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전 그리스도 신학대학 교수
계간 <철학과 현실> 99년 봄호 에서
1. 「이스라엘에도 책임이 있다」
1991년 초 미국과 이라크 사이에 걸프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 나는 독일에서 유학 중 이었다. 그 때 그 전쟁의 정당성을 놓고 독일에서는 여러 가지 비관적인 목소리들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강대국들에게 향해진 것이었는데, 비판의 요지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해 서방세계가 정당한 응징의 한도를 넘어 지나친 보복을 가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비판의 목소리들은 개신 교회를 비롯해 일부 진보적인 양심세력에 국한된 것이었고 대다수 사람들은 이라크에 대한 서방세계의 군사적 행위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특히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할 것이라는 사담 후세인의 위협이 단순한 엄포로 그치지 않고 실제상황으로 나타나자, 이런 분위기는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날 독일의 녹색당(Die Gr"unen) 외교위원장 일행이 이스라엘을 공식 방문하여, 기자회견장에서 던진 말 한마디가 독일 정가(政街)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 일으켰던 적이 있었다.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라 정확한 발언의 경위와 내용까지를 기억할 수는 없으나, 그들 발언의 요지는 이스라엘을 향해 스커드 미사일이 날아오게 된 데에는 이스라엘의 책임도 없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넌지시 비판했던 것이다. 그들의 기자회견이 이스라엘 국민들을 얼마나 분노케 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미사일이 날아드는 전쟁상황에서 긴장할 대로 긴장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친선방문차 왔다는 외국 손님이 "너희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훈계를 늘어놓았으니 그들이 어떻게 경악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물며 분노를 느낄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도리어 내겐 녹색당 일행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잘못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이 참신하고 용기 있는 행위로 여겨지기까지 하였다. 독일에서 보고 느끼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존권이 위협 받는 것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존권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 마치 그들이 남에게 박해 받은 것이 그들에게 남을 박해해도 된다는 권리를 주기라도 했다는 듯이, 자기만 살겠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박해하는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내겐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 뒤부터는 그들이 나치 독일에 의해 박해 받았던 것을 입에 올리는 것을 볼 때조차, 박해 받은 역사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현재의 범죄를 정당화하려 한다는 생각에 때로는 그런 말들이 역겹게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니까 녹색당 외교위원장 일행의 지적대로 사담 후세인이 이스라엘을 향해 스커드 미사일을 쏘게 된 데는 이스라엘의 책임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스라엘이 나라를 세울 때부터, 수천 년 동안 그곳에 살고 있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더라면 어떻게 사담 후세인이 아랍 세계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의도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들의 발언이 전파를 타고 독일에 전해졌을 때, 독일의 조야(朝野)는 마치 미사일을 얻어맞은 것처럼 경악했다. 그리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가릴 것 없이 한 목소리로 그들의 발언을 부적절하고 미숙한 발언이라고 규탄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참으로 놀랍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녹색당 일행의 발언 내용은 누가 보더라도 객관적으로 아주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 발언의 옳고 그름은 뒤로 밀쳐둔 채 무작정 그들을 책망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도대체 그들 발언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길래, 미숙하다, 부적절하다, 야단들인지 도무지 불만스러운 마음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남의 나라를 공식 방문한 외교사절이 그 나라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외교적으로 결례가 되는 일이라서 이들이 녹색당 일행의 발언을 부적절한 것이었다고 비판하는가 보다'라고만 추측할 뿐이었다.
2. 「옳은 말이라도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의 추측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온 나라가 시끄러운 상태에서 며칠이 지났을 때, 당시 야당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총재 한스-요헨 포겔(Hans-Jochen Vogel) 박사가 녹색당 외교위원장 일행의 이스라엘 발언에 대해 점잖은 어조로 행한 짤막한 비평은 나에겐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이었다. 그는 "독일인은 그가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비록 객관적으로 옳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어쩌면 한 정치가의 영혼 속에 그토록 깊은 지혜와 순결한 양심이 깃들일 수 있는지, 전율스러운 감동으로 한동안 말을 잃은 채 망연히 있었다.
