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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80336
    작성자 : Dementist
    추천 : 22
    조회수 : 3038
    IP : 112.144.***.22
    댓글 : 14개
    등록시간 : 2015/06/01 13:17:59
    http://todayhumor.com/?panic_80336 모바일
    머리카락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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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 집 좋은데? 너 하나 사는 집치곤 과분한 거 아냐? "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친구 녀석의 시샘섞인 감탄사가 발이라도 달린 듯 텅빈 집안을 돌아다녔다.
    새 집에 이사온지 1주, 새로운 직장 생활에 맞춰 옮긴 이 집은 혼자 살기에 넉넉한 점이 좋았다.
    작게나마 2층 작은 방도 달린 새 보금자리는 여러모로 조건이 좋은 집이었다.
    친구 말마따나 남자 혼자 사는 집치고 과분할지도 모른다.

    " 진짜 좋네.. 이만한 집을 네 벌이에 어떻게 마련했어? "

    " 내가 뭐랬어. 좋다고 그랬지? 아~ 이제 마누라만 딱 있으면 되는데. "

    " 생쇼를 하세요. 여친도 없는 놈이 무슨 마누라야? 김칫국을 트럭으로 드시네. "

    이만한 집이라, 확실히 내 벌이로는 전세는 커녕 월세로 들어와 살기도 주저했을만하다.
    거실에, 부엌 따로, 큰방에 2층 작은방까지. 이 모든게 공짜가 아니었다면 내 수준에 미치지 않고서야
    제 발로 들어왔을리가 없다. 다행히 이 집은 큰아버지 소유였기에 들어와 살 수 있는거지.
    큰아버지 말로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셨고, 그로부터 원금에 이자를 더한 셈치고
    받은 주택이라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물려받긴 했으나 새로 리모델링을 할까, 은퇴 후 들어가 살까
    하며 고민하다 끝내 놔두던 걸 우연히 내가 이쪽 도시에 직장을 잡게 되어 공짜로 살게 내어주는 것이라며
    몇 번이고 거듭 강조하신 적이 있다.

    " 야, 여친 없으면 결혼하고 싶단 말도 못 하냐? 언젠간 결혼하겠지! "

    " 그으래..? 니 말, 아주 헛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에-? "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짙은 송충이 눈썹을 씰룩거리는 친구의 표정.
    인근 도시의 건설회사에서 일하는 녀석이 더운 날씨에 일하다 그만 돌아버렸나 싶었다.

    " 뭔 개소리야. 여자라도 소개 시켜주냐? 그럼 땡큐지만. "

    " 이 새-끼! 시치미 떼는 거 봐? 꼬리가 길면 밟히는 거 몰라? "

    친구는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뭔가를 집어올렸다.
    보일락 말락, 가까이 다가서자 그게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다. 아주 긴 머리카락.

    " 머리카락 아냐. "

    " 으하하, 으와- 소름돋네. 연기 하냐? 애인 없는 척하더니 너 집에 여자 들였지?
    이거 알고보니 선수 아냐? "

    " 아냐 임마. 나 이 집에 온지 일주일 밖에 안 됬는데 무슨 여자가 왔다 가. 네가 처음 온 손님인데. "

    " 이건 뭔데 그럼. 김경호 머리카락이냐? "

    " 존나 재미없네. 나가자. 집에 있어봤자 뭐해. "

    친구의 수준 낮은 비아냥거림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이 긴 머리카락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큰아버지로부터 집열쇠를 받아와서 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은 첫 날,
    거실에 온통 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는 걸 봤다.

    " 어으, 이게 다 뭐야. 세를 안 놨다더니 왜 거짓말을 하셨지? 이게 무슨 빈집이야. 누가 살아도 살았구만. "

    이상하다고 느낄 겨를도 없이 짐을 풀고 당장 다음 날부터 출근해야했으므로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담아 버렸는데,
    문제는 그 날 저녁부터 이상하게 한 두가닥씩 끈질기게 발견되는 머리카락이었다. 세를 놨었는데 조카한테 공짜로
    내어주려니 생색이라도 내고 싶으셨나, 그렇지 않고서야 왜 긴 머리카락이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나올까.

    " 아나, 또 나왔네. 오진다 오져.. "

    처음엔 대충 넘겼던 머리카락이 심심하면 한 두가닥씩 손에 걸리고 발에 채이니 여간 짜증나는 게 아니었다.
    결국 삼일째 되던 날 나는 부엌부터 시작해서 2층까지 쓸고 닦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머리카락을 치워버렸다.





