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향단이는 고등학교를 입학식에서 처음 만난 친구이다.
향단이라고 하면 춘향전에 나오는 하녀격인 등장인물이 떠오르는데(이름 한자는 다르다고 한다)
내 친구 향단이는 춘향이 저리가라 할 청도로 예뻤다.
'곱다'라는 형용사가 그렇게 잘 어울리는 아이는 아마 없을거라고 생각한다.
그 아이는 막 중학교를 졸업했는데도 향수를 뿌리고 다녔는데
그 은은한 향수냄새를 난 정말로 좋아했다.
향단이는 흔히 말하는 '엄친딸'인 아이로,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그림도 잘그리고, 심지어 목소리도 좋아 노래도 잘불렀다.
당연히 반에서 중심 격인 아이로, 항상 주변에 친구들이 모이는 성격이었다.
억지로 흠을 잡자면 모녀가정이라는 것인데, 그 어머니가 돈을 잘 번다는 것 같아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향단이와 나는 베프였기 때문에 항상 같이 다녔다. 서로 여자아이들만의 비밀도 공유하고, 고민상담도 곧잘 했다.
수업시간에 발표한 그 아이의 장래희망은 '향수 제조사'였다. 가지고 있는 향수만 수십병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만 알려준 진짜 꿈은 달랐다. 향단이는 '무당'이 되고싶다고 했다.
그 아이는 아무한테도 말한적이 없다고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는데
자기 어머니가 꽤 유명한 무당이고, 자기가 무당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아직 신내림을 받지 못했지만 최근 주역(周易)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수줍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당연히 어안이 벙벙했다.
향단이가 장래희망이라고 말했던 '향수 제조사'와 '무당'은 너무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무당이란 직업 자체가 나에게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작두위에서 칼춤을 춘다거나 점쟁이같은 인상이었고
또 고등학교에서 수학이나 과학을 공부하던 나에게 '주역'은 조선시대의 서당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미지였다.
일류 대학 진학이 너무 당연시 되는,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아이였기 때문에 더 어이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봄방학이 끝난 개학식 날
향단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 한달이 넘어 두달이 다되도록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고, 문자도 읽지 않았다.
집에 찾아가보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그 아이의 집에 가본 적이 없었다.
또 그 아이의 집을 알고있는 아이도 아무도 없었다.
혹시 전학을 간게 아닌가 선생님께 여쭤봤지만 '심한 감기에 걸렸다'라는 답변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개나리가 다 피고 지고, 벚꽃이 다 피고 진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그 때, 드디어 향단이가 등교했다.
그리고 다시 등교한 향단이에게서는 다가가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향수냄새가 났다.
2)
다시 등교한 향단이는 완전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행동은 굼떴고, 말을 걸면 늦게 반응하기 일쑤였다.
체육시간에는 몸이 안좋다고 쉬었고, 음악시간에는 목이 안좋다고 쉬었다.
목소리가 잠겨서 말을 하면 웅얼거리는 것 처럼 들렸으며, 그나마도 몆마디 하지 않았다.
항상 구석진 자리에 앉았으며, 사람들과 눈을 잘 안마주치고, 성적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몸이 안좋다고 조퇴와 지각을 일상처럼 했으며, 그나마도 결석하는날이 반이었다.
무엇보다 냄새가 났다.
코를 찌르는 지독한 향수냄새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향단이는 반에서 고립돼있었고, 말을 걸어주는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향수냄새를 선생님들이 지적했지만, 교칙상으로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건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걸로 심하게 걸고 넘어지는 선생님은 안계셨다.
그러나 독한 향수냄새때문에 아무도 그 아이의 옆자리에 앉기 싫어했다.
옆자리는 커녕, 주변 책상에 앉는것도 기겁했다.
그래서 그 옆자리는 항상 내 자리였다.
나는 단순히 향단이가 심하게 앓아서 오래 쉬었기 때문에 단순히 컨디션이 안좋다고 생각했다.
곧 괜찮아지겠지, 곧 원래의 향단이로 돌아오겠지. 라고 생각하고 묵묵히 지켜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냄새는 더더욱 심해졌고, 향수냄새 사이에는 무언가 썩는듯한 냄새도 섞여있었다.
아무리 익숙한 나라도 가까히서 냄새를 들이마시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초여름이 지나며 큰 비가 내린 날이었다.
나는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고, 향단이도 마찬가지였다.
비를 맞기는 싫었기에 언니에게 전화를 해서 우산을 가져다달라고 했지만,
일이 끝나려면 한시간은 남았으니 기다려달라는 전화를 받고 하릴없이 언니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우산을 챙겨왔거나 부모님들이 데리러 오셨고, 교실에는 나와 향단이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천둥소리와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던 중 향단이가 입을 열었다.
"인영아. 너 혹시 귀신같은거 믿니?"
미안하지만 입에서 썩은내가 풍겼기때문에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입 안에는 향수를 뿌릴 수 없으니 향수를 병째로 들이키지 않는 이상 냄새가 나긴 하겠지만
정말, 정말로 지독한 냄새였다.
