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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ony_78855
    작성자 : 키아노케
    추천 : 6
    조회수 : 568
    IP : 222.107.***.142
    댓글 : 1개
    등록시간 : 2015/02/06 18:05:53
    http://todayhumor.com/?pony_78855 모바일
    [팬픽/번역] 질서 - 1부

    title.png


    - 1부 -


    “사랑하는 자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저하는 자는 언제나 패배한다.”

    -누군가-


    셀레스티아의 아침을 맞이하는 캔틀롯 왕실군악대의 트럼펫 소리에 플래시 센트리의 눈이 떠졌다.


    누군가 노쇠한 두 발굽으로 그의 문을 두드렸다. 동시에 떨리는 목소리가 참나무 문 뒤에서 조용히 흘러나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플래시 센트리님.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침대 위에서 신음 소리와 함께 옆으로 굴러누운 플래시는 찾아온 손님은 무시하고 그저 방 반대편 거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새파란 갈기는 털이 이곳 저곳 마구잡이로 튀어나온 채 엉망이었다. 눈 아래에는 다크서클이 걸려있었다. 양 볼에는 몇 시간이 지난 부끄러운 눈물 자죽이 선명했다.  그는 깃털이 마구 흐트러진 두 날개를 힘겹게 들어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세번째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플래시 센트리님?”


    마지못해 플래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들어와, 그레이후프.”


    끼익하는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힘없는 주둥이에 친절한 미소를 띤 늙은 어스포니가 문 너머로 들어왔다. 검정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하인 복장을 한 플래시의 하인은 문을 닫으며 그의 주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인님.”


    플래시는 침대에서 내려와 목과 날개를 쭉 뻗고, 등의 관절들이 뚝 하는 소리와 함께 풀리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이후프, 다시 한번 말하는데,” 그가 얼굴과 갈기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냥 플래시라고 부르라고.”


    그레이후프가 웃었다. “예, 하지만 주인님, 이 대화가 어떻게 흘러갈지 서로 잘 알지 않습니까.” 그는 옷장으로 걸어가 문을 열며 작게 미소지었다. “자 주인님, 제가 다 준비해 드리는 동안 잠시 앉아계시죠.”


    플래시는 눈 밑의 거슬리는 눈물 자죽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갑옷 관리나 입는걸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고 몇번이나 그레이후프에게 말해줘도 그는 도통 말을 듣질 않았다. 답답해하는 그에게 그레이후프는 그저 미소를 짓거나 웃어버리고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 할 뿐이었다. 그를 더 설득하는건 이미 포기한지 오래였다.


    그레이후프가 갑옷을 점검하고 닦는 동안, 깃털을 다 다듬은 플래시는 깃털을 다듬으며 두 앞발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캔틀롯성에서의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었다. 왕실 근위병으로서의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었다.


    도망치고 싶은 세상에서의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었다.


    “자, 여깄습니다.” 그레이후프는 셀레스티아의 햇빛 아래 반짝이는 금색 가슴판을 들어올리고 그의 주인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몸짓했다. 마지못해 플래시가 침대에서 내려오자, 그레이후프는 플래시에게 화려한 갑옷을 입혀 주었다.


    가슴판 다음으로는 어깨 보호구, 하체 보호구, 등판이 차례로 따라왔다. 그리고 그레이후프는 푸른색 안장 덮개를 등판에다 둘러주었다. 대부분의 다른 페가수스 근위대와는 다르게, 계급이 높은 플래시는 고귀한 파란 안장을 찼다. 안장의 깊은 푸른 색상은 그가 모시는 공주들에 대한 영원한 충성을 상징했다.


    마지막으로 그레이후프는 그에게 쇠편자를 신겨 주었다. 플래시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억지로라도 감탄했다. 화려한 금빛 갑옷은 그의 주황빛 털과 아주 잘 어울렸다. 그의 하인이 관리해주는 갑옷은 상관들이 칭찬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그레이후프가 입으로 빗을 집어올리자 플래시는 더 이상 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제발, 그레이후프.” 플래시가 콧방귀를 뀌고 하인에게서 빗을 빼앗아갔다. “갈기 정도는 내가 손질할 수 있다고.”


    눈이 커진 그레이후프는 한숨과 함께 주저앉았다. “주인님, 아시다시피-“


    “알아, 알아, 나도 안다고.” 플래시가 말을 끊었다. 그는 새파란 갈기를 다듬기 시작했다. 옷장에 붙은 거울에 비친, 빗질하는 자신의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선명했다. 그걸 신경써서 가릴 시간도 부족하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머리를 대충 다듬은 플래시는 침대 옆 탁자에 빗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잡혀있지 않았다. 만족시킬 상관도 없었다. 치근덕댈 암말도 없었다.


    다른 날과 똑같이 “-일”로 끝나는 오늘만이 있었다.


    투구까지 쓴 플래시는 갈기 색과 같은 푸른 깃을 매만지며 늙은 숫말에게 수줍게 미소지었다. “미안해 그레이후프.”


    그레이후프는 사과를 가볍게 받아 넘기고는 다시 일어나 미소를 돌려주었다. “괜찮습니다, 플래시 센트리님. 더 도와드릴 것이 있는지요?”


    플래시가 고개를 가로지었다. “없어, 그래도 매번 도와줘서 고마워 그레이후프.”


    “언제든지요, 주인님.”