    " 잘 놀고 간다. 다음 번엔 니가 넘어와라. 술이 목구멍을 넘어올 정도로 부어줄게. "

    " 벌써부터 취하는 느낌이네. 그래. 잘 가라. "

    " 그리고 임마, 제수씨 생겼으면 좀 소개 해줘, 감춰두면 더 오래 가냐? 서운하게시리. "

    " 그런 거 아냐. 예전에 살던 사람 머리카락일거야. "

    " 으으음.. 그래? 정 외로우면 말해. 내가 한 번 소개해줄게. 나 간다. "

    " 그래, 또 연락할게. "

    으으음- 하며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친구의 얼굴에서 분명한 의아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집에 있는 동안 몇 번이고 머리카락을 발견한 탓에 '자연스레 떨어진 머리카락치고는 너무 많다'고 생각했겠지.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왼발에 밟히는 머리카락 하나.

    " 아, 진짜..! "

    화가 치밀어올랐다. 대체 머리카락을 어떻게 했길래 사방이 털 천지야?
    탈모라도 걸렸나? 머리라도 깎았나? 그래도 그렇지, 좀 치우고 나갔어야 될 거 아냐.
    도무지 답을 내릴 수 없어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삼촌, 전데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 저 사는 집 진짜 그동안 세 안 준 거 맞아요?

    - 뭔 소리야. 안 그러면 어떻게 집이 비어있어. 방 빼주는게 하루 이틀만에 되는 줄 아냐.

    " 근데 집에 왜 이렇게 머리카락이 많아요, 완전 득실득실대요. "

    - 뭐?

    " 삼촌 시치미 떼지 마세요, 이 집에 여자 살았던거죠? 맨날 머리카락 나온다고요. "

    - 임마, 네 머리카락이겠지. 너도 네 아빠 따라서 머리 까지냐?

    " 장난 아니에요. 진짜 길죽한 머리카락이 나온다니까요? 한두가닥이 아니에요. "

    - 엥? 진짜로? 여자 머리카락이 나온다고?

    " 네! 네! 제 머리카락말고요. 제 친구도 봤어요, 여자 머리카락이 분명해요. "

    - 어, 이상하네. 일단 되는대로 치우고 살아봐. 나도 거기 살아봤어야 말이지.
    네 할아버지도 가시기 몇 년 전부턴 요양 병원 계셨고, 그간에도 세 준단 이야기는 없었어.
    내가 받아서 너 줄 때까지도 비어있었고. 좀 불편하겠지만 머리카락은 그냥 좀 치우고 살아라.
    치우다보면 안 나오겠지, 안 그러냐? 공짜가 어디냐?

    " 아.. 어쩔 수 없겠네요. 그냥 말씀대로 다 치워야겠어요. 근데 저번에 한 번 다 치웠거든요?
    근데 계속 나와요. 스트레스 받을 정도에요. "

    - 자식아, 니가 야무지게 청소를 하고 살면 안 나오지. 끊어- 삼촌 잘란다.

    " 네, 삼촌. 안녕히 주무세요. 늦은 시간인데 괜히 전화드려서 죄송해요. "

    - 아냐 아냐, 연락 좀 자주하고 살자.

    결국 집주인인 큰아버지와 통화까지 했지만 알아낸 건 없었다.
    모든 건 그대로였다. 그 날 잠에 들 때까지 나는 적어도 열댓가닥의 머리카락을 주워다 버렸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고, 평소보다 30분 늦게 일어난 탓에 머리카락 따위에 신경 쓸 겨를 없이
    바삐 움직여야했다. 다행히 지각은 면할 수 있었다. 신참내기답게 바쁜 회사생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엔 직장 선배와 술자리를 가졌다. 일 얘기보다 사는 얘기를 꺼내게 될 즈음,
    선배에게 머리카락 이야기를 했더니 선배는 술에 완전히 꺾여버린 채 꼬부랑거리는 혀를 겨우 굴려댔다.