아마도 부적절한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녹색당의 젊은 정치가는 자기들이 더 이상 나치의 범죄에 대해서 아무런 직접적 책임도 없으며, 그런 만큼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해 당당하게 할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누가 말하느냐가 아니라, 그 말이 그 자체로서 옳은가 그른가 일 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녹색당 일행의 말이 백번 옳은 말인데 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비판하고 나서는지 의아하게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인은, 그가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비록 옳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객관적으로 옳은 말에 대해 독일의 조야가 왜 그렇게 흥분했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녹색당 일행의 발언을 부적절하다 비판했던 것은 단순히 외교적인 고려에 따른 것이 아니라 독일 사람들의 양심과 도덕에 따른 판단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때로는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말이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해야 할 말이 있다. 그러나 때로는 '비록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말도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이치가 어떻게 독일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는가? 누구든 역사 속에서 가해자의 집단에 속하는 사람은 피해자인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삼갈 줄 알아야 한다. 그가 앞에 나서서 그 피해자들을 박해한 장본인이 아니라고 해서 이런 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의 집단에 속하여 피해자의 설움을 몸소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피해자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록 그것이 옳은 말이라 할지라도 말과 행동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사람이 가져야 할 마땅한 염치인 것이다. 하물며 가해자 된 사람이 피해자들에 대하여 있지도 않은 말로 거짓선전을 늘어놓는다면, 이런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야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3. 영남 사람들이 지역차별을 말할 수 있는가
걸프 전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한 장 두 장 달력이 넘어가고 나의 유학 생활도 그 뒤 얼마 있지 않아 끝이 났다. 한국에 다시 돌아온 뒤에 나는 독일에서의 일들을 하나 둘 씩 잊어갔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과의 연락이 끊어지고 유학생활은 이제 빛 바랜 사진처럼 의식 속의 관념으로만 남았다. 그런데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난 뒤에 지금 그 때 그 노(老) 정치가의 말이 가슴 아프게 다시 내 마음에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언제쯤 우리는 그런 정치가를 가져볼 것인가? 언제쯤이면 우리도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별할 줄 아는 분별과 염치를 가진 정치가를 볼 수 있을 것인가?
야당이 여당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한 권리이자 국민에 대한 의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국민의 지역감정을 악용하여 국가권력을 독점했던 사람들, 그리고 바로 그 권력의 독점이 낳은 부정과 부패로 나라를 아주 파탄 직전까지 몰고 갔던 사람들이, 권력을 상실한 뒤에는 이제 자기들의 과거 비리와 현재의 무능을 은폐하고 호도하기 위해 천박한 지역감정을 자극하고 선동하고 다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지금까지 지역차별을 무기로 수십 년 동안이나 정권을 독차지해왔던 바로 그 사람들이 정권이 바뀐 지 겨우 1년이 지난 지금 뻔뻔스럽게도 새 정부가 영남 지역을 차별하고 있다고 영남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되물어보게 된다. 과연 경상도 사람들이 지역차별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지역차별이란 무엇인가? 호남 기업만 살리고 영남의 기업은 죽인다는 것인가? 그리고 고위 공직자들 가운데 호남 사람이 많아지고 영남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인가? 아니면 호남에서보다 영남에서 기업의 부도율이 더 높은 것이 지역차별 때문이라는 말인가? 고작 이런 것이 경상도 사람들이 느끼는 지역차별인가? 그렇다면 사랑하는 고향 친구들이여, 부끄러움을 배워 다시는 지역차별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말라.
