리 숲이 어디서 끝나고, 흰색꼬리 숲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대충 어림짐작은 할 수 있을 것이나, 정확히 지도의 어디쯤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는 힘들 것이다. 마치 강과 협곡의 경계를 딱 나누기가 애매하듯 말이다.
에버프리 숲이 끝나는 부분은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마력이 더 이상 감지되지 않는 부분을 기점으로 잡으면 될 것이다. 어스 포니는 땅의 차이점으로 이 사실을 감지할 테고, 페가수스는 공기의 흐름으로 이를 감지할 것이며, 나 같은 경우엔... 그래.. 안개 속을 들어왔다 나오는 기분이라고 설명하면 편할 것이다. 안개를 나오면 시야가 트이는 것처럼, 내 안의 마력도 숲을 나오는 순간부터 더 잘 집중이 됐던 것이다.
흰색꼬리 숲은 고요하고 평온한 곳이었지만, 난 어쩐지 노출되어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무 사이의 간격이 너무 넓어 햇볕이 숲 안까지 내리쬐었었고, 숨을 수 있는 수풀이나 그림자도 없었다. 점술 마법을 교란시켜줄 마력 실린 안개도 없었다.
하긴 이젠 추적 마법을 걱정할 필요도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셀레스티아가 진심으로 날 찾기를 원했다면 벌써 찾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등 뒤에서 대쉬가 재채기와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이 아주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현기증이 있는 것 같길래 그냥 내가 업고 가기로 했던 것이다.
"여기 있는 나무들을 보아하니,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플러터샤이 집이 있겠네요. 어.. 거기 가기 전에 그 음침하게 생긴 망토부터 좀 벗으면 안돼요? 개가 무서운 걸 좀 싫어하걸랑요.."
"....그러지 뭐.."
나는 망토를 벗어 잘 갠 다음에 등자 가방에 넣었다.
"우와.. 무슨 일 당한 거죠?"
대쉬가 대놓고 내 흉터들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물었다.
"만티코어랑 1대1로 붙었거든. 하늘 나는 연습 좀 한 다음에."
"에이.. 유니콘이 어떻게 날아요?"
"직접 떨어져보니 알겠더라."
나는 웃으면서 반불구가 된 내 앞발을 흔들었다.
"말 나온 김에 부탁이 하나 있는데, 앞으로 비행 연습을 할 거면 에버프리 숲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하면 안 될까? 이것보다 더 심한 꼴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대쉬의 친구는 꽤 아늑해 보이는 아담한 집에 살고 있었다. 마을로부터 꽤 떨어진 곳이라는 게 흠이었지만 말이다. 아 그리고 한 가지 흠이 또 하나 생각났는데, 현관문까지의 경사가 생각보다 좀 있었다는 거였다. 내가 대쉬를 등에 매고 있지만 않았어도 그냥 순간이동으로 편하게 갔을 텐데..
나는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몇 분간 아무 반응도 없었다.
"집에 없나.."
"걔가 낯을 좀 심하게 가려서요. 쿨럭!.. 쿨럭!"
레인보우 대쉬는 목소리를 조금 가다듬더니 문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플러터샤이! 나야! 문 열어!"
뒤에서 너무 작아 못 알아들을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삐걱 하고 열렸다. 웬 노란색 포니가 집 안에서 날 보더니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문을 세게 닫고 쏙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려도 너무 가리는걸."
나는 코웃음을 한 번 쳤다.
"저 내려주세요. 제가 다시 불러볼게요."
나는 어께를 으쓱 한 다음, 대쉬를 땅 위에 내려주었다. 대쉬는 플러터샤이의 집 문을 두드렸다.
"플러터샤이. 괜찮으니까 나와 봐! 그리고 나 몸이 좀 아파서 그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또 한 번 덜컹 열렸다. 노란색 페가수스가 놀란 눈을 하고 튀어나왔다.
"호..혹시 털갈이 옴이라도 온 거야?"
플러터샤이는 대쉬의 날개 한 쪽을 붙잡고 깃털 하나를 입으로 뽑아 이리 저리 훑어보았다.
"음... 털갈이 옴은 아닌 것 같고.. 호..혹시 대쉬야.. 너 또 번개구름가지고 그 짓 한 거야? 전에 내가 뇌전성 임질은 나도 못 고쳐준다고 분명 이야기 했었지? 전에도 병원 가서 화상 연고랑 항생제 받아오면서 부끄러운 일은 다 당했으면서.."