    " 야야야아.. 머리카락이란 게.. 푸아.. 밑에서 솟는 게 아니야아.. 위에서, 어? 위에서, 툭-!
    요렇게 떨어진다고.. 그럼.. 으후.. 뭐어겠냐아.. 위..에서 떨어진 거 아냐.. 위.. 위를 찾아보란말야.. "

    더 이상 먹였다간 다음 볼 땐 저승에서 만날 수도 있겠단 생각에 선배를 부축해 집으로 모시고
    늦게 집에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에 불을 켜니 그제서야 선배의 말이 오싹하게 들렸다.
    위를 찾아보라니? 천장에 머리카락 주인이 들러붙어있기라도 하단 말야?
    오히려 그게 더 무섭잖아, 상상만 해도 기괴한 모습이었다.
    대충 옷을 정리하고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 푸흡 "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을 차가운 세숫물로 때리며 오늘 하루를 살아낸 표정을 확인하려던 찰나
    정면의 거울에 비치는 내 뒷편, 즉 말하자면 열린 욕실 문 너머 거실에 뭔가 지나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 씨발. "

    세숫물도 차가웠지만 그와는 다른 이유로 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 위를 찾아보란말야.. '

    갑작스레 선배의 말이 머릿속을 때리자 넘치고 있는 세면대 물을 잠글 생각도 하지 못 했다.

    " 누구야, 씨발! 당장 나와! "

    속으론 잔뜩 겁에 질려있었지만 벌벌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죽인 채
    잔뜩 허세를 부리며 거실로 나왔지만 집 어디에도 사람 따위는 없었다.
    이상했다. 분명 거울 뒷편으로 스쳐지나가는 형상을 본 것 같았는데.
    그리곤 발견했다. 욕실에 들어오기 전 벗어놓은 속옷 위에 떨어져있는 머리카락 3가닥.
    확실히 기억하기론 속옷을 벗어놓았을 때 머리카락 따위는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 씨발, 누구냐고! "

    ' 위를 찾아보란말야.. '

    선배의 말이 다시 머릿속을 맴돌자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게슴츠레 실눈을 뜬 채 천천히.. 천장을.. 올려다.. 보..면..
    휴우. 다행히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온 몸에 힘이 빠져버려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속옷에 그대로 놓여진 머리카락 3가닥을 쳐다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 위.. 위를 찾아보라고..? 천장에는 아무 것도 없어. 확실해. 1층 천장보다 더 위인 2층으로 간다면..? '

    더 고민할 것도 없이 2층으로 가는 짧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작은방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순간 거미줄 같은 실이 얼굴에 간지럽게 달라붙는 느낌을 받았다.

    " 으악, 뭐야. "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굴에서 떨어지는 그걸 받아들었더니, 그 정체는 머리카락이었다.
    그 자리 그대로 위를 쳐다보았지만 귀신은 다행히 없었다.
    다만, 이유를 모르게 튀어나와있는 손잡이를 발견했다.
    1층 천장으로부터 연결되어 2층으로 빗면을 그리며 올라가는 비스듬한 계단 천장에는 여지껏
    삼촌도 나도 모르고 있었던 제3의 공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 후우, 하나.. 둘.. 세엣 "

    숫자 셋을 세며 손잡이를 벌컥 열었다.
    그제서야 묵은 때가 껴서 흐릿했던 테두리게 드러다며 처음 보는 다락방이 열렸다.
    큰방과 작은방 외에도 다락에 작은 창고가 하나 더 있었다니..

    " 콜록, 콜록! 아오.. 먼지! "

    내부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기에 휴대전화 조명을 켜서 안으로 들이밀었다.

    " 이게 뭐야.. "

    다락방 안은 온통 가발 천지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검고 긴 생머리를 한 주인 잃은 가발들이 셀 수 없이 들어가있었다.
    아무에게도 세를 놓지 않았다던 집 다락방에 가발이 가득 들어차있다니..
    할아버지한테 돈을 꿨다는 사람이 가발 공장이라도 했던걸까.
    그래, 뭐 머리카락은 가발에서 흘렀다고 치자.
    그럼 다락방에 가득 들어찬 가발의 머리카락이 왜 집안에서 계속 발견되는걸까.
    치워도 치워도 왜 한 두가닥씩 계속 보이는걸까.
    가발이 일어나서 그 해답을 속시원히 말해줄리도 없으니 해답을 구하지 못한 채 방으로 돌아가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덜 깬 술에 출근해야 한다는 중압감까지 더해져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한숨 돌리기 힘든 신입치곤 의외로 빠른 퇴근을 한 날이었다.
    웬만하면 술자리에 함께 하는 술자리도 마다한 채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집 노트북에 설치해놓은 캠 카메라와 화장실 거울 위 선반에 녹화를 시켜둔 캠코더.
    두 전자기기 속에 그간 나를 괴롭혀온 '머리카락'의 실체가 담겨있을테니까.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김없이 발견한 머리카락 일곱 가닥이 그 판단을 더욱 확고히 믿게해줬다.
    우선 노트북에 녹화된 영상을 재생시켰다.
    평범한 집
    여전히 평범한 집,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다음 화면을 보는 순간 까무러칠 뻔 했다.
    생머리 가발 하나가 계단을 내려오듯 둥둥 뜬 채로 들썩이며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듯이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가며 두리번거리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캠코더에 녹화된 영상.
    거울 앞을 기웃거리는 가발.

