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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78081
    작성자 : 숏다리코뿔소
    추천 : 21
    조회수 : 2724
    IP : 119.195.***.22
    댓글 : 5개
    등록시간 : 2015/03/06 10:30:09
    http://todayhumor.com/?panic_78081 모바일
    [단편] 님의 은총 (BGM)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CrVuQ






    죽여 버리겠다는, 그런 뜨거운 선언 받아 본 적 없었기에,
    샤론 스톤, 애마부인 이후 내 생에 가장 뜨거운 여인은 단연 그녀일 것이다.

    그녀는 겨울의 시작과 함께 나를 찾았다.
    그녀와 함께 시작한 겨울이었기 때문일까,
    작년 겨울의 추위 또한 유달리 화끈하지 않았었나 싶다.

    아주 지겨우리만치 그랬다.

    오늘의 퇴근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오늘 추위를 화끈함에 비견할 단어가 있을까.

    잠깐 유격행군의 뙤약볕이란 말이 떠올랐다가,
    역시 그녀에게 견주기엔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퇴근길이 고역이었다.

    부리세운 바람은 팔방으로 미쳐 날뛰었다.
    뺨이며 눈덩이를 사정없이 쪼인 탓인지
    얼굴이 온통 따끔거리다 못해 얼얼해 마취를 당한 듯 감각이 무뎠다.

    허벅살이 에이는 듯한 냉기가 잠바 밑으로 전력질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 후드를 깊이 뒤집어 쓴 채 다녀도 된다는 것이리라.

    이렇게 화끈한 추위에 그것만큼의 위안은 없을 법했다.
    온 세상 여자들 무서워라 벌벌 떨며 다닐 필요가 없어진 덕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번 겨울이 유독 고되고 길어서 아주 지겹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제 입춘도 지났는데, 아직 나는 겨울 잠바를 입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 또한 그랬다. 나와 거리의 사람들처럼,
    아직 그녀에게도 지겹도록 봄은 오지 않고 있었다.

    집에 그녀가 다녀간 모양이었다.

    말끔해진 방이 그렇다고 말한다.
    현관 앞에 정갈히 놓인 시퍼런 부엌칼이 날 반긴다.

    방이 깨끗해진 탓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럴 법 한 건지,
    현관 앞에 버젓이 놓인 칼 한 자루는 오늘도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뽐낸다.

    번뜩이는 칼날의 각 잡힌 모습.

    주방에서 보는 것과 현관 앞에서 보는 날선 쇠붙이의 차이일까.
    칼을 볼 때마다 무언가를 썰었던 감촉보다,
    어딘가가 썰리는 찰나의 섬뜩함과 끔찍이도 예리한 감촉이 떠오른다.

    그녀에게 칼 좀 버리지 말란 말을 들었으니,
    버리지 않고 신발장에 가만 얹어둬야 뒤탈이 없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 두니 번거롭게 찾아다니지 마시고 다음에 또 쓰시길.

    목욕물 온도를 신나게 올려놓고 들어선 욕실에는 거울 가득 립스틱으로 낙서가 되어있다.
    앙증맞은 글씨체에 두껍고 빨간 글자에 울렁증이 인다. 단순 글자 탓만 하기는 애매하다.

    욕실에 묘하게 남아있는 여자의 냄새 탓일지도 몰랐다.
    정확히는 화장품 냄새라고 해야할까.

    나는 이름 잘 모르는 분 냄새라고 해야할까.

    오.늘.은.기.다.리.기.힘.들.겠.다.
    다.음.에.올.게.

    오.빠.

    마지막에 입술 도장으로 멋지게 마침표를 찍었다.
    매번 이런 식이다. 또 다음이라. 오늘은 보통 안 된다.
    적어도 내일 온다. 그녀는 그런 여자다.

    또 다음이 되면 언제가 될까. 오늘이 아니면 나중에,
    나중이라면 당장 내일일지도, 혹은 다음 주일 수도 있다.

