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 이 곳은 너무 깜깜해요.
습하고, 더운 이 공간 속에서 전 천천히 죽어가고 있어요.
기억하시나요, 그땐 주인님도 어렸고 저도 어렸어요.
주인님은 잠자리채와 몬스터볼 몇 개를 가지고 풀숲을 헤집고 다니셨죠.
야생에서 자라온 제게 주인님과의 첫 만남은 너무도 무서웠어요.
지금에서야 동료라고 추억하지만, 주인님이 몬스터볼에서 꺼낸 라이츄는 제겐 공포 그 자체였어요.
전기 공격 한 번에 저는 새까맣게 그을렸고, 주인님이 던진 몬스터볼에 그대로 들어갔죠.
전신이 화끈거렸어요, 쓰라렸어요, 엄마 아빠로부터 떨어져 어디론가 실려가는 느낌이 두려웠어요.
인간들은 정말 나빠, 난 엄마 아빠랑 나무열매를 먹으며 살아온 것 뿐인데..
날 어디로 데려가는거지? 날 어떻게 하려는거지?
그런데 뜻밖에도 주인님은 절 포켓몬 센터로 데려가셨잖아요.
따뜻한 간호 덕에 기운을 차리던 그 날 절 보며 방긋 웃어주시던 주인님이 아직도 떠올라요!
제게 맛있는 음식을 떠먹여주시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셨지요!
제게 이름도 지어주셨어요. 해피라는 이름으로.
그 날부터 전 해피로 살게 되었어요.
해피야, 넌 내 두번째 포켓몬이야, 함께 모험하며 넓은 세상을 구경해보자!
그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엄마 아빠를 못 보는 건 슬펐지만 상록숲에서 열매나 따먹던 저에게
드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가르쳐주셨으니깐요.
저는 곤충이니까요.. 새 포켓몬에겐 잼병이에요. 불에도 약하구요.
그런 저였지만 주인님께 어떻게든 보탬이 되고 싶단 생각에 필사적으로 싸웠어요.
싸움 해본 적은 없었지만 죽기 살기로 덤볐어요. 실뿜기, 몸통박치기,
매일 상처가 벌어지고 피고름이 쏟아져나왔지만 제게 수고했다고 말하며 늘 센터로 데려가주셨죠.
첫 승리가 기억나네요.
상대는 롱스톤이었어요.
괴력 기술 한 번에 제 살이 터져나오고, 제 초록색 피는 울컥 쏟아졌어요.
하지만 질 수 없었어요. 그 날은 체육관 관장과의 싸움이었잖아요.
배지를 못 따면 트레이너 학교 입학 자격이 안 된다는 말씀을 언뜻 들었거든요.
매달렸어요. 죽을 각오로, 부딪칠 때마다 제 연약한 살이 터져 살집이 삐져나오고,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지만 이 악물고 덤볐죠.
그래요, 그 날의 기적은 지금까지도 제겐 영광이랍니다.
지쳐버린 롱스톤이 전투에서 도망가버렸죠.
저는 온몸이 터져나온 채로 주인님 앞에 몸을 뉘었고, 주인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절 끌어안으셨죠.
주인님의 첫 배지를 선물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애틋해요!
그 날 이후 주인님은 원하던 트레이너 학교에 입학하셨고,
저와 막역한 사이였던 라이츄와 함께 수련을 거듭하셨죠.
그때부터였을거에요.
제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건.
트레이너 학교 주변엔 깨비드릴조와 피존이 날아다녔고,
숲 속으론 불 포켓몬인 가디들이 떼로 움직였으니까요.
전 화상을 입고, 부리에 쪼여가며, 매일 싸웠지만 역부족이었어요.
주인님은 그때부터 제게 웃어주지 않으셨어요.
센터에 데려갈 때마다 제 치료비를 지불하시면서 울상을 지으셨어요.
트레이너끼리의 승부에 내놔도 이길 수가 없었어요.
트레이너 학교 학생들은 다들 쟁쟁했잖아요.
그러던 어느 날, 제 몸이 욱씬거리더니 비로소 날개가 돋아났어요!
연속 찌르기를 터득했고 전투에서 이기는 횟수도 늘어났죠.
트레이너 학교를 졸업한 뒤 우리는 새로운 섬으로 떠났죠.