    " 뭐야.. "

    가발은 우뚝 멈추더니, 캠코더를 주시하기라도 한 듯 점점 캠코더로 다가온다.
    이윽고 캠코더 화면이 검은 색으로 덮혀버린다.

    " 이게 뭐야! "

    믿고 싶지 않았다.
    이 집은 귀신에 씌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순간 거울 앞에서 캠코더를 확인하는 내 뒤로 무언가가 스치듯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 으아아! 씨발! "

    그대로 집을 뛰쳐나가 이웃 도시에 있는 친구 집을 향해 차를 내달렸다.

    " 그래서, 집에 못 들어가겠다고? "

    " 그래.. 죽겠다.. 귀신이란 게 있나봐. 차라리 내가 구라치는거면 좋겠다. "

    어떻게 잡은 직장인데, '귀신 봤다'고 털어놓았다간 순식간에 직장 내에서 싸이코로 낙인 찍힐테고.
    혼자 전전긍긍하기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친구 집까지 찾아와 털어놓았더니 친구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란 가슴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 일단 가발이 가득 들어있다니.. 여자친구는 확실히 없는거네. "

    " 야이 썅, 죽을래? "

    " 그럼 뭐 어쩔거야. 다른 집으로 이사라도 갈거야? "

    " 그게 가장 좋을 거 같긴한데.. 돈이 어딨냐. 이 집 아니면 당장 출근은 어디서 하고.. "

    주머니를 뒤적거려 머리카락 하나를 테이블에 던졌다.

    " 자, 받아라~ 내 여자친구 머리카락이다~ "

    그러자 친구는 화들짝 놀라며 머리카락을 내동댕이쳤다.

    " 알았어. 안 놀릴테니까 그만해. 근데 너 가발이 한 두개가 아니라고 그랬지? "

    " 그래. 몇 개인지 세어보지도 못 했어. 다락방 한가득이라니까. 졸라 끔찍하지? "

    " 그 가발이 전부 한 사람을 위한 걸까? "

    " 그러면? "

    " 가발이란 건.. 보통 한 가발이 하나의 주인을 가지지 않나? "

    " 야! 그럼 우리 집에 있는 가발들이 하나 하나씩 다 주인이 있다고? 미친 거 아냐? "

    " 진지하게 말하는거야. 그럼 한 년이 똑같은 생머리 가발을 수십개씩 가지고 있는 건 정상이냐?
    니가 판단해봐. 어느 쪽인지. 가발 주인이 여러 명이겠냐, 한 주인이 여러 가발을 가지고 있었겠냐? "

    듣고보니 친구 말이 옳은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기 싫긴 했지만.. 가발 하나 하나에 주인이 하나씩 있는 게 맞다고 여겨졌다.
    그럼 다락방을 가득 채운 가발 모두 저마다 주인이 있었단 얘기인가..

    " 그럼, 그렇다치고 그 다음은 어떡해? "

    " 그건 나도 모르지. 당사자인 네가 한 번 파헤쳐봐. 어차피 네 다락방이야.
    귀신이고 잡귀고 간에 그 집 주인은 너잖아. 억울하면 귀신한테 집문서 갖고오라 그래. "

    " 아.. 돌겠네.. 그 좁은 다락에 기어들어가서 가발을 막 뒤지라고? "

    " 그래야지. 적어도 가발을 집 밖으로 치우기라도 해야 머리카락이 안 나올 거 아냐. "

    " ... 하긴, 그 집에서 살긴 살아야 할거고.. 그러려면 결국 가발을 밖으로 버리는 수 밖에 없겠다. "





    결심이 이어진 끝에 휴일이 찾아왔다.
    잦은 외박에 지친 몸을 뉘일 생각도 못 한 채 잔뜩 벼르며 오랜만에 집에 도착했다.
    거실엔 머리카락이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 젠장, 진짜 최악이야. '

    켜둔 노트북에 녹화되어있는 그간의 영상부터 먼저 확인했다.
    다시 봐도 믿기 어려운 장면이었지만 생머리 가발은 매일 집안을 거닐고 있었다.