    그레이후프는 걸어나가다 문 앞에서 멈추었다. 아직은 젊은 근위병을 지친 두 눈으로 돌아본 그는 씨익 웃으며 물었다. “아직도 걔한테 고백 안했니…플래시?”


    플래시가 웃었다. 생기 없는 푸른 두 눈과, 굳어진 표정과 함께한, 아무 의미 없는 우울한 웃음이었다.


    “그레이후프, 고백하는 그 날이 이 갑옷을 벗는 날이야.”


    둘 사이에 공감하는 듯 침묵이 흐르자, 그레이후프는 다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우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문고리를 돌리고 다시 플래시를 돌아보았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주인님.”


    그는 그레이후프의 낡은 발굽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새로운 하루를 맞는 척을 할 준비가 다 되자, 플래시는 자신의 방을 나섰다.


    아침을 먹으려 아래층으로 향하는 복도를 지나던 그의 귀에 순간 트와일라잇 스파클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의 공주는 플래시의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하얗게 빛나는 이가 가득한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느 한 보라빛 깃털도 정돈 안 된 것이 없었다. 그녀의 깃털은 그의 것보다 더욱 잘 다듬어져 있었다.


    순간 공주님의 깃털을 다듬어주는 상상이 지멋대로 떠올랐지만, 곧 플래시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갑작스럽게 욕지기가 밀려올라왔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게 언제나 가장 버티기 힘들었다.


    꼬르륵대는 배를 잠재우려고 계단으로 서두르는 다른 근위병들의 곁을 지나갈 때마다, 그녀는 하나 하나 쾌활하게 맞이해 주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리고 각 근위병들은 하나 하나 고개를 숙이고는 모두 똑같이 대답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주님.”


    그녀가 점점 다가오자, 플래시는 긴장했다.


    절대 익숙해지지 못할거야.


    조금씩 조금씩 다가갈 때마다 눈길은 자꾸 계단 쪽으로 향했다. 냉정을 잃은 모습을 공주님께 보이지 않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훈련에서처럼 앞만 바라보고 걷는 플래시는 긴장 때문에 침이 넘어가는 것을 최대한 참으려 애썼다.


    난 이퀘스트리아를 수호하는 왕실 근위병이자 충직한 기사이다. 그 무엇도 나의 의지를 흔들지 못한다. 그 무엇도 내 적수가 되지 못하며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나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


    나의 아버지 역시 근위병이었고, 나의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고조할아버지도-


    “좋은 아침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오직 몇 센티 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플래시는 그의 밝은 털 색깔을 원망하며, 몸을 낮추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공주님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이미 양 볼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그전에 고개를 숙였기를 바랬다.


    “좋-좋은 아침입니다, 공주님.” 잠시 비틀거린 그는 단호한 근위병보단 마치 어린 소년의 그것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가 즐겁게 웃고는 전과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고마워. 이제 일어나도 돼, 플래시.”


    플래시. 그 단어는 그녀의 혀 끝에서 굴러 떨어지는 쓰디쓴 암브로시아-그의 중독을 치료하는 해독제였다. 세 음절에 담긴 구원이자 저주였다. 그는 진심으로 그 단어를 사랑하고 또 증오했다.


    플래시는 속으로 투덜대며 날개를 접고 일어났다. 그의 날개는 자기들만의 생각이 있는 것처럼 시기적절하지 않게 용수철처럼 튀어오르곤 했다. “감-감사합니다, 공주님.” 자세를 바로잡으며 그가 말했다.


    트와일라잇은 그를 바라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을 때, 플래시는 약간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볼을 분명 본 듯 했다.


    전과 같이 플래시는 그 생각을 무시해 버렸다. 그냥 철없는 상상일 뿐이었다. 그녀는 공주-고귀하고 또 고귀한, 무형무체의 어머니 갤럭시아 다음가는 그런 존재였다. 그녀는 플래시같은 미천한 백성이 건드릴 수도 없을, 이 세상에 친히 내려온 여신과도 같았다.


    그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한 존재였지만, 그는 그저 공주를 위해 춤추는 하찮은 어릿광대에 불과했다.


    날개를 부스럭대다 갈기를 한번 가볍게 쓸어넘긴 트와일라잇 공주는, 마지막으로 미소짓고는 플래시 옆을 지나갔다. 고문 같던 시간이 지나가자 그는 안도했다. 안도의 한숨을 간신히 참은 그는 다시 계단으로 걸어갔다.


    트와일라잇의 목적지는 복도 끝에 있는 아이언후프 근위대장의 집무실이었다. 케이던스 공주와 결혼하고서 크리스탈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떠난 이후, 샤이닝 아머는 악명높은 아이언후프를 후임자로 임명했다. 끔찍한 그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플래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에게는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의 철없는 상상은 곧 그를 떠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플래시의 머릿속은 이룰 수 없는 꿈 대신, 오트밀과 계피, 설탕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


    남자의 마음을 얻는 지름길은 목구멍이다. 또는… 하고 농담은 계속된다. 플래시는 마음이 진정한 정답이 아닐까 하곤 했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아침밥을 앞에 둔 그는 오트밀 그릇을 이리저리 휘젓거나 숟가락에서 우유를 흘리며 놀고 있었다. 가끔 한 입 먹거나,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근위병들이 캔틀롯성 식당의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유니콘이 대부분이었고, 숫말 천지였다.