어째서인지 그 냄새를 맡으니 등골이 쭈뼛해지고 소름이 끼쳤다.
"...미안해"
나는 벌떡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고, 향단이는 등 뒤에서 사과를 해왔다.
빗물을 맞으면서까지 신선한 공기를 들이키니 어느정도 진정이 됐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너무 심하게 반응한게 아닌가 싶어서 낟 머쓱해졌다.
"아니, 내가 미안. 근데 귀신이라니 무슨...꺄아아아악!!"
뒤를 돌아본 나는 정말, 정말, 정말로 인생에서 다시는 못 잊을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항단이의 입에서 지네가 기어나온 것이다.
붉은색의 머리에, 십수개의 마디를 가진 몸, 수십개의 다리를 가진 그것은 향단이의 볼을 가로질러 귓구멍으로 들어갔다.
"꺄아아아악!!"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나다 청소도구함에 부딪혔다.
반쯤 고장나있던 문이 열리면서 대걸래의 손잡이가 내 어깨로 떨어졌다.
내 반응을 본 향단이는 쓴 웃음을 지었다.
"미안"
그러더니 몸을 일으켜서 교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너무 놀라서 굳은듯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니 창 밖에 향단이가 비를 맞으며 운동장을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건지, 뒤를 돌아본다. 눈이 마주쳤다.
항단이는 미소인지 울음인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얼떨결에 마주 흔들어주었다.
쏟아지는 빗방울에 그 아이의 흰색 교복 상의가 젖어서 몸에 들러붙어 속이 비쳐보였다.
향단이의 몸에는 푸른색으로 글자같은 것이 써져있었다.
그리고 그게 향단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3)
그 일이 있던 이후로 향단이가 다시 결석을 시작한지 막 일주일이 지났다.
그 아이가 없으니 냄새가 안나서 살겠다는 다른 아이들의 말을 들으며 나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아직도 내가본 장면이 믿겨지지 않는다.
사람의 입에서 지네가 튀어나오는 광경은 공포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
7교시가 끝나고, 담임선생님의 종례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에 전화기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는데, 전화를 받으니 어떤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김 인영 전화 맞나요?
"그런데요. 누구시죠?"
-아, 향단이 엄마야.
"예?"
나는 깜짝 놀랐다.
말로만 듣던 유명한 무당이라는 향단이의 어머니가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향단이가 학교에 안나오는데 왜..."
-아 그게 말이지. 향단이가 학교에 갈수가 없어서 지금 엄청나게 심하게 앓고있는데. 움직일 수가 없는데, 치료를 할 수 있긴 한데, 지금은 좀 힘들고.
그래서 향단이가 네가 보고싶다고 해. 네가 오면 좋겠는데. 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묘하게 말이 횡설수설했다. 열에 들뜬 사람이 말하면 이런 느낌일까.
어쨋든 중요한 내용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향단이가 아픈 와중에 내가 보고싶다고 한 모양이었다.
나는 향단이를 볼 수 있다는 말에 흥분해서 바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예 아주머니. 학교 끝나고 바로 찾아갈게요! 어디로 가야하죠?"
-뚝.
그대로 전화가 끊어져버렸다.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아니 집이 어딘지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가라고?
천만다행으로 선생님께 사정을 말해 학생인적기록부에서 집 주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
진작 선생님께 상담할껄 그랬다고 뒤늦은 후회를 하던 와중에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였다.
번호를 보니까 향단이었다.
수신-베프향다니♥: 오지마
일주일만에 연락에 나는 황급히 답장을 보냈다.
발신-왜?
발신-어머니가 오라고 하시던데
발신-많이 아파?
기다려도 답장이 없다. 다섯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어머니와 똑같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발신-갈게. 좀만 기다려. 아파도 내가 가니까 힘내! 파이팅!
결국 문자 한통을 보내놓고 나는 향단이네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4)
향단이네 집은 생각보다 외진곳에 있었다.
슬슬 날이 어두워져 가로등이 한두개씩 켜지는 으슥한 골목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다짜고짜 반말로 나를 불렀다.
"야."
뒤를 돌아보니 전봇대 아래에 누가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예?"
대답을 하니 그 사람이 벌떡 몸을 세웠다.
30대정도 되어보이는 얼굴에,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흐트러진 셔츠는 단추 몇개가 풀려있었다.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묘하게 헤벌레하고 있다.
머리는 헝클어져서 몇가닥이 흘러내렸는데 혀가 꼬인 발음하며 술냄새가 확 끼치는걸 보니 영락없이 취객이었다.
나는 괜히 대답했다고 생각하면서 빠르게 지나가려고 했는데 뒤에서 다시 말을 걸었다.
"잠시만...잠시만 얘기좀 들어봐..."
"왜...왜그러시는데요."
나는 이 취객이 달려들면 사타구니를 발로 힘껏 차고 소리를 지르겠다고 결심했다.
"학생...혹시 위험한 생각같은거 하는거 아니지?"