    " ... "

    아찔했다.
    곧 친구의 말이 옳았다고 인정하게 만드는 장면이 이어졌다.
    생머리의 가발이 하나, 둘씩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다락의 계단을 타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왜 그간 머리카락이 하루만 방심해도 곳곳에서 발견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친구의 말대로 가발 하나 하나가 각자 움직이는 듯 했다.
    딱히 집기를 부수거나 말썽을 부리진 않았지만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이, 혹은 빙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듯이,
    눈에 보이진 않아도 살아있는 존재들이 그러하듯 서로 어울리고 있었다.
    그동안 모든 것을 기록하느라 터질 듯이 달아오른 노트북의 전원을 끄고,
    친구의 말대로 다락을 열어 모든 가발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 그냥 가발이야. 꺼낸 다음 버리면 끝이야. '

    결심한 이상 실행에 옮기는 건 순간이다.
    하지만 역시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자 최신 노래를 빵빵하게 틀고서, 장갑을 양 손에 낀 채
    계단으로 성큼성큼 올라가 다락방 손잡이를 열어제꼈다.

    " 콜록! 콜록! "

    여전히 먼지가 풀풀 날렸다. 안에는 언제 움직였냐는듯 가발이 잔뜩 들어차있었다.
    가장 앞쪽에 있는 가발부터 거실 쪽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사람 머리같은 가발이 하나둘씩
    데굴데굴 굴러가서 산발이 된 채 바닥에 뒹구는 장면은 그다지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기에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마침내 다락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만한 공간이 생겼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왕 한 김에 제대로 끝내야한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 턱걸이하듯 몸을 끌어당겨 다락방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다락방 안은 넓었고, 보이지 않았던 부분에도 가발들이 꽤 쌓여있었다.
    노래가 나오던 휴대폰을 들어 조명까지 킨 다음 다락방에 있던 가발을 정신없이 정리하고 있는데,
    사람으로 치면 머릿가죽, 즉 가발이 사람의 두개골에 피부처럼 달라붙는 내피에 색이 누렇게 변해버린
    종이 하나가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

    강보람..?

    " ... "

    옆에 있는 똑같은 모양의 가발을 집어들고 역시 같은 곳을 확인했다.

    박은지..

    ' 정말 사람 하나 하나마다 주인이 있었던거야. '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집안을 오다니던 가발들의 주인은 바로 이 이름의 주인들이겠지.

    " 미.. 미안하지만.. 저도 사정이란 게 있거든요.. 어쩌겠어요.. "

    괜히 언짢은 마음에 혼자서 가발들에게 나름의 해명을 해가며 가발을 하나둘씩 다락 밑으로 던졌고,
    한 쪽 벽면이 완전히 드러날 때 쯤 한 장의 사진을 찾게 되었다.

    " ... "

    장갑으로 대충 먼지를 닦아내고 불빛을 가까이 해보니, 나이가 지긋한 한 노인의 사진이었다.
    사진의 아래 쪽엔 'OO병원'이란 4글자가 띄엄띄엄 프린팅되어 있었다.

    ' 확실히 할아버지 계실 적에 세는 안 놨더라도 이 집이 그 전에도 빈 집은 아니었던거야. '

    사진을 내려놓고 다른 벽면의 가발들마저 아래로 치웠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나서야 가발을 모두 아래로 내려보낼 수 있었고,
    마침내 드러난 다른 벽면에서 헌 일기장 하나와 사진 앨범 하나를 발견했다.

    " 천사들의.. 동산..? "

    헌 일기장에는 큰 글씨로 '천사들의 동산'이라는 제목이 쓰여있었고, 부제로 자그맣게
    'OO병원의 아이들' 이라고 쓰여 있었다.

    [ O월 OO일 ]
    이 병원에서 작은 천사들을 보살핀지 몇 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울음은 언제라도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신이 있으시다면 왜 어린 천사들을 이렇게 일찍 필요로 하실까요?
    내가 펼치고자 하는 의술이 당신의 부름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저를 용서하세요. 저는 어린 천사들의 눈물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

    [ O월 OO일 ]
    독한 치료 때문에 머리가 동자승처럼 벗겨진 천사들은 거울 보기를 싫어합니다.
    어느 나이보다 거울 보며 자기 가꾸기를 좋아할 나이인데..
    예쁜 머리띠 하나 해보지 못 하는 소녀들의 슬픔마저 치료하기엔
    이미 제가 너무 늙어버렸습니다.
    슬픔을 거두고 웃음까지 찾아주고 싶건만.