    여러 이유에서 외톨이였던 플래시 센트리는 식당 구석에 앉아있었다. 잠시 뒤면 외톨이 신세는 면할 수 있을 것이었다. 몇 분 넘게 음식만 뒤적거리다가 마침내, 흰색 페가수스 둘이 각자의 그릇을 들고 옆에 와 앉았다.


    “안녕 플래시.” 하나가 말했다.


    “안녕 샤프 스피어.” 플래시가 오트밀을 한 입 먹으며 대답했다.


    샤프 스피어가 씩 웃었다. “너 좀 험한 밤을 보낸 것 같은데. 어젯밤에 나갔다 왔냐?”


    “이쁜 여자들은 만나고?” 다른 페가수스가 오트밀을 한 입 크게 넘기면서 건방지게 물었다.


    플래시는 고개를 가로젓고 장난기 넘치는 친구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 스틸 윈드. 그런 일 없었어.”


    웃음기가 사라진 스틸 윈드와 샤프 스피어는 눈치 챈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식탁 쪽으로 몸을 기울인 샤프 스피어가 물었다. “너…너 괜찮냐, 플래시?”


    플래시는 다시 오트밀을 한 입 물었다. “괜찮아. 그냥 좀 힘들어서.”


    샤프 스피어가 뭐라 하려 입을 열자 스틸 윈드가 넌지시 옆구리를 찔렀다. 느리고 슬픈 고갯짓만으로도 스틸 윈드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샤프 스피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두 페가수스는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달콤한 귀리와 설탕, 계피를 마치 최후의 만찬인양 게걸스럽게 해치우고 있었다.


    한편 플래시는 매 숟갈 다름 없는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셋, 넷, 다섯. 열일곱 번째 숟갈에서 그릇이 비워졌다. 그는 아쉬운 듯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짝사랑은 달콤한 귀리의 맛조차 느낄 수 없게 한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거짓말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스틸 윈드가 말했다. “너 오늘 맡은 일이 뭐냐?”


    “오늘 알현식에서 셀레스티아 공주님 보초 서 드려야 해.” 플래시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나보다 낫네!” 샤프 스피어가 외쳤다. “아이언후프 그 노인네가 포니빌에서 열리는 다과회를 지키고 서있으라고 시키더라. 물론 모시는게 케이던스 공주님이지만, 솔직히, 다과회잖아!”


    스틸 윈드가 친구의 등을 때렸다. “그리고 넌 그런 간단한 일도 망쳐놓을걸!”


    두 친구는 누가 더 멍청이인가 서로 말다툼만 해 대고, 플래시는 다시 갑옷의 바다 위에 홀로 남겨졌다. 그는 그릇 속의 수저를 갖고 놀면서 둘의 싸움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은 언제나 저런 식으로 즐겁게 다퉈댔다. 둘과 친하지 않았다면 연인인 줄 알았을 것이다.


    작은 미소가 그의 입에 드리웠다. 그러나 다른 이의 행복은 기분을 잠시만 좋게 만들어 줄 뿐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트럼펫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식사가 끝이났다.


    이제부터 그의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마치 석상처럼, 플래시 센트리는 앞발에 창을 들고 알현실 문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아직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찾아 온 백성은 없었다. 적어도 다른 날은 두세 명씩 찾아왔었다. 저 멀리 재잘거리는 소리만이 그의 지루함을 달래주고 있었다.


    공주님이 백성들과 나누는 관세나 무역로나 국경이나 가문간의 불화 이야기에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귀족들과 공주들 자체가 그를 지루하다 못해 잠들게 할 정도였다. 그들의 교언 가득한 목소리를 듣는 것도 버티기 힘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릴 그 무엇도 없었다.


    창을 더욱 세게 붙잡으며, 플래시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생각이 마음껏 의식 속을 맴돌도록 내버려두었다…


     ~


    “잘 보렴, 아들아, 이게 질서란다.”


    열 살배기 플래시 센트리는 캔틀롯 중심가에 자리한 수수한 집에서 아버지의 앞발 위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체격 좋은 숫말에게서 그는 멀어지듯 몸을 기대었다. 화강암처럼 단단한 몸을 지닌 아버지는 퇴역한 근위병이었다. 마치 거친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처럼, 아버지의 목소리는 크게 울리고 또 잦아들었다.


    플래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 밖을 바라보다가 날개를 부스럭댔다. “무슨 뜻이에요, 아빠?”


    아버지는 발굽으로 시 중심가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고급 원단으로 몸을 치장한 유니콘 귀족들이, 새로 산 보석들이 가득한 봉투들을 곁에 가득 띄우고 걸어가고 있었다. “플래시, 뭐가 보이니?”


    “멋진 포니들이…많이 보이네요?” 그가 짐작해 보았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지. 저기서 눈에 띄는게 있니?


    생각에 잠긴 플래시의 날개가 움직였다. “음…”


    “저들은 가졌지만 우리에겐 없는게 뭐지?”


    “좋은 옷이요?”


    아버지가 다정하게 웃었다. “그거 말고.”


    “아! 뿔이요?”


    “그래, 플래시,” 아버지가 플래시의 어깨에 앞발을 살며시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들은 유니콘이란다. 마법을 쓸 줄 알지. 그리고 귀족이기도 해. 모두가 귀족은 아니지만, 귀족이 아니라면 군인이란다.”