    보통 같지 않은 날이라면 당장 오늘밤 일지도 모를 일이다.
    때가 된다면 아마 그녀에게 주저함이란 보이지 않을 거다.

    어울리지도 않는다.

    씻고 나오니 컴퓨터가 켜져 있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선물이다.

    모니터에는 화면이 새빨갛게 피칠갑 된 영화가 정지되어있다.
    아무리 그녀의 선물이라지만 열어 볼 마음은 생기질 않는다.
    벌써부터 이렇게 빨갛다면 도대체 앞으로 얼마나
    더 잔인한 장면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는 걸까.

    도가 지나친 영상을 구태여 보고픈 마음은 옛 경험으로 깔끔히 가셨다.
    무슨 일본 영화였는데. 바로 지워서 제목도 배우도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아니하거니와. 다만 그녀가 준비해준 장면의 대사와 연기는 똑똑히 기억한다.

    “이 놈은 이제 투명하게 될 거니까.”

    배우는 토막난 시체를 발로 차며 그런 말을 했다.
    긴가민가하지만 발로 차면서 나중에는 나에게 까부니까,
    비슷한 말로 길길이 날 뛰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을 투명하게 만든다는 말의 의미심장함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내 인생의 마지막 편을 본 느낌이 그런 거였을까.

    그녀가 영상 편지를 써준 것만 같다.
    짧은 내용이나마 내용에 핵펀치 같은 위력을 담아.

    “너도 저렇게 될 거야.”

    그렇게.

    정말이지 신박한 여자가 아닐 수 없다. 아니, 교묘한 여자. 아니다.
    그녀에게는 치사하다는 말이 꼭 쓰고 싶다.

    욕실에 립스틱으로 남기는 글부터 그렇다. 오빠, 오빠.

    오빠 나 다녀가. 입술 도장.
    오빠 나 보고 싶어? 입술 도장.
    오빠 나 또 올게. 입술 도장.
    오빠 오늘 밤에 죽었어. 입.술.도.장.

    누가 보면 정말 오빠거나 오빠라고 부르는 관계만 같잖아.
    오빠라고 부르는 관계가 집에 들락거리는 그런 관계인 것만 같잖아.

    치사하다는 말을 꼭 쓰고 싶다만, 사실 영리하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방을 말끔히 청소하는 치밀함 또한 그렇다.
    나름 범인을 잡아보겠노라 몰래 핸드폰을 동영상 촬영으로 설정해 놓고 출근 한 적이 있었다.

    결과, 보기 좋게 핸드폰만 압수만 당하고 끝났다.

    그날 립스틱으로 남긴 말은
    오빠는 너무 핸드폰만 봐, 였다.

    물 가득한 세면대에 유심칩이 동동 떠다니던 모습이 선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변기통에서 익사한 채 발견 된 핸드폰 또한 발견됐다.

    내가 그렇게 연관 짓고 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두 살인 방법에 대한 암시와 조소들이 가득한 행동으로만 생각 된다.

    물에 절은 핸드폰으로 개기지 말라, 하는 뜻을 강경히 표현한 느낌이다.

    그 일이 있은 후로 그녀는 다녀갈 때마다 방 청소를 하고 떠난다.
    굉장히 흡족스럽게. 그녀가 딱히 방에서 하는 것도 없다는 걸 생각해보자면,
    얼굴이 팔리는 것이 그녀에게 얼마만큼 위험한 일인지 어림짐작이 된다.

    먹을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분명 밥하고 찬거리 만들어 놓는 일,
    욕실 거울에 립스틱 낙서와 입술 도장, 방 청소,

    딱 한 가지 현관에 가지런히 놓는 칼을 제외하자면 딱히 찔릴 것도 없을 것이다.
    비록 활보하는 장소가 생판 남의 방이라지만.

    그래도 인생 새옹지마라던가, 방이 깨끗해진다는 점이 사실 싫지만은 않다.