    ...

    [ O월 OO일 ]
    자금을 빌릴 곳을 찾았습니다!
    천사들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 O월 OO일 ]
    주문한 가발이 도착했습니다.
    일단은 집 다락에 가져다 놓았는데..
    문제는 제가 요즘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낍니다.
    한 명 한 명에게 다 씌워주고, 예쁜 머리띠도 하나씩 해줘야하는데..
    신께서 저를 지금 필요로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 O월 OO일 ]
    일기를 더 이상 쓸 수 없습니다.
    하지만 꼭 다시 쓰겠습니다.
    천사들에게 가발을 씌워줘야만 하니까요.


    일기는 그 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쓰여있지 않았다.
    다락에서 내려갈 생각도 잊은 채 옆의 앨범을 펼쳐보았다.
    반대 벽면에서 발견했던 사진 속 할아버지가 병원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서 직원들과 함께한 사진이 보였다.
    그 다음 장부턴 생긴 게 다 비슷비슷한 소녀들의 사진이었다. 자세히 보면 이목구비야 다 개성이 있었지만,
    모두 머리가 다 빠져 대머리였기에 생긴게 비슷해보였다. 독한 치료를 한 탓일까.. 아마 백혈병인 것 같다.

    " 강.. 보람.. "

    가발에 적혀있던 이름과 같은 이름을 앨범 속에서 찾아냈다.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귀여운 소녀였다.
    머리카락이 없다는 것 외엔 못난 구석 하나 없는 예쁜 아이.

    마침내 앨범과 일기장, 사진을 모두 든 채로 끙끙대며 다락방을 빠져나왔다.
    온 몸이 먼지투성이라 터느라 한참을 콜록거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온 계단부터 거실까지 가발투성이였다.
    박스 하나를 주워 가발을 한 곳에 모두 담은 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는 동시에 내 시선은 앨범 제일 뒷장에 적힌 병원 이름과 주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 여보세요?

    " 나야. 너 OO병원이라고 아냐? "

    - 뜬금없게.. 내가 여기 원래 살던 사람도 아니고. 근데.. 들어본 것 같긴 한데..

    " 알아? 생각해봐! 이 병원 주소, 너 지금 일하는 그 도시에 있어. "

    - 주소? 무슨 주소?

    " 당연히 OO병원 주소 말하는거지! "

    - OO병원.. 아, 어쩐지 들어봤더라 했어. 나 요즘 일하는 우림아파트 단지 알지? 저번에 얘기했잖아.
    그 단지 공사 현장 옆에 의학기록물 관리하는 건물이 있는데 원래는 백혈병 어린이들을 치료하던 병원이라던가?
    바로 옆이라서 어쩌다보니 알게 됐다. 그 병원은 왜? 지금은 병원도 아니야.

    " 가발이랑 관련있어. 알려줘서 고맙다. 끊는다!

    - 야, 전화했으면 한 잔..

    친구의 말도 잘라먹은 채 전화를 잽싸게 끊곤 차 트렁크에 앨범과 일기장을 실었다.
    가발도 몽땅 실을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트렁크가 모자랄 것 같아 가발은 상자 그대로 거실에 둔 채
    자동차 시동을 걸고 네비를 켜서 우림아파트 단지로 길을 찾도록 설정한 다음 곧장 운전을 시작했다.
    이 가발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 집에 살던 사람은 누구인지,
    그 모든 비밀이 풀려야만 나도, 이 가발들도 편해질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가는 차 보기 드문 늦은 밤인 덕에 1시간 남짓만에 우림아파트 단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놀이터 옆에 차를 세워두고 의료기록원이라는 글씨가 써진 건물 정문으로 들어가려했지만 철제 울타리가 쳐져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경비실 창문 너머로 자신을 수상하게 쳐다보는 경비원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 경비 아저씨, 저 좀 들어가볼 수 있을까요? "

    " 지금은 늦었고 안에 사람도 없어요. 뭐하시는 분인지 모르겠는데 내일 오세요. "

    " 지금 아니면 안 돼요. "

    " 거참, 왜 이래요? "

    억지라는 걸 알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 오기 힘들 것 같았기에 더 막무가내로 매달려보았지만
    그럴수록 경비 아저씨의 의심은 더해져만 갔다. 경찰을 부르겠다는 엄포에 한 풀이 죽어있을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 아저씨! 저 우림아파트 현장의 김 대리입니다. 기억하시죠? "

    " 엇, 자네가 이 시간에 왠일이야. "

    " 새벽에 찾아와서 꼬장 부리는 이 자식이 제 친구거든요. 하하. "

    기록원을 찾아왔을 나를 위해 굳이 찾아와 준 친구가 고마웠다.
    친구가 경비 아저씨와 함께 조용히 속닥이더니, 묵직한 비닐봉지 하나를 건넸다.
    포장된 족발, 소주와 맥주가 한 병씩 담겨있었다.