레인보우 대쉬는 재빨리 내 눈치를 살폈다. 얼굴이 엄청 새빨개져있었다.
"야! 샤이 너!"
레인보우 대쉬가 이를 악물면서 으르렁거렸다.
"그 이야기는 더 이상 안 하기로 했잖아!"
제 딴엔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거겠지만, 내 귀에는 다 들렸다.
"이게 다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플러터샤이의 변이었다.
"그냥 깃털독감이야.."
레인보우 대쉬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 나을 때까지 어디 좀 처박혀 있어야겠는데.. 아니, 실수로 안 처박힐만한 곳에 좀 누워있어야겠는데.. 진작 오늘 날다가 어디 한 번 처박혔거든.."
"그럼 깃털독감에 걸렸는데도 비행 연습을 했단 말이야?"
플러터샤이가 오만상을 쓰면서 대쉬를 타일렀다.
"어째서 그런 무모한 짓을 했어? 다치면 어쩌려구! 너 뿐만 아니라 다른 포니도 다칠 수 있잖아 그럼!"
"진작 한 기 다쳤지. 대쉬 쟤가 갑자기 나한테 꼬라박더라고.."
플러터샤이가 깜짝 놀란 소리를 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나한테로 다가와 저 가냘픈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위력으로 나를 끌어다가 내 몸에 나 있는 흉터들을 이리 저리 살폈다.
"도...동물에게 습격당해서 이렇게 된 거죠 지금? 그리고... 다리가..."
"몇 년 전에 좀 심하게 다쳐가지고는 말이야. 아직도 여기엔 힘을 주면 꽤 아프더라."
나는 어께를 으쓱거렸다. 좀 거지같긴 했지만, 어쨌든 이 반불구가 된 다리는 이제 평범한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최근 난 상처는 머리에 난 상처뿐이네요.. 대쉬가 그런 거죠?"
"바로 봤어."
나는 코웃음을 한번 쳤다.
"신경 안 써도 돼. 그냥 부딪힌 것뿐이니까."
"근데 저 다리... 말인데요... 저런 꼴인데도 진짜 별 상관없으신 건가요?"
플러터샤이가 내 반불구가 된 다리를 인상을 쓰며 보면서 말했다.
"다리 근육이 부분적으로 위축된 데다가... 뼈가 제대로 붙지도 않았는데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진짜 의사한테 가서 진료를 받을 수도 없었지 뭐.."
"당장 물리 치료 받으세요. 안 그랬다간 이거 진짜 평생 아플거라구요."
"네가 해 줄 수도 있지 않냐?"
대쉬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핑키가 그러더라. 저 그림자 포니 언니는 마을에 오는 걸 싫어한다― 어이구야! 이거 오늘은 아주 기록 급인걸! 쟨 왜 이럴 때만 속도가 빠른 건지 모르겠네."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망할... 플러터샤이! 나 무슨 무서운 마녀 같은 건 아니니까 안심해!... 쿨럭!"
내 가슴이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깃털독감 옮은 거 아니겠죠?"
대쉬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바보 같은 소리 마. 난 유니콘인데 어떻게 깃털독감에 걸리겠어?"
난 의사는 아니었지만, 최고의 얼룩말 부족 전통 의술사로부터 사사를 약간 받은 몸이다. 그 사실을 대쉬에게 말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최소한 내가 그런 헛된 말을 그대로 믿을 정도로 골이 비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주고는 싶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 옮기라도 했으면..."
플러터샤이가 문을 빼꼼히 열고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괜찮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나는 앞발굽을 절래 절래 흔들었다.
"만약 아프더라도, 충분히 혼자 약초가지고 뭐 만들어먹을 수 있어."
'차'를 약초에 포함시킨다면 말이지만.. 어차피 모든 병의 만병통치약은 몸을 따뜻이 하고 푹 자는 거 아닌가.
"저..저기.. 저한테 물리 치료를 받고 싶으시다면.. 음... 목요일 날 오시면 되겠네요. 그 날 제가 동물들에게 물리 치료를 해주거든요.."
