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에 대한 3가지 기사.
두번째입니다.
2010년 딴지일보 관광청에 올라온
안희정 외숙모의 글입니다.
2012 딴지일보 테러당할때 같이 폭파된 글인데
인터넷 뒤져보면 조금 남아 있긴하더군요.
어린시절 안희정에
대해 잘 알려주는 글인것같습니다.
--------------------------------
“에이구, 즤 어미가 죽었어도 그리 슬플까.
물 한 모금 안 넘기구 자지도 먹지도 않구…
기진해 있어서 내가 뭐 약 좀 가져갔더니 어머니나 드시라구
거들떠도 안 봐.”
전화기 속에서 형님의 끊어질듯 애달픈 목소리는
차마 더 듣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려 알어, 온 나라 사람이 다 슬퍼하니께,
아녀, 좋아서 신나는 인간도 있을 껴. 내가 왜 이런다냐…
당최 나이 값도 못 하구 악담이나 하다니.”
탈진해 누웠다는 조카보다 팔십 노인이신 형님 걱정이 먼저 든다.
“형님. 제발 이제 걱정은 놓으셔요. 제발요…….”
시집을 간 뒤 남편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으신
큰누님이 시어머니보다 더 무서웠다.
작은 체구, 가녀린 몸피이시면서도 흔들림이 없는 눈매가 예사롭지가 않아
매사에 덜렁쇠인 나는 미리 겁부터 집어 먹은 것이다.
부모님께는 더할 나위없는 효녀이셨고
오남매를 낳아 시댁어른 모시며 농사짓고 가게도 하신다는데,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이 없이 정갈하셨다.
망아지 뛰듯 덜렁거리는 내 허물을 훤히 다 보셨을 텐데도
어린 동생 댁에게 단 한 번도 노엽게 대하신 적이 없었다.
오히려 살그머니 손을 잡고 이런저런 덕담을 해주셨는데
작은 몸피에 비해 손의 악력이 어찌나 센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시집간 누이는 노래나 시,
혹은 애잔한 글에서 많이 나오듯이
남편도 시집간 큰누님에 대해
모성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묘한 감성을 갖고 있다.
누님은 논산군 연무읍내에서 시오리쯤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이 입대하여 훈련을 받을 때 영외로 구보를 나갔는데
누님이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대열에서 뛰고 있는 동생에게 손수건을 던지셨다.
“00야, 땀 닦아라.”
작은 돌멩이와 함께 오천 원이 손수건에 싸여 있었다.
1968년이니 아마 꽤 큰돈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PX에서 곰보빵을 사먹으며 울었다고 했다.
돈도 없고 배도 고픈 신병 때였으니 빵맛이 오죽 좋았을까.
빵을 먹으며 울었다는 남편보다
평범한 촌 아낙이었던 누님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더 놀라워 오래 웃었다.
**
**
**
명절이나 집안행사로 시댁에 갈 때면 남편은 은근히
누님 댁도 들려오기를 바랐다.
남편은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업무 때문에
늘 혼자 시댁에 가야했다.
그러나 하나는 걸리고 하나는 업고 무거운 보따리를 든 나로서는
정말 짜증나는 일이었다.
혼자 가는 것도 힘겨운데
누님 댁도 들려 인사하기를 바랐으니
지금 시절이라면 이혼하자고 덤볐을 것이다.
철없는 새댁이었는데도 남편의 간곡함에 마음이 동했는지 어느 해 누님 집을 갔었다.
평범한 농가주택을 개조하여 밖으로는
농기구(쇠스랑 삽. 기타 연장들)와
각종 철물들을 파는 가게에 작은 뜰아랫방이 있었다.
시누를 찾아온 친정 동생 댁을 위해
잡채며 불고기며 갖은 나물을 장만하셔서 조금 놀랐다.
오남매의 간식으로 만든 도넛이 소쿠리로 가득 담겨 있었다.
종일 가게에서 물건을 팔고 틈틈이 밭에 나가 농사를 짓는
그야말로 슈퍼우먼이었다.