    " 그럼, 잠시 들어갔다 나올게요. 어차피 저희 CCTV에 얼굴도 다 찍힐텐데 다른 걱정 마시구요. "

    " 자네도 오고 했으니 뭐 뒷탈은 없지 않겠어? 대신에 빨리 다녀오게. "

    앨범과 일기장을 급히 챙겨 기록원 안으로 들어섰다.

    제1기록실
    제2기록실
    영상실
    행정실
    강당
    ...

    당장 가까운 대로 제1기록실로 들어갔지만 많은 사물함이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 아, 다 잠긴 거 아냐? "

    " 저쪽은 안 잠겨있어. "

    친구가 가리킨 쪽으로 다가가자 'OO병원'이란 이름표가 선명히 드러났다.

    " 맞는 거 같아. "

    사라진 병원의 기록물을 담고 있는 만큼 보관함도 낡아있었기에 여는데 힘을 들여야했다.
    끼익, 끼익, 비틀리며 열린 사물함 안에는 들고온 앨범과 비슷한 수준으로 낡았지만 제법 보관이 잘 된
    자료들이 수두룩했다. 그 중엔 다양한 종류의 일지들이 들어있었고, 매 해별로 근무 명부 또한 정리되어 있었다.
    들고온 일기를 펼쳐 일기가 쓰여진 날짜에 해당하는 근무 일지와 환자 기록 카드를 꺼내고,
    그 해의 근무 명부 또한 꺼냈다.

    " 이 일기하고 앨범을 위주로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건지 알아야겠어. "

    " 내가 왜 여기 따라와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

    " 니 발로 왔으면 입 다물고 도와주라. 시간 없어. "

    " 아오. 망했다.. "

    황인호.
    아이들을 '천사'로 부르며 그녀들에게 '가발'을 남긴 의사의 이름이었다.
    백혈병에 걸린 소녀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병원이었으나 후원 재단이 점차 지원을 중단함에 따라
    경영난을 앓고 있었고, 결핵만 걸려도 사람이 죽고 살고를 하늘에 맡겨야 했던 시절이었기에
    소녀들은 낙엽이 지듯 하나 둘씩 떠나고 있었다. 기록물에 그녀들이 떠난 날짜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의술을 행하는 황인호 의사였다지만 그녀들을 모두 살릴 순 없었고,
    점점 어려워지는 병원을 유지하기 위해 재산을 점차 팔아치웠지만 끝내는 가발 하나 해주기 어려울 정도로
    사정이 악화되던 중 돈을 빌려 소녀들 모두에게 가발 하나씩을 선물했던 것이다.
    아마 돈을 빌려온 곳은 할아버지로부터였던 것 같다. 그 댓가로 지금 사는 집을 받은 거겠지.
    그 증거로 일기엔 할아버지의 가발을 자신의 집 다락에 보관했다는 내용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황인호 의사는 늙은 몸을 오래 가누지 못 했고, 몇 남지 않은 소녀들보다 먼저 세상을 뜨고야 말았다.
    가발은 그렇게 씌워주지도 못한 채 다락에 남았고,
    그 많은 가발의 주인들도 하나 둘씩 하얀 세상 저편으로 저물어갔던 것이다.

    " ... "

    주인 잃은 가발들의 사연을 읽고 나니 코 끝이 괜히 찡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가며 끝까지
    소녀들을 위해 살았던 한 의사의 인생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가발은 주인을 잃은
    셈은 아니었다. 자신의 집에서 (달리 말하자면 황인호 의사의 남겨진 집에서) 목격했던 모습대로라면,
    소녀들은 가발을 쓰고 있었던 셈이 아닌가.

    " 야. 더 볼 거 없으면 나가자. "

    몇몇 참고할 사항을 서둘러 사진으로 남긴 후 우리는 기록원을 나섰다.
    족발과 술에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는 올 때와는 달리 콧노래를 부르며 극진히 우리를 배웅했다.