내가 걔 면전에 큰 소리를 낼 거라고 예상했는지, 샤이는 나를 두려운 눈빛으로 올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샤이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 좋겠네.. 그리고 안심해. 나 그렇게 무서운 포니 아냐."
거짓말이었다. 나는 확실히 무서운 포니였으니까..
"근데 치료비는 별로 못 주겠네.. 생각 같아서는 많이 주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그건 진실이었다. 쪽팔린 사실이긴 했지만.
"아. 치료빈 주실 필요 없어요."
플러터샤이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여전히 문틈 너머로 날 보고 있었긴 했지만 말이다. 무슨 포니들을 바짝 경계하는 야생동물들을 대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다가가도 안전한 포니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그냥 다른 포니가 아픈 걸 보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구요."
"다른 동물들도 치료받는다고 했었지? 나도 동물들은 잘 보는데.."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잘 본다'라는 말을 '잘 보자마자 화염구로 박살을 낸다.'라는 의미로 한정시켜서 이야기한다면 말이지만.
"그럼 그때 나도 좀 도와줄까?"
플러터샤이는 긴 갈기로 자기 얼굴을 가리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께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목요일 보는 걸로 하자. 아 맞다. 대쉬, 만나서... 음.. 어쨌든 즐거웠고, 잡아먹히기 싫으면 다음번엔 에버프리 숲 위는 절대 날아다니지 마라. 알았지? 이번엔 운 좋은 줄 알아."
나는 둘에게 앞발굽을 흔들어주며 절뚝거리면서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갔다.
물리 치료라.. 괜찮은 생각이었다. 요사이 반불구가 된 쪽 다리가 예전보다 더 아파왔던 것이다. 저려오는 정도만으로도 비가 올 지 안 올지를 예측할 수 있었으니 말 다했지. 나는 언제나 애플잭네 가족을 내 가족처럼 여겼고, 그들의 여러 좋은 점을 닮고 싶었지만, 스미스 할머니의 극심한 관절통까지 닮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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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돌아올 때가 되서야, 난 깃털 독감에 대한 내 생각이 틀린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게 내게도 전염된 것이다.
증상은 지독했다. 몸이 무거웠고, 몸에서는 열이 나고 오한 또한 났다. 머리도 어질어질했다.
더 최악이었던 건 지독하게 깃털을 고르고 싶었다는 거다. 하지만 난 날개가 없었으므로, 그 대신으로 나는 쓰고 있던 깃털 팬을 앞니로 씹고 있었다. 그 바람에 얼굴에 잉크가 묻긴 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씹고 있던 깃털을 들어 일지를 두 번 두드렸다. 트와일라잇에게 문자를 보낼 마법 부여 주문식을 작동시키려는 것이다. 지금쯤 트와일라잇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직접 몸을 움직여 치료법을 찾아낼 기력도 없었을 뿐더러, 이곳의 책들은 죄다 족히 1000년은 묵은 것들이므로 치료법을 찾아낸다고 한들 지금 통용되는 치료법이라고 장담하기도 힘들었다. 마법에 관한 지식을 찾아내는 데는 더할 나위 없었지만, 약학에 관한 지식은? 글쎄...거머리랑 브랜디로 하는 치료법이나 안 찾아내면 다행이었다.
"트와일라잇. 나 지금 몸이 좀 안 좋아.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안 좋아. 유니콘이 깃털독감에 걸릴 수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겠어? 만약 늦게 이 문자를 보더라도 걱정 마. 그냥 방 따뜻하게 데우고 푹 자고 있을 테니까."
나는 난로에 불을 지피고 아궁이에 차를 넣고 덥혔다. 오한 때문에 나는 벌벌 떨기 시작했다. 어차피 화염 면역 이였으니 그냥 불 위에 누워있을까도 했지만, 굳이 재를 묻혀 털을 더럽히기는 싫었으므로 그만두었다.
"선셋 언니. 지금 바로 찾아볼게요. 찾아볼 때까지 몇 분 걸릴 것 같으니까 아직 자지 말고 있어보세요."
나는 방긋 웃었다. 트와일라잇이라면 분명 어디 안 나가고 공부하고 있을 줄 알았으니까. 어쩔 땐 나보다 더 안 나가는 것 같았다. 나야 뭐 황량한 성의 폐허에 살고 있어서 좀이 쑤실래야 안 쑤실 수가 없지만 말이다.