    그녀와 술 한 잔 할 때는 이제 이렇게 불쑥 찾아와 식칼을 셋팅하고
    립스틱으로 글귀 남기는 일은 아마 없어지겠지 생각했었는데.

    착각한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인지,
    사실 누구든 나처럼 받아드리는 게 정상인 건지, 모르겠다.

    내 앞에서 찔끔찔끔 눈물까지 흘려 놓고는.

    다시 생각해보니, 영리하다는 말보다는 약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이부자리를 펴고 자리에 누우니 내 샴푸 냄새인지
    그녀가 남기고 간 냄새인지 모를 애매한 향이 느껴진다.

    달콤한 것 같지만 역시 화장품 냄새인 건지 끝 맛이 쓴 느낌이 든다.

    *

    중학교 2학년 정도였을 것이다.

    할아버지께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안하다.” 는 말을 들었던 일이.
    난처해하시는 할아버지의 표정 앞에 되려 내가 더 죄송스러워지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만,
    과연 그래도 할아버지께서도 미안, 한마디 즘은 할 수도 있을 법한 일이었다.

    산천초목 우거진 동네에 살았던 나와 할아버지는
    나무로 빗장을 거는 대문을 걸어 잠구는 구식 주택에 살았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누구도
    그 대문을 잠구고 외출하는 일은 없었다.

    희한하게도 잠을 자는 밤에는 빗장을 걸었다만, 외출 시엔 어째서인지 그랬다.

    그것을 시골 인심이라고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시골 안심이라는 표현이 있었다면 딱 어울렸을지 모른다.

    대낮에 열려있는 대문에 시골 사람인 우리는 딱히 우려를 표하지 않았다.
    우리 동네 사람은 모두 그랬을 것이다.

    그게 2000년대 초반이었으니, 당연하다는 것처럼 도둑이 들었다.

    당시 값 깨나 처주던 29인치 LCD TV와 컴퓨터 본체가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겨우 중2 정도였던 나에게는 거진 삶의 정수와도 같은 물건들이었다.

    그렇게 상실감을 느껴본 건 생에 처음이었을 거다.

    그래서 라면 그래서인데, 그때 왔던 경찰 아저씨를 잊지 못한다.

    남산만하던 배와 겨드랑이에 그득 배인 땀,
    턱이 자연히 2중으로 접히던 두툼한 살집,
    흰색 모자에 박힌 노오란 독수리.

    나는 도둑놈의 침입과 절도행위를 신고할 마음과 분노에 가득차 112를 눌렀지만,
    결과적으로 그건 한 명의 피해자가 또 하나의 사건을 경찰에게 단순 ‘통보’한 것에
    불과하지 않았다. 경찰 아저씨의 말이 잊히질 않는다.

    “이 동네만 벌써 세 번째네...”

    방에는 급하게 들어왔던 도둑의 발자국이 현관부터 내방 이불에까지 선명히 남아있었다.

    놈은 구둣발로 현관에서 침입해 곧장 내 방으로 직행했고,
    능숙한 솜씨로 컴퓨터와 TV를 챙겨 나갔다.

    거칠게 딸려 나온 마우스나 키보드 선들이 그 신속함과 수법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 범죄 수사드라마 좀 봤었기 때문인지, 지문 감식 과학 수사는 바라지 않아도,
    사진은 몇 장 찍고 신발 사이즈 정도는 측정하고 갈 줄 알았다.

    하지만 경찰 아저씨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뉘앙스를 몇 번 풍긴 채 사라졌다.

    나 이전에 두 번의 피해가 있을 동안 우리 작은 동네에
    귀뜸 해주러 다니기는 너무 바빴던 걸까.

    우리 동네는 겨우 여섯 가구가 사는 동네였다.
    걸어서도 한바퀴 10분인 동네를, 이란 울분이 기억난다.

