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의 비밀
나는 철이 들 무렵 영감이 강했다.
말이 트이고 부터는 남들이 보지 못 하는 사람들과 놀곤 했다.
사실 살아 있는 사람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생판 처음 보는 아저씨가 현관에서 들어와도 아무도 모르길래
'아저씨가 저기 서 있어' 라고 하면
'그런 사람이 어딨니"라며 혼만 났다.
그러다보니 혼나기 싫어서 조금씩 과묵해졌다.
하지만 유일하게 내 편이었던 사람이 있는데, 바로 우리 할아버지였다.
같이 걸어갈 때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는데, 온 몸이 회색에 얼굴은 흙빛이었다.
그리고 등에는 검은 것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저 사람 싸웠나? 왜 검은 걸 지고 있지?"하고 물었더니
"저런 거 빤히 보면 못 쓴다. 잘 구별해야지.
사람은 그림자가 있지만, 저런 건 그림자가 없잖이. 아직 살아는 있지만서도..." 라고 하셨다.
다시 잘 살펴 봤더니 정말 그림자가 없었다.
그리고 뒤에서 바람이 불어왔는데도 향 냄새 같기도 하고 뭔가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스쳐지나갈 때는 냄새 때문에 토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것을 수 없이 보면서 할아버지에게 여러가질 배울 때마다
'여기엔 다가가면 안 돼'
'저 사람에겐 다가가면 안 돼'
라는 식으로 점점 터득해 갔다.
그리고 할아버지 외의 사람에게는 말해선 안 된다는 것도.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초 2, 3학년 쯤) 여름 방학이 되어서 엄마의 언니, 그러니까 이모 집에 놀러 가게 되었다.
(그 무렵 할아버지는 이모 집에서 살고 계셨다)
마침 동년배가 둘 있어서 즐겁게 놀았는데, 그러다 어느 날 대낮에 더위 때문에 코피가 났다.
이모 집에 가서 누워있으라며 어느 방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던데 왠지 느낌이 왔다.
여긴 '다가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싫다고 하긴 했지만 애가 하는 소리를 들어줄 리가 만무하다.
혼자서는 못 있겠기에 뜰에 계시던 할아버지를 불러서 같이 자자고 했다.
'뭔 일 생겨도 할부지가 있으니까 괜찮어'
라고 하셔서 안심했다. 어느 틈엔가 잠들었던 것 같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떴더니 이상한 한기가 들고 향 내음이 났다.
큰일 났다, 무섭다고 생각이 들어 할아버지를 봤더니 푹 주무시고 계신다.
깨우려고 했더니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목소리도 겨우 새어나오는 정도였다.
그래도 할아버지를 계속해서 불렀다.
그 때 천천히 장지문이 열리면서 나온 것.
목과 오른팔, 왼쪽 무릎에서 아래가 없고 전쟁 중에 입었던 건지
매우 낡아서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화상으로 문드러진 것이 기어서 내 발목까지 왔다.
그것은 내가 덮고 있던 여름 이불을 천천히 당겼다.
몇 번이나 할아버지를 불렀을까.
"할아버지 일어나!" 하고 새어나오는 소리로 부른 순간
"뭐시여?"하고
날 보던 할아버지 얼굴은 타서 문드러지고, 피부는 찢어지고 한쪽 눈과 코가 없는...
지금 내 이불을 당기는 그것의 얼굴이었다.
아마 순간적으로 기절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멀었어...' 라는 낮고 묘한 웃음이 섞인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것의 몸이 반 이상 내 몸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것의 피와 내 땀이 섞여서 끈적거리는 끔찍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때 갑자기 엄청난 박력으로 경을 외는 소리가 들렸다.
울면서 옆으로 할아버지를 보았더니, 무서운 표정을 하고 정좌하여
이쪽을 보면서 처음 듣는 경을 외우고 계셨다.
그랬더니 그것이 혀를 차면서 "썩을 놈..." 같은 소릴 하더니 소용돌이 연기로 빨려들어갔다.
그 후엔 할아버지한테 엉겨붙어서 펑펑 울었다.
울음 소리를 듣고 달려온 숙모에게 할아버지는 '악목을 꿨나보다'라며 얼버무렸다.
조금 진정이 되자 '그 경은 뭐야?'하고 할아버지에게 물었더니
"이 할비도 모르겄다, 그냥 입에서 나온 소리여. 조상님이 살려줬나부다' 라고 하셨다.
그 후 둘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뜰 잡초를 뽑았는데
웬걸 내가 판 곳에서 나무 패가 나왔다.
할아버지를 불렀더니 안색이 변해서 달려오시더니 전부 파내셨다.
그랬더니 몇 개의 패에 뭔가 써 있고, 못이 잔뜩 박혀 있었다.
"넌 보지 말그래이. 만지지도 말고" 하시더니, 뒷 소각장에 가지고 가셨다.
나중에 뭐라 쓰였던 거냐 물어봤더니 아이에 대한 원한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막바지인 봄에
할아버지가 위암 말기인데, 마지막까지 할아버지는 모르시게 하라고 가족들이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초등학생한테 너무한 부탁 아닌가)
매일 혼자 병문안을 갔는데, 그 때마다 내가 못 참고 울음을 터트리니까 완전 들통났다.
아니,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자신이 머지 않았단 걸 아셨던 것 같다.
"이 할비가 저 세상 갈 때는 그 필요 없는 능력도 가지고 갈 팅께 할비 없어도 암 걱정 마라"
라고 자상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십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상한 장소에 가거나 사람들에게서 향 냄새나 부패한 냄새를 맡아서 두통을 느낀 적은 있지만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결혼하고 아이도 생겼는데
장남이 어릴 때 나랑 똑같은 행동을 가끔 하는 걸 볼 때마다
앞날을 생각하니 등줄기가 오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