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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과 경찰은 두번에 걸쳐 고 백남기 농민의 부검영장을 청구했습니다.
의료계에서조차 의학적 관점에서 부검의 불필요성을 지적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부검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런 차원에서 지난 역사에서 부검이 어떻게 정부에 의해 악의적으로
어떻게 이용했는지 찾아봅니다.
박창수
그는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하고 스물 두 살이던
1981년 8월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전 한진중공업)에 배관공으로 입사하였다.
그리고 1986년 도시락거부투쟁을 주도했다.
50여년 식당도 없이 탈의실과 공장 모퉁이에서 머리카락과 휴지가 섞여 나오는 도시락을
먹어온 노동자들이
“우리는 개밥을 먹을 수 없다”며 사흘 동안 도시락을 던져버렸다.
회사 쪽은 결국 나흘 만에 식당을 세워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한진중공업은 민주노조를 만들었다.
1990년 조합원 93%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 당선된다.
박창수는 1991년 2월, 의정부 다락원 캠프에서 열린 연대회의 수련장에서
급습한 경찰들에게 짓밟히며 끌려갔다.
그 후 장안동 대공분실을 거쳐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구치소 내에서 고 강경대 열사(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명지대 신입생)
타살사건에 항의하는 단식투쟁을 하던 중
그해 5월 4일, 의문의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머리를 서른여덟 바늘이나 꿰매는 중상이었다.
병원으로 이송된 뒤,
5월 6일 새벽, 그는 안기부 요원들을 따라나섰고 몇 시간 후 병원 뒷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박창수 열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조선소 노동자들은 전면파업을 선언하고 올라왔고,
유가족과 사회단체, 학생들도 함께 병원을 지켰다.
다음 날인 5월 7일, 경찰은 시신이 안치된 안양병원에 백골단과 전경 22개 중대를 투입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퍼부으며 영안실 벽을 해머로 부수고 들어와 고인의 주검을 빼앗아갔다.
이후 경찰은 강제로 부검을 실시하였고,
노조활동과 구치소 생활에 염증을 느껴 투신자살했다며 ‘단순추락사’로 사인을 발표했다.
기사출처 : 권영숙( 1991년 박창수의 죽음과 노동의 좌절 ), 김재진( 반드시 알아야 할 슬픈 대한민국 이야기 )
출처 | http://www.msn.com/ko-kr/news/photos/%ED%8F%AC%ED%86%A0%EA%B7%B8%EB%95%8C%EB%A5%BC-%EA%B8%B0%EC%96%B5%ED%95%98%EC%8B%AD%EB%8B%88%EA%B9%8C/ar-BBwIo1a?li=AA4RFw&ocid=spartandh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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