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저는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림쟁이도 아닐 뿐더러, 그림쟁이의 길을 포기했거든요.
저도 고교시절까지는 만화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코믹월드에 부스도 몇 차례 내고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당연히 커서 만화나 게임 쪽에서 종사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믿어 의심치 않았죠.
그런데 결국 저는 그림쟁이의 길을 포기하고 공학도로, 그리고 다시 게임 기획자로 진로를 바꾸고 말았습니다.
생각해보자면 그 당시에는 그릴 것들이 명확했습니다.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를 그리면 됐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떠나서 제가 과연 무엇을 그려야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순간 저는 제 스스로에게 대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정작 그림은 많이 그리고 있었지만, 제 그림은 없었거든요.
정확히 말하자면 오리지널리티. 남들과 저를 다르게 만들어 줄 게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게 지금도 그림을 업으로 삼고 계신 분들과 저의 결정적 차이겠지요.
그러나, 한 때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고, 아직도 그런 욕심을 버리지 못한 한 명의 아저씨로서 여러분께 간소하나마, 실패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드리려고 합니다.
1.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생각하세요.
그림이란 결국 수단일 뿐입니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지요. 중요한 건 그림을 통해서 무엇을 표현하고 싶으냐일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좀 더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지요.
현대의 만화를 가장 잘, 그리고 가장 쉽게 설명했다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스콧 맥클라우드(만화가이자 평론가. DC 코믹스를 통해 데뷔했다.)가 쓴 만화의 이해가 그것인데요, 이 책의 후반부에는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몇 명의 그림작가들을 예시로 들면서 결국 최종적으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타입의 만화가인가 하고 말이죠.
스콧은 만화가가 가져야 하는 소양(만화가가 거쳐야 하는 단계)을 몇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제일 처음은 주제와 발상, 그리고 마지막은 기술입니다.(7단계 정도로 나뉘어져 있던 기억이 납니다.)
스콧은 이 소양들을 사과에 비유하면서, 기술을 맨 바깥, 즉 껍데기에 비유하였습니다.
껍데기는 아름다울지언정,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다른 소양들이 부족하다면 그 그림의 진가는 금방 드러나고 말 것이라는 얘기지요.
그러면서 이어지는 이야기의 서두에는 '기술'을 충족시킨 만화가가 나옵니다. 그는 만화라는 게 별로 어려운 것 같지가 않다는 생각을 하고 기술을 갈고 닦게 됩니다. 그것보다 선결되어야 하는 과제는 제쳐두고 말이죠.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평가해 줄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그림을 평가받고 실망합니다.
왜냐면 기술은 완벽할지언정 주제와 발상을 근간으로 하는 다른 부분들에 있어서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주제와 발상부터 시작한 만화가는 모자란 기술에 허덕일지언정, 결과적으로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물론 제가 이 책을 읽었을 때는 그림쟁이의 입장이 아니고 게임 기획자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래도 배울 점이 많더군요.)
기술이란 훈련에 의해 정제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을 들이면 들일수록 보답을 한다는 얘기지요.(물론 이렇게 시간을 들이는 것 역시 중요한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이 인내심이 모자라 포기하니까요.)
그러나 좋은 기술을 가지게 되었을 때, 이 기술로 무엇을 그려낼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면 그 기술이 의미가 있을까요?
2. 10대 시절의 실패에서 반추하는 연습에 대한 실질적 조언
이건 제가 최근에서야 하기 시작한 연습입니다.
사실 학창시절에는 숱하게 루미스와 잭햄의 책을 봤지만, 노력이 부족한 탓인지 그림 실력이 제대로 늘지를 않더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루미스의 책은 해부학을 끝낸 뒤에 읽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합니다.
애니메이션 게시판의 공지에 더러운 캔디님이 올려주신 글에 해부학 관련 사이트가 올라와 있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면 서점에 가셔서 미술가를 위한 해부학 같은 책을 사셔서 공부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실제 인체를 제대로 파악해야 데포르메(변형)가 가능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잡지떼기도 좋지만 일단은 다 벗을 몸을 그려보는 게 가장 좋은 듯 합니다.
(실제로 해부학 책을 펼쳐놓고 연습을 하면 그림의 퀄리티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인체에 대한 파악이 끝나면(끝날리 없지만... 영원히 고통받는 그림장이...) 그 다음부터 복식이나 투시도에 대해 공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언제나 대갈치기만 할 수는 없으니, 주변 사물과 인물을 효과적으로 그릴 수 있도록 투시도를 연습하고, 거기에 더불어 그림에 설득력을 갖게 만드는
복식이나 기타 사물들을 연습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일하면서 일러스트레이터 분들께 여쭈어보면, 채색(채색 방법이 아니라 색감에 대한 부분)은 소질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하더군요.
(음악에도 절대음감이 있듯)
이것을 통해 훈련을 지속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훈련을 지속하면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기술을 가지게 되었을 때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마세요.
3. 맺으며.
제가 프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조언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타산지석이라고 했던가요, 타인의 성공보다는 타인의 실패에서 배울 점이 더 많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제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들을 분석했고,
취미로나마 그 실수들을 만회하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그림을 그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적당히(일단은 본업이 다른 거고, 먹고 살아야 하다보니 ㅠㅠ) 노력하면서 얻게 된 정보는
틈틈이 애게 여러분께 공유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부끄럽지만 소싯적 그렸던 그림 두 장 올리고 물러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