이제 책에서는 임시로 썼던 내 목소리 대신 트와일라잇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트와일라잇이 왔을 때 주문을 좀 손을 봤던 것이다. 덕분에 이젠 괜히 혼잣말하는 것 같아 뻘쭘하지 않았다.
나는 차를 한 잔 따라 홀짝 마시며 트와일라잇이 다시 연락해오기를 기다렸다.
"언니. 그거 깃털독감인거 확실해요?"
"오늘 만난 페가수스가 독감에 걸려있긴 했었지. 걔한테 옮았을걸 아마."
"강력한 마력을 지닌 유니콘들은 깃털 독감에 걸릴 수도 있데요. 마력이 강력할수록 다른 기제류 아종의 마법에 영향을 받을 확률이 높다던데요. '
트와일라잇이 썼다... 아니 말했다는 게 더 정확하겠군.
"깃털독감일 가능성이 충분해요. 증상을 보아하니.. 으아.. 이거 너무 다양한데요. 무지 심각하겠는데.."
"얼마나 심각한데?"
나는 차를 잔에 더 따르며 말했다.
"곧 이렇게 문자도 못 보내고 쓰러질 정도라는 거야, 아니면 그냥 누워서 며칠 지내기만 하면 될 정도라는 거야?"
"모르겠어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여전히 이 마법부여는 당사자의 감정까지 전달해주지는 못했지만, 트와일라잇이 지금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이라는 걸 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책을 좀 더 찾아봐야겠어요."
"트와일라잇.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뜨거운 차좀 마시고, 방 좀 데우고, 네가 전에 만들어놓은 케이크 좀 먹으면 금방 괜찮아질 테니까.."
상했을 걱정은 없었다. 셀레스티아가 전에 '이퀘스트리아 국립 케이크 저온 보관 위원회.'에서 개발해낸 주문을 나한테 가르쳐 주었던 덕에 케이크의 신선도는 충분히 보존할 수 있었다. 게다가 트와일라잇의 그것은 꽤 먹음직스러웠고 또한 맛있고 달콤하고 제법 찰지기까지 해서 트와일라잇이 떠난 게 아쉬워질 정도였다.
물론 케이크 말이다. 맛을 설명하다보니 약간 오해 살만한 표현이 있었는데 무슨 성적인 은유 같은 건 절대 아님을 알아주길 바란다. 나보다 한참 어린 애한테 내가 무슨 천벌을 받으려고!
"증세가 심각해지거나, 갈기가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하면 바로 저한테 연락해주세요. 비타민 C,O,D를 충분히 섭취하시구요. 책마다 뭘 섭취하라는지 다 다르게 나오긴 하지만, 상관 없을 것 같아요. 어차피 한꺼번에 다 먹는다 한들 부작용은 없는 것들이니까요."
"그럴게. 오늘은 좀 일찍 자야겠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연락할게."
'좀 일찍'이 아니었다. 아직 해도 채 지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나는 하품을 하고 남은 차를 마저 다 마셨다. 장작 몇 개를 난로에 던져 넣은 뒤, 이불을 덮고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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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탁상시계를 보았다. 천년이나 묵은 성의 폐허에 현대 문명의 이기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몇 시간 동안이나 몸을 뒤척이면서 자려고 했지만 잠에 도통 들 수가 없었다.
어찌저찌 반쯤 잠에 들었더니, 제코라의 약을 마시고 나서 본 그 환영.. 악마의 모습을 한 또 다른 나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내 시야 속에 아른거렸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여전히 그 악마가 보였다. 공황감에 휩싸여 나는 다시 두 눈을 번쩍 떴다.
피곤했다. 하지만 쉴 수가 없었다. 좌절감이 밀려왔다.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 정말 쉬고 싶었다. 끔찍한 추위와 밀려드는 오한을 아랑곳 안고, 아침에 일어나 조금 더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을 때 가지 정말 쉬고 싶었다.
또 타오르는 불길과 내 분신이 터트리는 광소(狂笑)의 소리를 나는 어렴풋이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저게 나라고 생각하기 싫었다. 분명 내가 전에 되고자 했던 모습과 유사하긴 하지만.... 아아.. 더 이상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나는 침대에 머리를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관절 마디마디가 다 안 쑤시는 곳이 없었고, 머리에 열이 오르는 바람에 머리가 괜히 간지러웠다. 무시했다. 말 그대로 긁어서 부스럼 날 일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밤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새벽이 되려면 아직 몇 시간 정도밖에 안 남았지만, 몇 세기나 지나야 새벽이 올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내 시간감각은 둔해져있었다.