    “아빠처럼요?”


    아버지는 자랑스럽다는 듯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들.” 그는 플래시의 헝클어진 갈기를 쓰다듬었다. “유니콘들은 대부분이 항상 왕실 근위대거나 귀족이란다.”


    “페가수스들은요?” 플래시가 물었다.


    “페가수스들은 다양하지. 우리들 대부분은 날씨 공장이나 근위대에서 일해.”


    “아. 그럼 어스포니는요?”


    “걔네에겐 날개나 뿔이 없지만 그들 안에도 마법은 충만하단다. 농사를 포함한 모든 노동은 그들이 다 맡아서 하고있어. 어스포니들은 도로나 다리, 집을 만들지. 또 물건을 팔고, 땅을 갈고, 작물을 수확하는 일도 한단다.”


    “걔네도 근위대에서 일하나요?”


    “거의 못하지.” 아버지가 대답했다. “마법이나 비행 기술 없이 체인즐링이나 다이아몬드 독 같은 적들하고 맞서 싸우기는 힘들어. 어스포니들은 전쟁같이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지원하지 못한단다.”


    “아.” 플래시는 그의 발굽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페가수스나 어스포니들은 왜 귀족이 아니죠?”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눈을 마주치면서 그가 물어보았다.


    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다. “그게 질서이기 때문이지, 아들아.”


    플래시가 눈을 깜빡였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일까?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너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알게 될거야, 모든 포니는 제 분수에 맞는 일을 하게끔 태어난단다.”


    “하지만 모든 포니는 말하고 쓸 줄 알잖아요!” 플래시가 반박했다. “그런게 귀족들이 하는 일 아닌가요? 서로에게 말하고 쓰는거요? 거래하고 협상하는거요?”


    “플래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단다.”


    “하지만-“


    “출신 성분에 따라서, 귀족이 되는거다, 아들아.” 아버지가 엄하게 말했다. 그는 아들의 어깨에서 앞발을 치웠다. “귀족들은 고귀한 핏줄을 가지고 있어. 공주님들의 먼 친척들이라고. 귀족은 만들어지지 않아. 태어나는거야. 바로 그게 질서란다.”


    “그럼…그럼 단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이 특별하다는 거예요?” 플래시가 분노와 혼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몸을 돌려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소리는 하지 않는게 좋단다.”


    “하지만-“


    “당장!” 화가 잔뜩 나 귀를 내린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플래시는 뒤로 움찔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주둥이를 잡고 돌려 그의 두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우리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있어. 우리가 무엇으로 태어났는지에 따라서. 넌 페가수스로 태어났어, 그것도 그냥 평범한 페가수스가 아니야. 왕실 근위대 페가수스로 태어났다고. 내가 근위병이었고, 네 할아버지도, 네 증조 할아버지도, 그리고-“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플래시가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면서 졸랐다. “죄송해요!”


    아버지가 한숨을 쉬었다. “이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야. 질서를 받아들여야 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래야만, 너가 어느정도 나이를 먹고 여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나중에-“


    플래시가 혀를 내밀고 헛구역질을 했다. “여자 애들이요? 우웩!”


    아버지가 웃으면서 아들을 감싸안았다. “생각보다 금방 찾아올거야.”


    “생각보다 금방…”


    ~


    육중한 알현실 문을 여는 알리콘 마법의 소리에, 플래시의 생각은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창 끝을 체크무늬 돌바닥에 강하게 내리꽂으며, 차렷 자세로 공주님이 그날의 첫번째 방문객을 맞이하는 것을 가늘게 뜬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문이 열리자 문지방에는 순해 보이는 어스포니 하나가 잔뜩 움츠러든 채 서 있었다. 두 페가수스 근위병이 그녀를 데리고 들어왔다. 눈을 크게 뜨고 주둥이가 덜덜 떨리는 그 암말은 한 발자국 떼기도 무서워 하는 것처럼 보였다.


    플래시 센트리는 무표정하게 그녀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어서 오렴.”  셀레스티아가 그녀의 거대한 뿔에서 나온 마법으로 다시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녀의 백성이 다가오는 동안 셀레스티아는 흐트러짐 없이 왕좌에 권위있게 앉아있었다. 초라해 보이는 암말이 붉은 카펫 위에서 몸을 숙여 인사하자 미소 짓는 셀레스티아 뒤에선, 우아한 갈기가 들리지 않는 리듬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드-들어오게 해 주셔서 가-가-감사합니다, 전하.” 바닥에 바짝 붙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셀레스티아가 눈치를 주자 두 근위병은 물론이고 플래시도 몸을 숙였다.


    “여기엔 언제나 환영이란다, 내 충직한 백성이여.” 미소와 함께 갈기를 넘기며 , 셀레스티아는 암말이 일어나도록 지시했다. 그녀는 서로 부딪히며 달달 떨리는 네 다리로 몸을 일으켰다.


    셀레스티아는 목청을 가다듬고 자리 옆에 가득 쌓여있는 두루마리들 중 하나를 마법으로 꺼냈다. “자, 그럼, 이름이-“


    “크-클로버입니다, 전하.”


    클로버가 말을 자르자 옆에 서 있던 두 근위병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플래시는 창을 더 세게 쥐고 눈에 힘을 잔뜩 주었다. 셀레스티아는 실수에 대한 지적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래, 클로버양. 하고 싶은… 요청이 있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맞지?”