아랫방에 동생 댁을 위해 정갈한 이부자리를 펴서 따로 잠자리를 해 주시고
어린것들이 씻을 수 있도록
물을 데워 놋대야에 담아 들여보내 주셨다.
형님이 늦도록 뒷일에 매달리시고 밤에 집에 온 아이들이 옆방에서 공부하는
소리를 들으며 맛난 것을 배불리 먹은 나는 따뜻한 방에 누워 편히 잤다.
부끄러운 기억 하나 : 고모님이 만들어주신 식혜를
아구아구 먹은 네 살배기 큰애가 그날 밤
반지르르하게 푸세 한 이부자리에 오줌을 쌌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지엄한 시댁
큰 어른 집에 가서 어린 것 단도리를 제대로 못하다니.
무서워서 젖은 요를 몰래 개켜놓고 왔다.
젖은 요를 그냥 두고 왔으니 오죽 칠칠맞게 보셨을까.
아침에 부엌으로 나가 아침밥을 거드는 시늉이라도 내야 될
올케의 신분임에도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린 것에게
젖을 물리며 미적거리는 사이
동터올 시간에 밖이 수런거렸다.
이 새벽에 무슨 소리일까?
창호지 문틈으로 내다보았다.
아이들이 마당을 깨끗이 비질하고
물건들을 가게 밖으로 내 놓고
수돗가에서 싱싱하게 세수를 하고 있었다.
이제 더 미적거릴 염치가 없다.
젖먹이를 눕히고 방문을 열고 댓돌로 내려설 때
그때 막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던 중학생 머시매.
“외숙모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허리를 굽혀 우렁우렁 인사하던 그 머시매들.
그 애들이 바로 형님의 아들이었다.
**
**
**
열아홉에 시집을 간 큰 누님은 부지런하게 농사일을 하며
농기구 파는 가게를 시작하여
작은 마을에서는 잘사는 편이었다.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은 어찌나 하나같이 공부를 잘하는지
동네 유지들이 선산에 쓴 묘 터를 탐냈을 정도였다.
교육에 대한 제대로 된 공부를 한 적도 없는 분이
어떻게 그리 아이들을 엄하면서 인자하고 반듯하게 키워냈을까?
어느 부모가 자식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랴만 형님은 남달리 지혜로우셨다.
“나는 초등학교도 다니다 말았어. 아이들에게 말했지.
글을 배우면 이 어미도 가르쳐다오.
정말로 애들이 글씨를 깨우치더니 나를 가르쳐 주었다네.”
그때 배운 한글과 알파벳으로 지금은 컴퓨터도 할 줄 아는 팔십 노인이시니
참으로 부단히 노력하시는 분이시다.
인내하고 덕을 베풀며,
없는 이를 깔보거나 누르지 말고 노력하고 노력해라.
이렇게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머리 좋은 형제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척척 합격하여
작은 마을이 떠들썩했다. 그렇게 공부하여
관직에도 들어가고 기업에도 들어가 돈도 벌고 차도 사고…….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잘난 자식으로
효도를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랬으면 지금,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작은 몸피의
형님이 애간장이 검게 타서 저토록 기진하지는 않았을 것을.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둘째아들은 내란죄로 사형이 언도된 김대중 씨의 사건 진상이 일본잡지에 실리자
그것을 짧은 일본어 실력으로 번역해 학교에 붙였다.
그것은 운명이었을까?
학교는 어린 학생에게 설명해 주지 않고 길로 내쫓았다.
그것 또한 운명이었을까?
퇴학은 큰길로 나서는 것과 몸을 섞어
그 애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생각해보면 암울한 80년대였으니
평범한 시골의 수재들이 도시로 나와
최초로 부딪쳐서 보게 된 것은
기성세대의 위선이었을 것이다.
부모의 엄격하고도 반듯한 교육은 아이들이 올곧은 성품을 지니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올곧은 성품에 제 스스로 한 가지를 길렀으니
그것이 바로 위선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용기였다.
젊은이들이 길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죽어가던 곳.
저항의 함성이 천지를 울리는 그 자리.
인간은 위대하며 어떤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더라도,
죽는다 해도 인간을 위해 큰소리로 부르짖는 그 자리에,
형님의 오남매는 용기 있게 서 있었다.