    그 사건으로 내가 건진 것은
    도둑놈의 어렴풋한 신발 프린팅과
    잃어버린 컴퓨터만큼의 묵직한 허망감,
    우리 동네에서 최소 세 번의 컴퓨터 전문 절도가 발생했었다는 사실.

    그 정도였다.

    물론 그것만을 핑계로 그녀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고하면 금방이라도 날 죽일 것 같은 그녀의 성실함에 나는 더 믿음이 갔을 뿐이다.

    “이 동네에서는 첫 번째네...”

    라는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저씨가 눈에 선하다.

    애매한 증거들 또한 문제였다.

    무언가를 찍어보겠다는 마음은 익사한 핸드폰을 떠올릴 때면
    쥐도 새도 모르게 고갤 감추곤 했다.

    목숨을 담보로 하기엔 그녀의 치밀함이 나보다는 한 단 수 위라는 위압감도 있었다.

    그 외에 증거라곤 가지런히 놓인 식칼, 립스틱 낙서,
    전등에 걸어 놨던 괴기스런 옷걸이, 깨끗이 청소되어있는 방,
    잔혹한 영화의 정지 장면, 먹으면 죽을 수도 있지만 또 살 수도 있는 음식 정도였다.

    그런 것들은 도둑놈의 신발 프린팅에 비하자면 정말이지 하찮았다.

    내가 가진 증거는 마치 오빠라고 부르는 관계의 누군가가
    오빠네 집에 들락거리는 풍경일 뿐이지 않은가.

    심지어 음식까지 해놓고 떠난다. 이건 조금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을 만큼 치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녀는 나에 대한 정보가 수두룩해서
    나와 애인 사이인 연기를 하는 것에 조금도 두려움이 없을 것이었다.

    모든 건 그것을 위한 준비이지 않은가.

    웃기지도 않게 밥솥도 없는 남자 홀몸인 원룸에 음식과 반찬이라니, 당치도 않다.
    그런 음식 먹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아주 수상한 약이 들어있을 것만 같다.

    증거를 남기지 않는 그녀의 성격상, 어쩌면 정말 그저 순수 음식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확인하는 방법이라곤 누군가에게 먹여보는 것 정도 밖엔 없었기에 조금씩 버리거나
    냉장고에 방치하는 중이다.

    “제가 해준 거 먹고 있어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그런 질문을 했었기에 차마 한 번에 버리진 못하고 있다.
    안 먹고 버리고 있다면 죽일지 살릴지 알 게 뭔가. 정성들여 만든 음식을 먹지도,
    버리지도 못하게 하는 것 또한 그녀의 약은 부분 중 하나,

    아니 악랄한 부분 중 하나일 것이다.

    *

    그녀를 만났던 건 다름 아닌 내 방이었다.

    아슬아슬 하게 해를 넘기지 않았던 12월 마지막 날이었다.
    일종의 해방이 날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을 알았으니,
    앞으로 거리의 모든 여자를 모두 살인범으로 추정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초면이었던 그녀는 그 연말의 밤 내 방에서 태연히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당황하는 기색이 한 점도 없어 되려 반사 된 당황은 내게 두 배치의 당황을 안겨줬다.

    그녀의 어깨와 허리에 걸쳐 형사들이 차는 멜빵 권총집 같은 모양의 칼집을 보았다.
    태어나서 실제로 그렇게 칼집을 찬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한 눈에 봐도 살벌해 보이던 칼이 어림잡에 손 한 뼘을 넘기는 길이인 것 같았다.
    칼날의 예리함은 상상조차 거북스러웠다.

    얼굴이 팔리는 게 두려운 사람이라고 멋대로 상상을 했었기 때문인지,
    그녀의 검은 모습은 시선에 대못과 같이 박혔다.

    온통 까만 여자.

    입은 스웨터가 검은 색이었다.
    다리에 달라붙는 바지 또한 그랬다.
    칼집의 광나는 가죽 또한 검었고,
    내 방 의자에 멋대로 걸려있는 자켓과
    현관에서 외로워라 하는 신발 또한 순전 검은 것 일색이었다.

