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 존칭 생략.
지난 한 주간(사실은 아무리 길게 잡아야 이틀 정도겠지만.) 때 아닌 '이사야마 하지메 우익논란'으로 게시판이 시끄러웠다.
이유인 즉, 이사야마가 자신의 블로그에 '진격의 거인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인 픽시스 사령관의 모티브가 아키야마 요시후루다.'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 총독부 사령관을 지낸 사람으로, 확인된 바에 의하면 러일 전쟁 당시 기병대를 이끌고 러시아 군대를 격파했다고 전해진다.
많은 한국인이 '어떻게 전범을 모티브로 삼을 수 있느냐?'고 분개했다.
그리고 진격의 거인을 더 이상 안 보겠다느니, 책을 불태우겠다느니, 블로그에 항의의 표시를 남기겠다느니 여러가지 반응들이 튀어 나왔다.
이에 질세라 진격의 거인 팬들 중 일부가 넷 상에 퍼진 이야기와는 달리 그가 전범급(야스쿠니에 묻힐 정도의 개개끼)은 아니었다는 점과 일부 정보에 오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 수정과 반박을 거듭했지만 반대 러쉬로 인해 순식간에 보류로 사라졌다.
그리고 하루 정도 이런 지겨운 일들이 반복되었고, 대부분의 여론은 이사야마 개개끼!로 끝나는 듯 보인다.
나는 이 과정에서 몇몇 부류의 사용자들을 발견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흥미롭다고 느끼고 있는데, 이런 분류는 이번 일 뿐만 아니라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나타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1. 가짜 애국자.
나는 이사야마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그를 매도하고, 그를 옹호하는 자들에게 무차별적인 반대를 선물한 사람들이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언컨데, 그 중 대부분은 현충일에 태극기를 달 때 다른 국경일처럼 달아야 하는지, 아니면 조기를 달아야 하는지도 잘 모를 것이다.
이 단락의 제목에서 가짜 애국자라고 지칭한 것처럼, 그들 대부분은 진짜 애국심에 불타올라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어찌 보면 이 현상에 편승해 '길이 남을 명대사'를 남기거나, 한 순간만이라도 애국지사가 되는 고양감을 맛보고 싶었을 게 분명하다.
이건 비단 애니메이션 게시판만의 문제가 아니다.
글쓴이도 전효성 민주화 발언 때, 평소에는 가지도 않던 연예 게시판에 가서 짤방을 남기고 온 적이 있다.
이건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인간의 자기 현시욕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아무리 소극적인 사람이라도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있다.
악플로 인해 경찰서에 불려가는 사람들을 보면, 평소에는 얌전히 자기 일을 하다가 키보드만 쥐어주면 인격이 변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악플을 다는 이유는 스폿 라이트를 받고 싶기 때문이다. 아니, 스폿 라이트를 받지는 못하더라도 그 순간 만큼은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악플을 다는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평소 애니메이션 게시판을 이용하는 이용자도 아닌 사람들이 갑자기 난입해 들어와 글 하나만 남기고(불구덩이에 장작을 더 집어넣고) 튀는 케이스는 이제 그렇게 특별한 것도 아니다.
물론 본인들이 '나는 대단한 애국을 했다.'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짜 애국자는, 기껏 게시판에 글 하나를 올리고 화형식이 거행되는 장면을 흐뭇한 미소를 띄며 바라보는 행위를 애국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2. 이사야마, 혹은 아키야마의 직계존속으로 추측되는 사람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조용해질만 하면 아키야마나 이사야마를 변호하여 화형식이 좀 더 지속되게 만드는 사람들이며, 대부분은 가짜 애국자들의 공격을 받고 보류 게시판으로 갔다.
개인적으로 이사야마가 우익 꼴통이든, 아키야마가 전범이든 별로 관심도 없다.
그저 문화 컨텐츠의 하나인 만화에 그런 엄격하고 피곤한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도 않고, 가짜 애국자들이 만화를 불태우든 말든 난 계속 시청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직계존속'들은 입장이 좀 다른 것 같다.
물 건너에 사는 쌩판 남인 만화가와, 사망한 지 100년이 다 되어가는 군인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애를 쓴다.