    “마-맞습니다, 전하.” 초초한 듯 앞발만 바라보던 클로버가 침을 삼켰다.


    “그렇군.” 클로버의 편지를 앞에 띄운 셀레스티아는 편지를 다시 읽어보고는 가볍게 웃었다. “아, 그렇군.”


    클로버는 갸우뚱한 고개를 살짝 들었다. “저-전하?”


    “보아하니 마음 깊이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사귄 것 같구나,” 편지를 읽는 셀레스티아의 입에는 자상한 미소가 퍼지고 있었다. “운이 좋구나, 클로버. 사랑은 정말 중요하지.”


    클로버의 긴장 섞인 작은 웃음소리에 플래시의 머리에 바짝 붙었던 귀도 다시 세워지고 그의 표정도 편안해졌다. 반면 다른 근위병들은 이에 상관없이 근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감사합니다, 전하.” 클로버가 바닥을 발로 긁었다. “저…저는 그이를 정말 사랑해요.”


    “진심이란거 안단다.” 셀레스티아는 미소 지은 뒤, 다시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또 처음부터 편지를 읽는 데 몇 초의 시간이 흘렀다. 긴장한 클로버의 발굽 소리를 제외하고는 알현실에는 오로지 정적만이 흘렀다.


    그 순간, 충직한 백성의 사랑 이야기에 퍼졌던 미소만큼이나 빠르게, 셀레스티아의 표정은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아, 그런데 그이가 유니콘이구나.”


    클로버가 고개를 들었다. “네, 저-전하. 오리온은 귀족 집안의 아-“


    “안타깝구나.” 두루마리를 접어올려 자리 옆에 마련된 다른 더미 위에 올려놓으며 셀레스티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발굽을 가슴에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구나 클로버.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지 않구나.”


    “하지만…” 순했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클로버는 콜록였다. “하지만…하지만 그이…그이와 전…서로 정말 사랑해요, 전하. 그저, 저희 가족이-“


    셀레스티아는 앞발을 들며 단호히 말했다. “미안하구나, 클로버, 내가 해 줄 수 있는게 없구나. 우리 법을 잘 알잖니.” 그녀는 말을 이으며 앞발을 가슴에 댔다. “이퀘스트리아가 건국될 때부터 우리는 전통을 따랐고, 나는 그의 집행자로서,  거스를 생각이 없단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입을 그저 열었다 닫았다 하는 클로버의 입술이 떨렸다. “하지만…하지만…하지만, 전-“


    “미안하구나, 클로버.” 다시 대답하는 셀레스티아의 목소리에서 동정하는 투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왕좌에서 자세를 고쳐 앉고는 설명했다. “이유가 얼마나 그럴듯 하더라도, 법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단다. 너가 오리온에게 가진, 또 오리온이 너에게 가진 사랑은 정말로 아름답지만, 나는 결혼과 같은 정말 중요한 전통이 깨지도록 둘 수 없단다, 단지…”


    셀레스티아는 잠시 주춤하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고 한숨을 쉬며 단호히 말했다. “감정 때문에.”


    문 옆에 서 있던 플래시가 창을 더욱 세게 붙잡은 것은 셀레스티아의 발 아래 당황해 움추린 암말 때문이 아니었다. 소리지르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고 턱을 굳게 다문 그는, 오래되고도 역겨운 분노가 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눈 앞의 상황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클로버의 발 아래 양탄자가 눈물로 적셔지는 동안, 플래시는 몸을 지탱하려는지, 아니면 창이 닿은 바닥으로 분노를 흘려보내려고 하는지 창을 더욱 세게 쥐었다.


    “제…제발…” 눈물이 앞을 가린 클로버가 울먹였다. “부탁드립니다, 전하…전…그이를 사랑한다고요! 저는 그이를 정말 사랑한다고요!”


    “나도 잘 안단다.” 클로버를 내려다보며 다시 온화한 표정을 지은 셀레스티아가 말했다. “나도 잘 안단다, 클로버. 이런 실수를 저지른건 너가 처음이 아니야. 클로버, 너는 그저 착각한 것 뿐이란다.”


    셀레스티아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흐느끼는 암말의 고개를 앞발로 들어 올렸다. “어린 클로버, 너는 그저 착각한 것 뿐이야. 너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못한단다. 그건 자연스럽지도, 질서에 맞지도 않아. 내가 사랑의 감정을 칭송하는 만큼, 너의 착각을 눈 감아주기는 어렵구나.”


    클로버가 훌쩍였다. “하지만…하지만-“


    “미안하구나.” 셀레스티아가 단호히 말을 잘랐다. “제발, 가서 네 분수에 맞는 숫말을 찾으렴. 우리의 조상이 정해놓은 길을 따르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단다.”


    셀레스티아의 미소에서 아무런 위안을 찾지 못한 클로버는 계속 말을 더듬으며 반문했다. 공주가 문으로 고갯짓 했을 때까지도 클로버가 내뱉은 말은 그저 몇 개의 단어에 불과했다. 신호에 맞춰, 두 근위병은 클로버의 어깨를 앞발로 붙잡고선 그녀를 문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클로버의 두 눈이 커졌다. 굳센 숫말들에게 무력하게 붙잡힌 그녀는 마구잡이로 발을 휘둘렀다. “안됩니다! 제발! 전하! 제발! 안됩니다! 잠깐만요!”