    무엇보다 이질감이 들만큼 머리칼이 아주 검었다.

    보색 대비와 같은 작용이었는지,
    은근 빛을 반사하는 칼집의 속살과
    그녀 본인은 옷차림과 상반되어 아주 희게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얼떨결 “죄송합니다” 라고 해버렸다.
    내 방에 멋대로 들어와 있는 여자에게
    금방 정신을 차린 것도 같으면서
    나는 또 금방 “나가서 기다릴까요?” 물어보기까지 했다.

    나가서 기다릴까요, 란 말을

    “제가 해준 거 잘 먹고 있어요?” 하는 질문으로 갚으며 그녀는 눈웃음 쳤었다.
    당연히도 그런 걸 먹을 리 없었다. 죽으려면 먹었지, 아니고선 안 먹었다.

    대답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많은 말들이 총알처럼 머릿속에 빗발칠 뿐.

    그녀의 얼굴을 봤을 때부터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그녀는 사람 죽일 준비도 아주 잘 하고 왔었다.

    그런 살벌한 칼과 그토록 온몸을 검정색으로 두른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덕분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덕에 그녀에게 “소주나 한 잔 할래요?” 라고 물어볼 수 있었다.
    죽기 전에, 라는 말이 생략 되었지만, 아무렴 어떨까 싶었다.

    검은 옷차림과 묵직하고 예리해 보이는
    그녀 옆구리의 칼은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체념케 하기 충분했다.

    상상 속에서 내 시체를 운반하길 기다리는
    그녀의 공범 즘 되 보이는 검은 그림자가 괜히 눈앞을 어른거렸다.

    마지막으로 날 죽일 사람이게 소주나 한 잔 해보자는 용기는
    체념과 약간의 아쉬움에서 나온 마지막 일갈 같은 것이었다.

    포기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단단하게 느껴졌다.
    삼키기 곤란할 만큼. 외통수 앞에서 초연하기엔
    나는 삶을 아마추어적으로 살았을 지도 모른다.

    아마 일만하고 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어도 나는 출근을 했다.
    어찌됐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일만하고 살았다해도, 숨만 쉬고 눈만 껌뻑이며 일하고 또 일만했다고 해도,
    살아 있었다. 날 죽일 누군가가 매일 같이 내 방을 방문하지만 그래도 집에 살고,
    버스에 살고 지하철에 살고 직장에 살았다.

    월화수목금금금 아침 눈뜨면 출근했고, 밤늦으면 퇴근에 목메고, 퇴근하면 잠에 살았다.

    어느 사이 연말에 친구들과 가벼운 연락 한 통 주고 받지 않게 된 나였다.
    한 잔 쯤 하고 죽어야 여한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녀는 과연 화끈하게도 흔쾌히 나와의 대작에 수긍했다.

    그 것이 또 자신감처럼 보였다.

    술 몇 잔 들어간다고, 네까짓 거.

    그런 자신감.

    *

    “왜 나 죽이고 싶어요?”

    평소 같았다면 만땅 된 취기가 정수리에서 분수처럼 솟구칠
    소주 한 병째에 물어 본 말이었다.

    그녀와 나는 내 방, 방바닥에 앉아 그녀가 손수 만든 김치찌개를 필두로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녀는 당시 대충 한 병반은 비웠을 것이다.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진 것이 내가 질문을 한 것 때문인지,
    취기가 올라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는 촉촉해진 눈매와 동시에 고갤 흔들며

    “죽이고 싶은 건 아닌데요.” 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녀가 나를 죽이고플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그날 처음 봤다.
    칼 차고 나타나려면 그래도 동기라는 건 좀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동기를 부여하기에 그녀를 몰라도 아주 몰랐다.

    딱 초면인 것만큼.

    겨울 내내 궁금증이 일었었다.
    나를 죽으려한다면 과연 누구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거의 분명 여자인 사람이.
    나는 알고 지내는 여자가 없었다.