지역차별이란 무엇인가? 나는 80년 광주의 일에 대해서는 차라리 침묵하려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일회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지역차별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가 단지 전라도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내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해서 어떤 기업체의 입사 시험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고서도 거기 취직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그래서 내가 어쩔 수 없이 호적을 서울이나 경기도로 옮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조상에게 죄스러운 마음으로 호적을 옮긴 뒤에도 나의 원적지가 호남이기 때문에 인사상의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가능하면 내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기 위해 전라도 사투리, 전라도식 억양을 숨기고 서울말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차별이란 이런 때나 쓸 수 있는 말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호남 사람들이 호적을 옮겨야 했는가? 그것은 우리가 해방된 조국에서 동족에게 강요했던 창씨개명(創氏改名) 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호남 출신 젊은이들이 서울말을 쓰기 위해 애쓰면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갈등하고 좌절하였겠는가? 마치 일제가 마지막에 우리의 모국어를 말살하려 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해방된 조국에서 동족에게 그들의 정든 고향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대학시절부터 서울에서 살면서 나는 전라도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온 사람들이 반듯한 서울말을 쓰지 않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경상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서울 생활을 하면서 반듯한 서울말을 쓰는 것 또한 거의 보지 못하였다. 아니 그것은 고사하고 경상도 출신들은 경상도 말씨가 무슨 대단한 자랑이라도 된다는 듯이 단정한 표준말을 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나는 서울생활을 시작한 뒤부터 그리고 특히 강단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한 뒤부터, 빠르고 시끄러운 나의 경상도 말씨를 부드러운 서울 말씨로 바꾸려고 무던히 애를 써왔다. 그거나 나는 말씨를 바꾸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의식적으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고향 말씨를 감추지 못하는데 호남 친구들은 완벽하게 서울말을 쓰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막연히 경상도 말씨 자체가 전라도 말씨보다는 더 바꾸기 어려운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얼마 전에 나와 마찬가지로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 때부터 서울 생활을 한 사람이 경상도 사람인 줄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서울 말씨를 쓰는 것을 보고 나는 경상도 말씨를 바꾸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다. 더불어 전라도 사람들이 완벽하게 서울 말씨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전라도 말씨 자체가 유연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기의 출신 지역을 감추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경상도 말씨를 버리지 못한 것은 내겐 나의 출신지역을 감추어야 할 아무런 절박한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말씨가 나의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였더라면, 나도 전라도에서 온 친구들처럼 반듯한 서울 말씨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들이 느꼈던 차별의 벽이 얼마나 높았으면 내가 20여년을 노력해도 배우지 못한 서울 말씨를 그들은 그렇게 빨리 배울 수 있었을까.
4. "호남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지역차별이란 그런 경우에 쓰는 말이다. 호남 사람이 단지 호남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온갖 유형무형의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호적을 바꾸는 것도 모자라 몸에 밴 말씨까지 바꾸어야 할 때,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지역차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물을 머금고 호적을 바꾼 적도 없고 경상도 말씨를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써 본 적도 없는 경상도 사람들이 모든 국민이 같이 겪는 경제난을 두고 지역차별을 입에 올린다면, 이것은 가히 세상의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 볼 때 정말로 염려스럽고 유감스러운 사람들은 지역감정을 선동하는 정치인이나 그런 선동에 놀아나는 군중이 아니라, "호남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마치 자기는 호남 차별에 대하여 아무런 역사적 책임이 없다는 듯이 지역감정의 문제가 나오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호남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안이한 양비론(兩非論)이 무슨 대단한 지혜의 증거라도 된다는 듯이 이쪽 저쪽을 모두 훈계하려 드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호남 차별에 관한 한, 호남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은 공범이다. 그리고 호남 차별에 대해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역사적 부채는 호남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고 해서 유태인들에 대한 독일의 역사적 채무관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 해방되고 독립을 얻었다고 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 부채가 자동적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호남 사람들에게 "너희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주제넘은 애국 지사들이 학계에 또는 언론계에 너무도 많이 있다.
그렇다. 어쩌면 피해자들에게도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공연히 피해자의 책임을 지적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가해자의 몫은 아니다. 가해자의 집단에 속한 사람은 그가 가해자의 일원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피해자에 대해서는 비록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물을 머금고 호적을 바꾼 적도 없고 고향 말씨를 감추고 서울 말씨를 배우기 위해 이를 악물어 본 적도 없는 이 땅의 행복한 지식인 애국지사 여러분, 부디 기억 하시라, 적어도 지역감정이나 지역차별에 관한 한, 나처럼 그대들에게도 호남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훈계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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