    셀레스티아가 발을 땅에 세게 구르자 큰 소리가 벽과 천장에 울려 퍼졌다. “진정해라 클로버! 이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최선의 결정이야!”


    “안돼요! 제발! 전하! 저…저는 그이를 사랑해요!” 흐느끼는 클로버가 바닥에 질질 끌려가며 몸부림쳤다. 날아오른 페가수스 근위병들은 그녀를 열린 문 사이로 손쉽게 끌고 나갔다.


    육중한 문 사이로 사라지면서, 클로버의 눈은 플래시에게 고정되었다. 순간, 그녀의 반짝이는 동공에 비친 누군가를 바라보는 플래시는 찬 기운이 온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문을 다시 굳게 닫은 셀레스티아 공주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근위병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내게서 뭔 대답이 나오기를 바랬던 것일까, 플래시 센트리?”


    공주의 물음에 플래시는 몸을 숙이고는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공주님께선 정말 지혜롭고, 또…” 그는 침을 삼키며 잠시 말을 멈췄다. “올바른 선택을 내리신 겁니다, 공주님.”


    다시 한숨을 내쉬며, 셀레스티아 공주는 몸을 돌려 왕좌로 향했다. “내가 금지된 사랑에 빠진 처지를 측은히 여기긴 하지만…”


    이퀘스트리아와 함께 질서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두 공주가 힘을 합쳐 디스코드를 물리치는 장면을 그린 스테인드 글라스를 바라보며, 그녀는 말을 흐렸다.


    “법은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셀레스티아는 다시 왕좌 위에 앉으며 단호히 말을 맿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플래시는 시선 끝에서 공주가 다시 고갯짓을 했을 때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남은 알현식은 무사히 흘러갔다.


    그러나 하루종일 플래시의 머릿속에서는 클로버의 울음 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


    루나의 월출을 알리는, 플룻과 클라리넷이 어우러진 캔틀롯 왕실군악대의 섬세한 세레나데가 울려퍼지고 나서야 플래시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올 수 있었다.


    자기 방에 들어간 그는 갑옷을 벗지 않은 채 관물대에 창을 잠궈두었다. 다시 배가 꼬르륵 거리자 머릿속이 야채 수프와 싱싱한 샐러드로 듬뿍 차려진 밥상 생각으로 가득 채워졌다. 또 다른 하루가 끝난다는 즐거운 마음과 함께 방에서 나가려 돌아선 플래시는 문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발을 멈췄다.


    저 소심한 노크 소리를 못 알아챌 리 없었다.


    “들어와, 그레이후프.” 그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레이후프는 얼굴에 친절한 미소를 띤 채 걸어들어왔다. “좋은 저녁입니다 플래시 센트리님. 아무 탈 없는 하루였기를 빕니다.”


    한숨을 쉬며 날개를 접은 플래시는 아무 생각 없이 바닥을 앞발로 두드리며 말했다. “완벽한 세상에서의 또 다른 하루야, 그레이후프.”


    코 위의 안경을 고쳐 쓰며, 그레이후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네, 주인님.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저녁 식사는 하셨는지요? 안 하셨다면 제가 주인님을 위해서 뭐라도 갖고-“


    “아니, 괜찮아.” 플래시는 앞발을 들었다. “게다가 저녁을 거른다면 스틸하고 스피어가 더 미심쩍어 할거라고.”


    가벼운 웃음과 함께 그레이후프는 고개를 젓고 말했다. “아, 네, 주인님. 그 둘은 정말… 눈치가 빠르죠.”


    플래시는 예전에 그의 친절한 하인을 짝퉁 친구들이 어떻게 다뤘지를 떠올리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수많은 차가운 눈초리 뒤에야 그들은 비로소 그레이후프를 포니처럼 대우했다.


    다시 한숨을 내쉰 플래시는 화제를 그 불량배들에게서 돌리기로 했다. “그레이후프, 그래서 무슨 용건 있어?”


    그레이후프는 헛기침 뒤에 옷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냈다. “주인님, 아이언후프 대장님께서 주인님께 보내신 편지입니다.”


    이름을 듣자마자 짜증이 난 플래시가 내뱉었다. “그 포니가 뭐라든?”

    독기 섞인 그의 목소리를 눈치 챈 그레이후프는 문으로 한걸음 물러선 뒤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대장님께서 시급히 집무실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침대맡 탁자에다 편지를 올려놓았다.


    플래시의 고개가 땅으로 푹 꺼졌다. “하지만…왜?”


    입을 가리고 기침한 그레이후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플래시 센트리님.” 그는 문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한숨을 쉬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시간이 늦어지는데, 곧 저도 저녁을 먹으러 가야 할 것 같군요.”


    발 밑 땅에 시선을 고정한 플래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아…알겠어, 그럼.”


    그레이후프는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었다.


    “그레이후프?”


    어깨 너머로 그가 쳐다보았다. “네 주인님?”


    “나…” 말을 멎은 플래시는 시선 한구석의 작은 쪽지를 바라보고 침을 크게 삼켰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그레이후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를 위해 해주는 것 모두 정말 고마워, 그레이후프.”


    희미한 미소를 띠운 늙은 숫말은 고개를 숙이고는 웃었다. “아, 괜찮습니다, 주인님.”


    그는 잠시 말을 멎었다, 다시 “질서에 따르는 것 뿐이에요.”