"예?"
엄청 뜬금없다. 취객은 왠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여동생...친여동생은 아닌데... 훌쩍, 그러니가 조카뻘인 애가 하나 있었는데...너처럼 XX여고를 다녔거든...너 몇학년?"
"...2학년"
"이런 우연이 있나. 걔랑 동갑이네. 삼촌이라고 불러... "
그러더니 뜬금없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울렸어?
"너가 걔같아서 해주는 소린데, 훌쩍. 너한테 안좋은 기운이 잔뜩 꼈어...시기(屍氣)가...
가까운 시일내에 안좋은 일이...우웩!!"
말하던 도중에 전봇대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울다가 토하다가 별꼴을 다본다고 생각했다.
취객은 헉헉거리면서 숨을 들이키더니 다시 고개를 든다.
"시기가 짙어서 쿨럭. 혹시 위험한생각 하는거 아닌가해서 말이야...조심해..."
"아, 그러세요..."
"자...명함... 나중에 관상이라도 보러와라..."
명함에는 佳人도령이라고 써있었다.
나는 술취한 사이비무당인가 싶었는데 저쪽에서 누가 뛰어왔다.
"사장님! 또 여고생 붙잡고 진상짓을 하고 계시면 어떡해요!"
"언니?"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우리 언니였다.
"엥? 사장님?"
"어? 인영아?"
나는 떨떠름하게 헤롱헤롱하고 있는 취객을 가리켰다.
"이분이 언니 사장님이라니?"
"나 일하는데 사장님이셔. 처음뵙지?"
그러고보니 일하는 곳의 사장님이 잘생겼네 어쩌네 하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에휴...술만 마시면 니네 XX여고 애들 붙잡고 진상을 피우는데...전에는 신고들어갈 뻔했고...뒷처리는 내 몪이고..."
"얼굴이 반반하다더니 완전 진상이네. 역시 남의 돈 먹기 쉬운게 아닌가봐 언니?"
"아 진짜 미안. 원래 제정신일때는 빠릿빠릿한데 술이 약해서 술만 들어가면 이러네. 진짜 가끔이래."
취객...이 아니라 사장님은 어느새 고개를 푹 숙이고 쌔근거리고 있었다.
"아주머니 뵈러 가신더니 무슨 술을 이리 떡이 되도록...참, 사과의 뜻으로 좋은거 가르쳐줄까?"
언니는 내쪽으로 얼굴을 가까히 대고 속삭였다.
"내가 대충 깨워볼테니까 '용돈주세요 삼촌'이라고 말해봐."
"뭐?"
그러더니 언니는 사장님의 뺨을 찰싹찰싹 치기 시작했다.
뺨을 때리니 아팠는지 얼떨떨하게 눈을 뜬다.
난 믿져야 본전이니 언니가 말한대로 해봤다.
"용돈주세요... 삼촌?"
"으...응? 그래...아껴써라..."
그러더니 지갑을 꺼내서 5만원짜리 한장을 건네줬다!
나는 손에 잡힌 신사임당님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이 아저씨가 XX여고에서 별명이 산신령인가 부자삼촌인가 그럴껄... 잘생긴 아저씨가 XX여고애들한테 용돈준다고 해서."
"어... 착한 진상 인정합니다."
어렴풋이 그런 아저씨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근데 그게 언니네 사장님이었을줄이야.
나는 감사히 신사임당님을 지갑에 넣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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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는 여러분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이번 편은 길어질 것 같아서 상하편을 나눴습니다.
하편은 새벽에 마저 쓸 생각입니다.
으으...글 써서 베오베 갔으면 좋겠다! 했는데 막상 베오베를 가니까 과분한 칭찬도 해주시고 ㅠㅠ
팬아트까지 받고 그러니까 진짜 몸둘바를 모르겠더군요 ㅠㅠㅠㅠㅠㅠ
혹시 어설프게 쓰거나 실수했다가 실망하시면 어쩌지하고 압박감도 들고요...
근데 막상 쓰다보니까 그런거 걱정한적도 없다는듯이 써지긴 하네용.
고민하던거랑 다르게 지금까지 쓰던데로 써져서 제가 놀랐습니다.(...)
핸섬무당의 캐릭터를 유쾌하게 잡기는 했는데 이번편에서는 좀 망가지고 구를 것 같습니다.
너무 가오만 있는 캐릭터는 재미가 없다는게 제 생각이고
그리고 제가 미남이 흐트러진 상태로 눈물을 그렁그렁하면서 망가지는게 좋아서
핸섬무당의 트라우마나 다른 사람과의 연결을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추천도 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시고 무엇보다 끝까지 읽어주시는 분들 다시한번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PS.'썪다'가 아니라 '썩다'더군요. 이런 부끄러운 실수를... 지적해주신분 감사드립니다.
PS2.그리고 맹장염 걸린놈이 바로 뭔가 먹는다는게 이상하다는 지적을 해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블로그에 올릴때는 요로결석이나 다른 병으로 바꿀까 하고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