형님은 작은 새 가슴을 떨며 그 애들을 지켜보아야했다.
노동운동으로 일생을 보내며 감옥에 가는 사위를 바라봐야 했고,
전교조로 불이익을 당하며 싸우는 딸들의 투쟁도 봐야했고,
반미가 용공으로 둔갑하여 범죄자처럼 다루어지던 시대의
아들을 꼿꼿이 서서 지켜 보아야했다.
수배. 체포. 고문. 투옥. 감옥. 그런 낱말들은 하나하나가 칼이 되어 형님의 가슴을 찔렀다.
출세, 좋은 새 차, 예쁜 손자들, 멋진 집, 우아한 며느리, 고급음식점, 행복…
늙어 그리도 잘난 자식을 두면 이런 단어들과 친숙하여 평화로워야 될 것을.
남편이 동두천에서 군대생활을 하고 있을 때 대학생이었던
조카가 외삼촌을 찾아와 얼마 동안 기식을 하고 갔다.
그 애가 간지 얼마 안 되어 체포되었다는 아홉시 뉴스를 보았다.
아마 수배를 당하여 잠수를 하러 온 것이 아니었을까.
몸을 숨기기에 영내관사만큼 안전한 곳은 없었을 것이다.
남편은 바빠서 그 애를 눈여겨 볼 시간이 없었고,
그 애는 아마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하기에는 우리가 전혀 마땅치 않았을 것이고,
나는 친정이 빨갱이 출신이어서 숨죽이고 사는 터였으니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
“우리 애는 용공이 아녀, 반미였을 뿐이라고.”
남편과 통화하며 격양된 매형의 목소리에서 평범한 두 분이 변화 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씩씩한 아들이 육사에 가기를 소원 하셨는데
아들의 옥바라지를 통해 엉뚱하게도 사상무장이 되기 시작했다.
형님은 작은 체구와 연약함을 지닌 가난한 여자였음에도
아이들을 불의와 맞서 저항하는 강한 전사로 키워내신 것이다.
그렇게 살면 필연적으로 가난이 동반된다.
고향을 등지고 금호동 달동네에서 사실 때
형님 댁을 찾아 간적이 있는데
좁은 골목을 숨차게 올라가며
남편은 눈시울을 붉혔다.
파출부로 일용직으로
고단한 삶을 꾸리면서도 당당하게 사시는
모습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옥바라지를 하면서도 허리한번 굽히는 법이 없이 꼿꼿하시다.
혹시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냥 미안했다.
어느 핸가 남편의 생일날 두 분이 우리 집에 오셨다.
거실에 빛나게 세워둔 남편의 훈장을 슬그머니 치웠다.
기념패에는 대통령 전두환이라는 글자가 상장의 임자인 남편의 이름보다
더 크게 쓰여 있어서였다. 사실 훈장은 전두환 대통령이 준 게 아니었음에도
어두운 80년대, 감옥으로 사위와 아들을 보낸 두 분에게 조금 죄스러워서 이었다.
그때 그 기념패를 치운 뒤로
다시는 거실에 뻔뻔하게 내 놓지를 못했다.
보국훈장 삼일장이라는 훈장은
전역 후 쓰레기봉투를
일 년에 몇 장 거저 받을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우리는 그 대단한 영광을 자존심으로 거절했다.
내 딸들은 자라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직업과 연결되는 대학에 입학했다.
형님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전화 주셨다.
나는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안해요 형님,
형님은 아이들을 온통 다 내어 놓으셨는데
우리는 우리끼리만 잘살려고 그러는 거 같아서요."
그렇게 미안해하면서도
대학생 딸애 방에서 '껍데기를 벗고서'
'러시아 혁명사' 따위의 책을 보면 간이 다 떨렸다.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이 바뀌어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거라.
어떤 격동의 시대에도 농부는 밭을 갈아야 되지 않겠니?”
아이들이 그 언저리에 가지 못하도록 획책한 비열한
수법을 아이들은 알아챘었을까.
딸은 졸업 후 입사한 보수적인 회사의 회식자리에서
윗분의 정치적인 견해를 듣다가
“아직도 조선일보를 보고 계신분이 있단 말입니까?”라고 물은 젊은이가 있었다고 했다.