내가 보기에는 이 부류 역시 가짜 애국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마도 이 부류 역시 가짜 애국자들과 같은 영웅심리. 즉, 정의를 추구하고 진실을 밝히는 것을 통해 만족감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을 것이다.
아키야마가 러일 전쟁에 참여했고 조선총독부 관계자라는 사실만으로, 그는 이미 한국인 입장에서 나쁜놈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실은 전범이 아닙니다.', 혹은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교육의 길을 걸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면죄부를 부여하려고 한다.
이는 가짜 애국자들의 좋은 먹잇감이며, 나아가 단순한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던 일반인들의 반감까지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위이다.
사실 이 사태가 이틀이나 간 것에는 이 '직계존속'들의 역할이 크다.
지속적으로 장작을 공급하는 것은 가짜 애국자들이지만, 화형대 위에 올라가서 계속 입을 놀리는 것은 이 직계존속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들이 계속 이사야마와 아키야마를 변호하지 않았다면 사태는 훨씬 빠르게 진정되었을 것이다.
3. 글쓴이와 같은 방관자.
이 방관자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글쓴이와 같이 '너희는 지지고 볶아라, 난 내 할일 하련다.'하는 부류와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가 간접적인 사안을 제시하면서 관심을 얻어보려고 하는 부류다.
특히 후자는 '이것도 우익이네요!'라고 말하거나, 논쟁에 있어서의 자잘한 오류들을 지적하면서 직접적으로 진흙탕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가짜 애국자들, 혹은 직계존속들과 같이 관심을 얻어보고자 하는 심리에서 나오는 행동들이며, 사태를 크게 부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상기한 두 부류보다는 덜 해를 끼치지만 의도가 불순하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럼 글쓴이와 같은 무관심한 방관자의 입장을 살펴보자.
이들은 다시 둘로 나뉜다.
첫 째. 할 말은 있지만 사태의 확대를 막기 위해서 굳이 입을 열지 않는다.
둘 째. 결론이 어떻게 나든 자신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다.
글쓴이는 두 번째 타입이다.
이사야마가 우익 꼴통이든 아니든 진격의 거인을 계속 향유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진격의 거인이라는 작품 안에 노골적으로 우익의 기치를 표현한 내용이 없었고, 설령 있다 한들 그 정도는 걸러내고 맨 정신을 유지할 정도의 주체성과 애국심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병장 만기 제대에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글쓴이는 적어도 진짜 애국자의 조건 중 몇 가지는 충족하고 있을 것이다.)
4. 결론
진짜 중요한 건 여기서부터다.
사실, 지금까지 게시판에서 벌어진 일련의 다툼은 사실상 진짜 옳고 그름을 가리는 다툼이 아니었다.
'진격의 거인 작가가 우익?'이라는 따끈따끈하고 탐스러운 독버섯을 두고 벌어진 촌극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사실상 이사야마에 대한 우익 혐의를 가지고 공격하는 가짜 애국자들의 목적은 진짜 애국심을 발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또한, 이사야마와 아키야마를 변호하는 직계존속들 또한 그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흑과 백이 명확한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각자의 자존감과 우월감을 획득하기 위한 다툼이었을 뿐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 이 논쟁은 '누구의 말이 옳으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누가 이기느냐.'만 남았을 뿐이다.
그저 논파하고 설득하고 매도하여 이긴 후에, 상대방을 조롱할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싸움말이다.
5. 해결책
지금 이 시간에도 이 사건은 많은 사람의 뇌리에서 빠르게 잊혀져 가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사야마가 우익인지 아닌지, 그의 누명을 벗기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화제가 아니었으니까.
이렇듯, 대중의 관심이란 이 화제에 자신이 끼어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가능성 즉, 판의 크기가 변동되면 자연스레 멀어지거나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이미 이 판은 하이에나들이 노리기에는 많이 작아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가끔 가다 '그런 일이 있었지' 하는 정도로 회자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나는 내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게시판을 이용하는 많은 이용자들이 조금 더 조용히,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다면
가짜 애국자나 직계존속이 되기 전에 무관심이 최고의 대응임을 상기했으면 좋겠다.
그들의 발악은 판의 크기에 정비례한다.
아마도 그들은 판이 작아졌다고 느끼면 자연스레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릴 것이다.
잊지 마라.
무관심, 무대응이 최고의 약이며, 우리가 누군가를 변호해야 할 이유는 추호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