그나마 악마의 모습을 한 또 다른 나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괴물을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미 땀은 철철 흘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헛것을 보고 들을 정도로 몸이 악화된 것 같았다. 아마 너무 피곤했던지, 열 때문에 그러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발굽 소리가 들렸다. 이것도 헛것이겠지. 난 여기 완전히 혼자였고 내가 여기 있는 건 오로지 트와일라잇밖에는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어떤 흰색과 금색을 띈 형태 하나가 눈에 보였다.
오한은 사라졌다. 곧 따뜻한 온기가 내 몸을 감쌌다.
"선셋..."
들은 지 오래됐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난 벌벌 떨며 몸을 웅크리고 숨으려고 했다. 설마 악마의 모습을 한 나보다 더 최악의 악몽이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셀레스티아와 목소리도 완전 똑같지 않은가.
"저리 가요..."
나는 두 앞발로 입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더 이상 날 신경 쓰지도 않으면서... 그냥 편하게 잠들게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트와일라잇이 네 걱정을 많이 하더구나.. 거의 내게 진실을 발설할 뻔 하다가 말았었지만, 그래도 난 다 알 수 있었지."
하얀 날개가 담요처럼 내 몸 위에 덮였다.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아니 선셋?"
"거짓말!..."
이미 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으므로 난 격렬하게 흐느끼고 있었다. 발광하면서 도망치는 건 나중에 진짜 셀레스티아 앞에서 하려고 일단 아껴두었다.
"내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날 다른 포니로 대신했으면서! 게다가 트와일라잇에게마저 내 이야기를 해주지도 않았잖아!"
"널 대신할 포니는 아무도 없단다. 선셋.,... 그래. 내 다른 학생을 받았을런지는 모르나, 그게 트와일라잇이 네 자리를 채 갔다는 이야기는 되지 않지. 넌 언제나 내게 특별한 아이였는걸,"
셀레스티아는 내 옆에 가까이 다가왔다.
헛것이든 꿈결이든 간에 그 환영은 거의 진짜 같았다. 심지어 냄새마저도 셀레스티아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여름날의 라벤더 꽃밭을 연상시키는 냄새였다.
"수많은 세월을 살면서 여러 포니를 알아왔고, 그 중 몇몇은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워진 적도 있었지. 허나 그 친구들 중 그 누구도 다른 포니로 대체할 수는 없었단다. 특별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른 데로 끌어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데 쓸 수는 없지. 게다가 사랑에는 한계가 없는 법이고."
"사랑? 날 진짜 사랑하기나 했어요?"
흐느낌이 격렬해지는 바람에 난 말을 거의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혼자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다른 누가 봤다면 마치 실성해서 혼자서 말 하고 울고 짜는 미친년처럼 보일 게 틀림없었으니까.
"저도 처음엔 스승님이 절 사랑하는가보다 했죠! 하지만 스승님은 절 진심으로 믿지도 않았잖아요! 스승님이 평생 저를 애완동물 다루듯 절 대한 걸 제가 모를 줄 알았어요?!"
"그건..... 사실이 아니란다."
셀레스티아는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거짓말 마요! 내 뒷바라지를 해주면서, 내가 원하지도 않는 사교 모임에 줄창 데리고 나가 출석시켰지. 그게 애완동물이 하는 것과 뭐가 달라요! 그리고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우리가 애초에 왜 싸우게 됐는지 기억은 나요? 그 병신 같은 마법 거울은 기억이나 하냐고요!"
나는 웅크렸던 몸을 풀었다. 눈을 세게 비볐다. 저 헛것이 좀 사라져 할 텐데.
"내 앞에 떡밥처럼 매달아 놓기만 하고는 몇 번을 내가 더 보여 달라고 했는데도 안 보여줬었잖아요!"
"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그때 내가 말을 했었잖니.."