찬물을 끼얹은 듯 갑자기 조용해 졌으며
기개 있는 젊은 동료는 그 뒤로도 묘한 왕따 취급을 당해야 했단다.
진보나 좌파는 무조건 버릇없이 세상을 뒤엎으려는
불손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보수집단에서 내 딸은 침묵했다.
나는 딸에게 잘했다고 하며 안도했다. 모두가 다 그렇게 비겁하니?
아니 그냥 알면서도 말 안할 뿐이야.
얼마 전 아픈 손녀를 돌보러 딸네 집에 갔을 때
아파트 현관에 커다란 쪽지가 한 장 붙어 있었다.
‘조선일보 넣지 마세요. 귀사는 신문지가 필요할 것으로 배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저는 더 이상 쓰레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실소했다. 그 뒤로 내용증명까지 해서 보내는
우스꽝스러운 싸움을 지루하게 하고 끝났다.
혹시 딸애는 보수집단에서 행동하지 않는
비겁한 자신에게 화풀이를 한 게 아닐까?
불면 날아갈 것 같이 한 움큼인 형님을 볼 때 마다,
감옥에 들락날락 하는 동안 혼자 아이들 키우고 밥벌이를 해야 하는
그의 아내를 생각할 때 마다 우리의 빚은 조금씩 늘어갔다.
제발 그 짓을 안 한다면 어디 가서든 제 식구 제 밥벌이를 못할까.
노무현대통령과의 만남은 운명적으로 그 애 인생에 관여하게 된다.
혼신의 힘으로 만든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
그 흔한 감투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그 애는,
감옥에서 그리고 낭인으로 그렇게 살았다.
사면조차 거절하여 끝까지 형기를 마치고 나온 조카를
출소 이튿날 둘째딸 시집보내는 식장에서 만났는데
너무도 말라서 뼈와 가죽만 남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형형한 눈빛은 더 깊어지고 맑았다.
그런 조카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불행한 서거는
얼마나 무서운 충격이었겠는가.
먹지도 자지도 않아 늙은 어머니에게
또다시 칼을 꽂는 아픔을 드렸다.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울었다.
생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그 애와 동지이면서도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며 눈물을 흘리는 동영상을 보았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두려운 것이 없다.
가난한 남자들의 희고 청결한 우정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그러나 조카는 다시 일어섰다. 그 비통을 딛고서.
내 조카, 안희정
우리는 그 애를 도와줄만한 것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애를 모른 척 해주는 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임에도,
처절한 가난과 날이 시퍼런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데
행여 아는 척 하다가 오히려 불편함을 줄까 염려되어서였다.
노매드 관광청에 연재를 한지도 6년이 넘는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고,
이런저런 수다 글 따위로도 제법 독자가 생겼다.
환갑이나 되었으면서도 싱싱하게 젊어진 것이다.
이 새로운 젊음으로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사람에게 가장 쉽게 마음을 열게 하는 것들이 무엇일까.
편안한 미소, 잡아주는 따뜻한 손, 혹은 가만히 건네는 술 한 잔,
작은 엽서에 적은 한 줄의 싯귀,
책갈피에 넣어두었던 마른꽃잎 한 장,
너를 기억한다는 따스한 음성…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묵은 설거지를 하고 마른걸레로 싱크대 위를 윤나게 닦으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세탁기를 돌릴 때 보다 햇빛 좋은날
빨래비누로 치대어 말갛게 헹군 하얀 블라우스를 바지랑대 걸쳐 널 때 마음이 착해진다.
그 착한 것들은 다 맨손으로 하는 것들이다.
그냥 맨 손, 그렇게 맨손으로 그 애를 이야기 하고 싶었다.
이제 늙으신 나의 형님 내외가 단 한번이라도,
잠시만이라도 꼬부라진 허리를 펴고
주름진 얼굴에 환한 웃음이 깃들기를, 맨손으로 기원한다.
희정아. 네가 간 그 길이 진정 옳았다고,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구나.
--------------------------------------------------------
안희정에 대한 첫번째 기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