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가지 추억들을 엮어 만든 슬픔을
가슴으로 움켜쥐고는
오늘도 그저 잊겠거니, 잊겠거니
바람을 벽지 삼아 눈물로 써내려도
돌아오는 것은
피치 못할 그리움이니
그저 잊겠거니, 잊겠거니
앙상한 추억의 가지 위엔
당신께 쥐어준 손수건만이
휘휘 나부낄 뿐입니다.
이무원 / 밥
어머니 누워 계신 봉분
고봉밥 같다
꽁보리밥
풋나물죽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데
늘 남아도는 밥이 있었다
더 먹어라
많이 먹어라
나는 배 안 고프다
남아돌던
어머니의 밥
저승에 가셔도 배곯으셨나
옆구리가 약간 기울었다.
조용미 / 유적
오늘 밤은 그믐달이
나무 아래 귀고리처럼 낮게 걸렸습니다
은사시나무 껍질을 만지며 당신을 생각했죠
아그배나무 껍질을 쓰다듬으면서도 당신을 그렸죠
기다림도 지치면 노여움이 될까요
저물녘, 지친 마음에 꽃 다 떨구어버린 저 나무는
제 마음 다스리지 못한 벌로
껍질 더 파래집니다
멍든 수피를 두르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벽오동은
당신이 그 아래 지날 때, 꽃 떨군 자리에
다시 제 넓은 잎사귀를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당신의 어깨를 만지며 떨어져내린 잎이
무얼 말하고 싶은지
당신이 지금 와서 안다고 한들,
그리움도 지치면 서러움이 될까요
하늘이 우물 속 같이 어둡습니다.
이창훈 / 겨울 강
모두가 이별을 이야기할 때
나는 만남을 말하려한다
모두가 죽음을 이야기할 때
나는 사랑을 말하려한다
모두가 나를 버리고
얼어붙은 별마저 웅크린 사람들의
따스한 방으로 걸어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는 밤,
바람에 베인 살결과
벌벌 떠는 정신에 갈기를 세워
나에게로 흘러왔던 세월을 추억하지 않으며
섣불리
나로부터 흘러갈 닿을
따스한 바다를 꿈꾸지 않으며
오래전 내 안으로 투신했던
사람들의 절망을 껴안으며 무작정
물결치고 싶어 출렁출렁였던
내 안의 헛된 욕망마저 가라 앉히고
흐르지 않는 절벽으로 꽝꽝
단단하게 서서
모두가 이별을 이야기할 때
나는 만남을 말하려한다
서덕준 / 매미
수년간 참았을 울음
그 얼마나 서러웠을까요
비록 며칠의 통곡이지만
한 계절의 생애를 헤집고는
흙밭에 숨결을 묻는 당신.
통곡하는 법만 배우고
떠나야 하는 것도 그리 애달팠을까요
뻗친 가지 사이에
흉터로 남아있는 번데기가
덜 여문 가을 바람에
흐느끼듯 흔들립니다.
정호승 / 미안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김용택 / 불길
지금
내 마음은 불길입니다
불이어서 타는 날은 두려움을 모릅니다
혼신을 다해 탈 뿐입니다
잡지 못하는 타는 이 불길이 두렵습니다
우리에겐 불이 아니고
언 강 밑으로 흐르는 물이 되어도 좋을 것을.
내 물길은
언 강 밑으로 흐르지 못하는 못하고
강둑에서 불로 타 오르며 번져가니
아, 아
나는 당신을.
이 불길을 당해낼 재주가 없어요
그렇게 많이 찾아지는 시가 아닌 것만 긁어모아보았어요.
예쁘게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