셀레스티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애초에 왜 보여줬어! 왜 보여줬냐고!!"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뻔히 질문 할 거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난 당신이 이번에도 나 혼자서 그 답을 찾아보길 바라는가 보다 라고 멋대로 생각했었다고! 썅!... '그건 몇 달마다 열리는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차원문이며, 그 포니가 품고 있는 가장 간절한 꿈을 거울에 비추어준다.' 라는 설명을 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어?!?!"
"난..... 하아... 좋다. 그걸 보여준 건 내 실수였다. 난 네가 정녕 바라는 가족이나, 네 친구나, 혹은 너를 인도해줄 자를 거기에서 찾기를 바랬다. 허나 네가 본 건 오로지 너의 야망뿐이더구나. 마력과 권력 모두를 아우르는 끝없는 힘에 대한 욕심 말이다."
"그런데 그걸 왜 말 안했냐고..."
나는 다 쉰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그거 알아? 난 당신처럼 되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결국 얻은게 뭔 줄 알아? 당신은 나한테 진실을 말해줄 생각도 없다는 걸, 나를 존중해줄 생각도 없다는 걸 알았어. 그리고 내가 얼마나 뼈가 빠지게 노력하던 간에, 네 수양딸 캐이댄스와 결코 비슷한 위치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았고.."
"선셋..."
"갑자기 어디서 뿔과 날개를 모두 달고 나타난 생판 모르는 포니를 위해 당신은 모든 것을 다 해주었어! 근데 나한테는 어쨌더라? 한 번 말다툼했다고 거리로 내쫒아버리곤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했었지? 그래! 날 참 특별하게 생각도 하셨네! 그래서 길가에 내다 버린 쓰레기 취급을 하셨겠지!"
나는 다시 몸을 둥글게 말았다. 환영에게서 최대한 숨으려는 시도였다.
"내가 알리콘이 되고 싶었던 게 그 이유였어.. 캐이댄스를 사랑하는 만큼 나도 사랑해주길 바랬었으니까.."
"난 너를 버리지 않았단다.."
셀레스티아가 속삭였다.
"그저 내가 그 사태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알아주길 바랐었던 것 뿐이었지... 난 그동안 너에게 날아오는 모든 악평과 험담들을 모두 변호해주느라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는 아느냐? 그동안 선생들과 학생들의 너의 행동에 대한 불평불만들 중 내 귀에 들어온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기는 하니?"
나는 침묵했다. 아무것도 몰랐다. 다른 학생들은 자랑할 때나, 꺼지라고 말 할 때 빼고는 신경을 쓴 적이 전혀 없었으니까..
"나는 네가 스스로 깨닫고 다른 자들이 응당 받아야 할 존중을 해 주길 바랬다.. 하지만 너를 아무리 타일러도 너는 바뀔 생각을 하지 않았지. 그리고 종내는 네 스승마저 존중하지 않더구나. 내 말을 무시하고, 나와 언쟁을 하려고 했지. 아직 얻어내지 못한 것을 나한테 달라고 하면서.."
"알아.."
나는 눈물을 흘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엔 그저 감시를 붙여둔 뒤 며칠간 밖에서 반성하게 하고 돌아오게 할 생각이었단다. 그리하여 겸손과 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기 바랐었지. 허나-"
"허나 트와일라잇을 찾아냈겠지. 나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나는 작은 목소리로 으르렁대듯 대꾸했다.
"아니야!"
셀레스티아는 창백한 표정으로 내 말을 극구 부인했다.
"선셋.. 저기, 들어보렴. 내 맹세컨대 너를 몇 년 동안 찾아다녔단다. 내가 찾아내는 걸 네가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때 그때서야 추적을 멈춘 것뿐이고! 처음 네가 강으로 떨어졌다는 경비병의 보고를 받았을 때 나는...나는..."
셀레스티아의 말이 순간 멎었다.
내 위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셀레스티아는 나를 발굽으로 감싸고 나를 자기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널... 다시 못 볼 줄만 알고 가슴이 천 갈래로 찢어지는 것만 같았단다... 도무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단 말이다..."
눈물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건 꿈이다.
이건 절대로 꿈이다.
진짜 셀레스티아는 이런 식으로 평정을 잃어버릴 일도 없고 나 따위 포니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지도 않을 것이다.