    " 가발 주인 찾았네. 어쩔거야? "

    " 이미 잠 자긴 글렀어. 황인호 의사 장례식 때 주소가 적혀있던데. 가발은 그곳에 두어야겠어. "

    " 안 갖다버리고? 너 영혼 상담소라도 차릴 셈이야? "

    " 진짜 영혼이 있단 걸 믿는 이상 함부로 하기 찝찝해. 이 할아버지가 소녀들이 가발을 잘 쓰고 있다는 걸 알까?
    소녀들이 감사하다고 말을 전하고 싶어할지도 몰라. 못된 귀신이라면 몰라도 순수한 영혼이란 생각이 드니까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처음엔 얼른 갖다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어. "

    " 얼른 해치우고 같이 술 한 잔 하러 나왔더니 이게 무슨 감동의 도가니탕이야? 별 수 없네..
    너 알아서 해라. 난 이만 들어가서 자야겠다. 나 잘 왔지? "

    " 진짜 고맙다. 꼭 보답할게. 먼저 가라, 난 가발들 모셔놓으러 갈게. "

    손짓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친구를 향해 나도 손을 힘껏 흔든 뒤, 앨범과 함께 다시 차로 돌아왔다.
    새벽이 깊었지만 상관없었다. 해가 뜨고 출근하기 전에 황인호 의사가 묻혀있는 곳에 가발을 가져다두어야 한다.





    " 끄응, 으. 겨우 왔네.. "

    한자를 읽어보니 황인호라는 사람이 이 무덤의 주인이 분명했다.
    기록원에 갔다가, 돌아왔다가, 다시 가발을 챙겨 옆 도시의 무덤에 오기까지 달이 몹시 기울었다.
    슬슬 박명이 찾아오면 해가 살짝 고개를 내밀 즈음이었다.

    " 저어.. "

    무덤 앞에서 말을 하는 자신이 왠지 우스꽝스럽다고 여기려다가 이내 진지하게 자세를 고쳐잡았다.
    자신이 본 가발들의 아우성을 생각하면 황인호 의사가 정말 이 말을 듣고 있을거란 확신이 들었다.

    " 안녕하세요. 저는 의사 선생님이 살던 집에 살게 된 청년입니다. 우연히 다락에 있던 가발과
    일기장을 봤어요. 좋은 분이셨단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셨나요? 가발들.. 주인이 찾아왔어요.
    모두 가발을 무척 좋아했던 것 같아요. 덕분에 집이 좀 어지러웠지만.. 지금은 오해가 풀렸어요.
    하지만 소녀들은 가발만큼이나 선생님을 보고싶어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가발을 가져왔어요.
    근데 생각해보니 무덤이 있네요? 하나님 얘기하시길래 크리스천이신 줄.. 아니 무슨 소리 하는거지 지금.
    죄송해요. 잠을 못 잤거든요. 걱정은 마세요. 어차피 이 가발을 오늘 전해드리지 못 했더라면 결국 오늘 밤은
    잠을 설쳤을 거에요. 천사들은 결국 부름을 받았지만,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인사 드리고 싶어했을지 모르겠어요.
    가발하고.. 놔두신 유품들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어서 돌려드립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

    그 말을 하고 돌아서는 마음이 왠지 홀가분해져 있었다.
    꼬박 밤을 지새운 무거운 눈꺼풀도 신기하게 가벼워져 있었다.
    산뜻한 발걸음으로 동산을 내려갔다.





    " 너 갈수록 얼굴이 환해진다? 드디어 애인 생겼냐? "

    " 그랬으면 여기서 너랑 술이나 퍼마시고 있을까.. "

    친구 놈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더 이상 집에 머리카락은 나타나지 않았고,
    직장에선 자리를 완전히 잡았고 혼자 살기 넉넉한 집은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이제 정말 사랑하는 사람만 찾으면 모든 게 완벽할 거란 생각이 든다.

    언제는 이런 꿈을 꾸었다.
    익숙한 동산에 한 할아버지가 흔들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긴 생머리를 한 예쁜 소녀 무리가 키득거리며 살며시 다가와선 짖궂게 장난치고 꺄르르, 도망가고,
    그 바람에 단잠에서 깬 할아버지가 화 내긴 커녕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무척이나 행복해보이는 풍경이었다.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게 된 건 다행이고 바라던 일이지만,
    아주 우연히 또 머리카락 한 가닥을 줍게 된다면..
    어쩌면 그땐 경악이 아니라 이 시대가 잃어버린 따뜻한 마음 한 가닥을 추억할지도 모를 일이다.
    출처 http://www.fmkorea.com/172662962

    작성자 : HSKD플루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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