    플래시가 대꾸하기도 전에 그레이후프는 문 사이로 사라졌다.


    “네게 행운이 있기를, 플래시.”


    ~


    플래시의 방부터 아이언후프 대장의 집무실까지의 천릿길은 한 걸음부터가 아니라 떨리는 한숨과 함께 시작되었다. 초초하고도 두려운 마음 때문에 솟아오르는 날개를 정돈하면서 그는 길을 걸어갔다. 이 시간에는 근위대 동료들 그 누구도 복도를 지나다니지 않았기에 그의 발소리는 낡은 돌바닥을 타고 크게 울려퍼졌다.


    플래시가 마침내 문 앞에 도착하자 대장의 굵직한 웃음소리가 벽을 넘어 들려왔다. 그가 입술을 깨물고 문을 크게 두드리자 그 흐릿한 웃음소리는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는 아까와 같은 굵직한 목소리가 소리쳤다. “서빙 벨, 문 열어!”


    어린 어스포니 하나가 대장 대신 문을 열었다. 문 앞에 페가수스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란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아-안녕하시-“


    “아! 이제야 오는구만!” 아이언후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오며 웃었다. 우락부락한 은색 페가수스가 웃으며 그를 맞이하자 플래시도 살짝 미소지었다.


    아이언후프는 하인의 목에 앞다리를 걸쳐 끌어당기며 사나운 눈길을 보냈다. “손님을 그런 식으로 맞이하면 안되지, 서빙 벨!”


    “네-넵, 주인님!”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한 그는 주인의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엎드려 빌었다. “죄-죄-죄송합니다!”


    “흥, 주방에 가서 포도주나 좀 가져와!” 그는 험악한 미소와 함께 하인을 문 밖으로 밀쳐내고 플래시에게 들어오라고 몸짓했다.


    플래시는 얼굴 아래 감춰진 언짢은 기색과 두 날개에 잔뜩 들어간 힘을 필사적으로 감추면서 명령에 따랐다. 그리고는 서둘러 달려나가는 하인에게 길을 비켜주며 지었던 웃음을 그대로 띠고 아이언후프를 마주했다.


    “만나서 반갑군, 플래시.” 아이언후프가 플래시를 책상 반대편 의자로 안내하며 말했다. “앉게나.”


    “감사합니다, 대장님.” 플래시가 앉으며 말했다. 자리를 잡은 그는 두 발을 무릎 위에 모았다. “저도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아이언후프가 웃었다. “물론. 오늘 우리 아름다우신 공주님들을 모시는데 아무 문제 없었겠지?” 그가 앉으며 책상 위에 놓인 쟁반을 가리켰다. “마음껏 먹어도 돼.”


    플래시는 쟁반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 위에는 무화과와 대추야자, 콩소스를 곁들인 빵, 캐슈와 마카다미아 땅콩, 귤을 올린 이파리 샐러드, 그리고 코코넛 가루를 뿌린 초콜릿 푸딩과 같은 각종 산해진미들이 올려져 있었다.


    “왕실 근위대장을 위한 특식이지.” 플래시가 배가 고프다는 것을 눈치챈 아이언후프가 씩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자네와 같이 식사를 하고 싶군. 먹게나.”


    플래시는 눈초리를 올리며 대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대장님? 왜…왜 이런-“


    “그동안 쭉 지켜보고 있었네.” 아이언후프는 무화과 하나를 집어 올려, 가볍게 웃고는 과일을 한 입 베어물었다. “음. 그래, 셀레스티아 공주님과 루나 공주님으로부터 자네에 대한 좋은 말을 많이 들었네.”


    플래시는 발 아래 푸른색 카페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장님.”


    “아니, 고마워해야 할 포니는 나지.” 캐슈를 몇 개 집으며 아이언후프가 말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과 루나 공주님의 알현식 호위 역할을 동시에 맡은 기사는 그리 많지 않다고. 게다가 자네같이 군기가 잘 들어간 기사는 더더욱 없네.”


    “그러고 보니 오늘 사고가 좀 있었다더구만…” 헛기침을 하며 아이언후프가 웃었다. “암말 어스포니였다지.” 입 안에서 캐슈를 터뜨린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뭔 매춘부같은 암말이 캔틀롯의 정정한 유니콘 숫말을 넘보다니…말이 되나?”


    “안됩니다, 대장님” 플래시가 뒷발을 가지런히 모으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어떤 바보같은 녀석들이 사랑 타령하느라 우리의 신성한 전통과 법을 깨뜨릴 생각이나 하고 앉아있다니…” 아이언후프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쟁반을 다시 가리키며 말했다. “뭐하고 있는 건가? 먹게.”


    “넵, 대장님.” 플래시는 포크를 집어 이파리 몇 개와 오랜지를 입에 넣었다. 썼다. 그래도 그는 씹었다.


    아이언후프가 등받이에 기대어 책상 위에 발을 올렸다. “그년이 성이 다 떠나가게 소리를 질러 댔는데도 자넨 평정을 잃지 않았다더군.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그 암말을 밖으로 끌고 나간 두 근위병에게도 만족하셨지만, 플래시 자네는…” 아이언후프는 캐슈를 씹으며 플래시를 가리켰다. “공주님께서 특히 높게 평가하시더군.”


    플래시는 입 안 음식을 넘기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장님.”