    회사 동료라면 한둘 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정성들여 매일 집을 찾아올 수 있는 여자는 없었다.

    혹시나 라고 떠올려 본 적은 있었지만 그녀가 확정지어주기 전까진 반신반의였다.

    “저 이렇게 먹고 살아요...”

    그렇게 말한 그녀의 눈가는 촉촉해지다 마르는 것을 반복했다.
    나는 이미 취기가 정수리에서 물대포처럼 뿜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초점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졸음이 쏟아졌다.
    잠들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오는 졸음을 마다치는 않았다.

    마지막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물었다.

    “누구에요? 누가 나 죽었으면 좋겠대요? 나 싫대요?”

    그녀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그런 거 알려주면 안 되는데.” 했다.
    말투마저 덩달아 밝은 느낌이어서 일까 조금 약 올리는 느낌도 들었다.

    서글서글한 웃음에 눈가가 주름진 탓일까,
    확실하진 않지만 눈을 촉촉이 적시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몰라도 될 것 같아요. 이제는.” 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녀는 썰을 풀었다.

    아마 꽤 취했던 것 같다.

    그녀가 내 방을 꾸준히 찾으며 죽인다, 죽인다,
    협박만 했던 이유는 생각보다 허탈한 것이었다.

    “제가 원래는요... 금방 죽이는 건데... 그 계약금 넣고
    원금을 빨리 해결을 해줘야, 그게 그런 거 거든요?... 근데요...”

    그녀의 눈가의 촉촉함이 “그 사람이 입금을 안 해줘요.”에서 좀 더 짙어진 느낌이 들었다.

    “막 나보고 7만원 넣었으니까, 일단 일 좀 끝내달라고... 잔금 나중에 치른다고... 막...”

    날 죽일 여자가 옆구리에 칼까지 차고
    고용주에게 뒤통수 맞고 있는 하소연을 할 줄은 몰랐다.

    연약한 소리 좀 했다고, 덮어놓고 그녀를 위로하기는 솔직한 마음에는 힘 들었으나,
    희한하게도 약간의 동정표가 생기는 기분도 없진 않았다.

    그녀는 입금이 미뤄지고 있어서 나를 죽이지 ‘못’ 하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자 동정표는 금방 꺼져버렸지만.

    이후로도 그녀는 최근 본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베스킨라빈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하소연을 했다.

    아이스크림을 푸는데, 요즘 팔이 욱신거려서 밤에 잠이 잘 안 오는 날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도 맞장구칠 말이 금방 떠올랐지만

    “저도 누가 밤에 제 방에 들어와서 저 죽여 버릴까봐 잠이 안 와요.”

    그런 말은 왠지 꺼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는 꺼내도 될 이야기 안 될 이야기 마구 꺼냈지만.

    그렇게 술을 몇 잔은 더 기울였을 것이다.

    만취를 지나 이제는 내 자신이 술 그 자체가 된 느낌이었다.
    정신을 잃어도 이상할 것 없을 만큼 마셨을 즈음부터 이야기가 어떻게 흘렀는지,
    긴가민가하지만 결론적으로 난 ‘입금을 미루는 못 된 고용주’를 대신해
    내 청부살인 비용을 내 손으로 갚는 것으로 이야기를 종결 지었다.

    그 취한 몸을 이끌고 편의점 ATM기를 찾아가
    내 체크카드의 출금 한계인 100만원을 직접 현금으로 뽑아 준 뒤
    그녀를 택시까지 태워 집으로 보내줬던 것 같다.

    그녀의 검은 모습이 밤에 사라져 가는 걸 보며,
    내가 던졌던 마지막 질문의 답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술기운처럼 머리 위로 흩날렸다.

    돌연 홀로 남은 겨울의 밤거리가 지겨울 만큼
    화끈한 추위를 한웅큼 내게 떨구곤 고이 멀어져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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