"너는 네 혈육이나 다름없는 아이란다. 네가 무언가를 배울 때마다 대견스러웠고, 네가 주변마들의 원성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무너졌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널 아끼는 내 마음이 달라지는 건 아니란다. 선셋....언제나 네게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했지..... 하나 물어봐도 괜찮겠니? 왜 그때 그런 일을 했니 선셋?... 어째서 내 곁을...떠난 거였니?"
"그땐.. 내게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나는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침울해져 오는 걸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당신이 보낸 포니들이 날 쫒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만.. 똑바로 생각을 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도망갔어.. 도망갔어야만 했었어.. 모든 걸 엉망진창으로 망쳐놓았으니 당신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지.."
"돌아올 수 있단다 선셋. 응? 아니.. 아예 지금 돌아가자꾸나. 가서 새 친구들과 사귀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떠니?"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셀레스티아의 가슴에 고개를 비비다가 행여나 더럽힐까봐 코를 열심히 훌쩍였다.
"아니.. 그럴 수가 없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지.. 난 최악의 포니야.... 전 힘을 악용해 다른 포니들을 공포에 떨게 했고.. 게다가.."
나는 한번 훌쩍거렸다.
"지금은 트와일라잇마저 날 무서워하는걸!"
"넌 네가 생각하는 그런 포니가 아니다 선셋."
셀레스티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왜인줄 아니? 넌 이제 다른 포니를 염려할 줄 알기 때문이란다. 넌 방금 트와일라잇이 너를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마음속으로 염려했었지. 그리고 몇 년 전만 해도 힘을 멋대로 부리는 게 왜 나쁜 건지 이해하지도 못했었지만 지금은 다르구나.. 참 많이도 바뀌었어.."
"아니.. 바뀌지 않았어.. 난 괴물인걸!"
"넌 괴물이 아니란다 선셋. 그저 약간 아프고 겁을 먹은 것뿐이란다. 너에게 일어난 변화가 아직은 낯선 탓이겠지... 그래.. 네가 바라지 않는다면 굳이 오늘 널 데려가지는 않으마. 허나 이것만은 기억하거라. 난 언제나 널 환영할거라는 사실을."
셀레스티아가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기댔다.
진짜로 셀레스티아가 내 볼을 비비고 있는 것만 같았다.
"푹 자렴. 병이 나아야 하니까... 아참.. 네가 잠자리에 들 때 항상 내가 불러주는 노래 기억나니?"
'너는 내 햇살. 하나뿐인 햇살.'
'먹구름낀 날도 행복해 진다네.'
'널 향한 내 사랑은 그 끝이 없다네.'
'부디 그 햇살을 거둬 가지 말아주오.'
노래를 들으니 그리움과 동시에 노곤함도 몰려왔다.
긴장과 불안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난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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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내 얼굴에 내리쬐자 난 골난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깼다. 눈을 떴다. 반쯤 셀레스티아가 있는 걸 기대했지만 웬걸, 내 주변에는 내가 꼭 끌어안은 담요더미밖에는 없었다. 그때 셀레스티아가 날 날개로 덮어준 것 같았던 느낌이 그거였나.. 담요는 땀과 눈물로 범벅되어 아주 축축한 채였다.
나는 눈을 비비고 코를 훌쩍인 후, 잠자리에 다시 드러누워 잠시 동안 그렇게 달콤 쌉싸름한 옛 추억을 우울하게 되새김질했다. 분명 그 셀레스티아는 진짜가 아닐 테지만, 난 아직도 셀레스티아가 날 여전히 사랑해주길 바랬었던 것 같다. 혹은 최소한 한번이라도 진심으로 사랑을 해 줬길 바랐던가...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저건 절대 진짜 셀레스티아가 아닐 것이다. 열 때문에 헛것을 봤거나, 혹은 제코라네 집에서 마셨던 약의 약효가 아직 남아있었던 탓에 영혼의 인도를 다시 받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게 그 깨우침의 방법인건가? 처음엔 다른 포니들이 내게서 보는 악마 같은 모습을 내게 보여 충격을 주고, 그 다음엔 셀레스티아의 모습을 보여줘서 내가 어디서 실수했는지 깨닫게 하는 게?
도무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내가 해온 일들은 다 실수였다는 것 하나는 깨달았으니, 실수를 거울삼아 교훈을 얻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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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제목은 핑크빛의 그림자입니다. 과연 누구가 나올까요?
내일도 나가야 되는데 나는 지금 1시반에 왜 이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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