    “편히 쉬어.” 아이언후프가 몸짓했다. 그는 마법으로 빵 하나를 집어 콩소스에 찍으며 말했다. “자네는 잘 모르겠다만,” 빵을 소스에 휘저으면서 그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난 자네가 마음에 들어, 플래시 센트리.”


    아이언후프와 눈이 마주친 플래시는 입 안 가득 시금치와 양배추를 물고 있는 것을 핑계 삼아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유니콘이 아닌게 안타까울 따름이지…” 아이언후프가 미소 지으며 빵을 씹어 먹었다. “유니콘이었다면, 내가 샤이닝 아머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처럼 자네도 몇 년 뒤엔 대장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이언후프의 칭찬에 플래시는 자부심을 느낄 법도 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아이언후프의 말은 공허한 울림에 불과했다. 플래시는 음식을 한 입 베어물며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감사의 표시가 없는 것에 대해 아이언후프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코스를 옮긴 그는 디저트를 가득 퍼올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눈짓과 함께 이빨을 가득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누가 알어? 나도 곧 공주를 신부로 맞는 두 번째 근위대장이 될 걸세.”


    플래시는 하마터면 포크를 삼킬 뻔 했다.


    “음, 그래…” 푸딩을 삼키고 입술을 핥는 아이언후프가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트와일라잇 스파클 공주…지적이고…강력하고…또…아름다워…”


    강하게 깨물은 포크가 입 안에서 플래시의 혀를 할퀴었다. 금속제 포크를 씹는 그의 피가 들끓었다. 한편 아이언후프는 곁의 플래시도 까맣게 잊은 채, 새로 임명된 마법의 공주를 찬양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케이던스보다 더욱 아름답지, 그래…사랑스럽고 얌전하지만, 또 성깔도 조금 있어. 아주 완벽해.”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 있으면 신년 무도회가 열리니까… 왕실 근위대장으로서, 이번에는 내가 공주님을 모시게 될 거야.”


    “정말 대단한 밤이 될 것이네.” 말을 마치며 그는 그의 부하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포크를 빼낸 플래시의 입 안은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그는 주둥이 가득 억지로 미소지었다. “네, 대장님. 분명 그럴겁니다.”


    아이언후프는 수저를 마법으로 내려놓고 책상 건너편으로 몸을 기울였다. “자, 이제 자네를 여기로 부른 이유를 알려주지. 자네에게 새로운 보직이 주어졌네. 내일부터는 트와일라잇 스파클 공주의 알현식에서 보초를 서게.”


    눈이 커진 플래시는 붉어진 볼과  펴지려는 날개를 숨기려 노력했다. “내-내일부텁니까, 대장님?”


    “그래, 내일부터.” 대장은 냉정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난 자네가 최선을 다 해낼 것이라고 기대하네. 비록 유니콘은 아니지만, 우리가 가진 페가수스 중에서는 자네가 최고라고. 또 새 공주님의 알현식 보초로 믿을만한 포니가 필요했거든.” 그가 씩 웃으며 앞발로 가슴을 문질렀다. “불쌍한 우리 아가씨께서 긴장을 많이 타시잖아…”


    네가 뭘 안다고, 이 늙고, 오만하고, 거만한 개새-


    “주인님! 주인님!” 서빙 벨이 잔 두 개와 반 쯤 빈 포도주 병이 올려진 쟁반과 함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아이언후프 주인님! 주-주방에 일손이 부-부족해서 몇몇-“


    “더러운 하층민들 걱정하느라 정작 내 명령에는 늦어?” 아이언후프가 회청색 마법으로 쟁반을 확 낚아채며 으르렁댔다. “네가 감히!”


    “죄-죄송합니다, 대-“


    “당장 나가!” 아이언후프가 마법으로 문을 열어젖히며 외쳤다. 서빙 벨은 몸을 잔뜩 숙여 인사를 하고, 갈기와 목이 땀 범벅이 된 채 사색이 되어 서둘러 뛰어나갔다.


    “하, 쟨 신경쓰지마,” 아이언후프가 투덜거리며 잔 하나를 플래시에게 건네주었다. “어스포니들은. 흥. 자네가 유니콘 마법의 고귀함을 모르는게 참 안타깝군…”


    “맞습니다, 대장님,” 플래시가 잔을 집으며 나직이 대답했다. “참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페가수스는 괜찮은 중간계층이라고.” 아이언후프가 포도주 한모금을 마시며 말했다. “자네도 어쩌면 무도회에서 괜찮은 날씨팀 페가수스 암말을 만날 수도 있겠지. 아니면 원더볼트 단원일지 누가 알어!”


    “헤, 네, 대장님…”


    플래시는 자신의 공적 자랑과 트와일라잇 공주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는 아이언후프 곁을 식사가 끝날 때까지 지키고 있었다. 그는 음식은 거의 건드리지 않고 포도주 맛만 보았다.


    일이 다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는 플래시의 마음 속에서는, 차가운 성의 돌바닥에 발굽이 부딪치며 퍼지는 공허한 메아리가 분노가 식은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더이상 그는 가슴이 답답하지도 볼이 붉지도 않았다. 근육 속의 불길도 사그라들었고 파란 눈동자 속의 얼음도 녹아내렸다.


    내일에 대한 기대만이 그의 마음속을 맴돌았다.





    내일 오후 6시에 2부 올리겠습니다.
    키아노케의 꼬릿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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