처음엔 절 아프게했지만 어느덧 형제처럼 가까워진 라이츄와,
엘리트 학교에서 동료가 된 피존투와..
그 섬에서 라이츄는 잘 싸웠어요, 피존투도 활약했구요.
하지만 제겐 지옥의 시작이었어요.
너무 강한 상대들, 약한 내 자신..
패배, 패배, 패배..
그러던 어느 날 몬스터볼에 들어가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주인님,
어디 계세요.
라이츄는 잘 있나요?
피존투는요?
새로운 동료도 생겼나요?
전 이곳이 어디인지 몰라요..
하지만 주인님이 꺼내주시기 전엔 이 곳을 나갈 수 없어요.
전 이미 주인님의 시종이에요,
주인님의 선택 없인 나갈 자신이 없어요.
몬스터볼 안에서,
습하고 어두운 이 공간 속에서,
전 겨우 죽지 않을 만큼의 영양을 받으며 버티고 있어요.
암흑 속에 빛을 보지 못한 세월이 길어요.
셈할 수 없는 세월 속에 주인님도 많이 강해지셨을까요.
잠자리채를 들고 마주했던 그 순간에 비해 어른스러워지셨겠죠.
배지도 여러 개 차고, 저보다 강하고 믿음직한 동료들을 많이 얻으셨겠죠.
주인님, 절 기억하시나요?
기억해주세요..
이 곳에서 데려가 주세요..
주인님이 절 데려오셨잖아요.
제 삶의 이유가 되셨잖아요.
절 버리지 마세요.
이 곳은 가끔 너무 춥거나 너무 뜨거워요.
몬스터볼 안에서 전 할 수 있는 거라곤 주인님께 전송되길 바라는 것 밖엔 없어요.
제 옆에도 꼬렛이나 캐터피들이 잔뜩 볼 안에 들어가있어요.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순 없지만 저흰 서로의 처지를 이해해요.
그래요, 약하니까. 도움이 안 되니까. 쓸모 없으니까.
하지만 주인님,
약속하셨잖아요.
넓은 세계를 보여주시겠다고 했잖아요.
어디 계세요?
주인님,
절 버리지 마세요..
이 암흑 속에 절 홀로 내버려두지 마세요.
그저 포켓몬 도감 속의 한 마리로 여기지 마세요.
이 어둠 속에, 추위와 더위 속에, 괴로움 속에, 외로움 속에, 눈물 속에, 아픔 속에,
절 가둬두실 거였다면..
왜 그 날 저를 택하셨나요.
주인님을 섬기는 일 밖에 모르는 전..
오늘도 몬스터볼 안에서 언제가 될 지 모를 그 날을 기다려요.
주인님,
절 기억하고 계신거죠?
한 번이라도 절 바깥으로 꺼내주세요,
쓰다듬어주세요, 절 잊지 않았다고 말씀해주세요.
저는 물건이 아니잖아요..
창고에 넣어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쓰는 비품이 아니잖아요..
제 심장은 아직 두근거리고,
제 기억은 주인님과 함께 여행을 다니던 그 때에 멈춰있는데..
차라리 이렇게 절 가만 두실 바에야 절 죽여주세요.
마음껏 살아보라고 풀어주셔도 주인님 뒤를 따라갈 저에요.
그런 저를 이렇게 천천히 죽이실 바에야..
다시 한 번 라이츄에게 명령해주세요.
절 태워죽이라구요.
웃으며 죽고 싶어요.
지옥 속에 살고 싶진 않으니까요.
주인님-..
절 천천히 죽이지 마세요.
제가 도움이 못 된 게 죄송해요.
죽여주세요,
아니요.
죽기 싫어요.
주인님,
저 진짜 죽기 싫어요,
이대로 죽기 싫어요,
구해주세요, 내보내주세요,
빛을 보고 싶어요,
주인님이 보고 싶어요, 라이츄도 보고 싶어요,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죽기 싫어!
이 어둠과 습기 속에 천천히 질식해가는 게 두려워,
차라리 날 죽였어야죠,
차라리 날 죽였어야죠,
차라리 날 죽였어야죠-..
ㅡ 포켓몬 괴담, 주인님 저를 기억하시나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