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나에게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 혹은 sf 소설 속의 환상으로만 여겨지던 텔레포트 기술을 실현한 개발자로서의
남다른 지성이나 능력을 기대하지만, 사실 나는 텔레포트를 개발했다는 이력 이외에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텔레포트 기술 자체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단한 기술이 아니라 기존의 3D 프린팅 기술을 조금 활용한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날 경외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것은 텔레포트 기술이 인류 전체에 미친 엄청난 영향 때문일 것이다.
텔레포트 기술의 원리는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출발점에서 물체를 스캔하여 3D 설계도를 제작하고, 본체를 해체하여 재료상태로 되돌린다.
2. 제작된 설계도와 재료를 도착점으로 전송한다.
3. 전송된 재료와 설계도를 도착점의 3D 프린터를 이용해 재조립한다.
출발지에서 사라지고 도착지에서 나타나는 마술, 그것을 우리는 텔레포트 기술이라고 불렀다.
사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기술의 사용 이전에 충분한 철학적인 논의가 필요해보였으며,
당연히 그러한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나의 착각이었다.
지구의 인구 밀도는 이미 과포화 상태였고, 국가에겐 사람이 살 수 있는 영토가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텔레포트 기술은 주인 없는 땅, 즉 우주로 나아갈 수 있는 출입문이었다.
우주의 땅은 ‘주운 사람이 임자’라는 규칙이 통용되었기 때문에 국가들은 앞다투어 이 기술을 응용하려고 했고
그런 혼란 속에서 이 기술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건은 화성의 영토가 선진국들에 의해 대부분 분할되고 텔레포트 기술이 단순한 우주 사업에 응용되는 것을 넘어
사람들의 실생활에까지 이용되고 있을 즈음 터졌다.
그동안 중국 정부가 재료 전송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다른 재료를 쓴 것이 밝혀진 것이다.
즉 중국에서 해체되었던 본체들은 다시 조립되지 못한 채 재료로 남아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은 텔레포트 기술이 사용되기 이전에 했어야만 하는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재료만으로 재조립된 나는 과연 진짜 나인가?
외형, DNA 같은 생물학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기억과 사고방식 등 정신적인 부분까지도 정확히 일치하는 그 존재는 과연 나인가?
그것조차도 내가 아니라면 나란 존재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그것이 나라면 내가 같은 시간에 두 명 존재할 수 있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애초에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의 98%는 1년 내에 완전히 다른 원자로 교체된다.
단순히 다른 재료를 써서 내가 아니라는 논리라면 지금의 나와 1년 후의 나 또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원래 ‘나’는 물질로서 정의될 수 없었다.
‘나’는 물질보다 고귀하며 한 차원 더 높은 단계인 정신을 통하여 정의되어 왔다.
하지만 텔레포트 기술은 나의 정신적인 부분까지도 완벽하게 재현해낸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나 이미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텔레포트 기술을 경험해 보았으며
그 시점에서 텔레포트 된 내가 진짜니 가짜니 따지는 것은 곧 자신들의 본질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믿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진실을 탐구하는 대신 믿음을 택했다.
그들의 믿음은 확신이 되었고, 확신은 곧 종교가 되었다.
‘우리가 재료 상태로 돌아갈 때 우리의 영혼은 우주를 배회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가 생성될 때 영혼은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영혼은 물질과 정신을 초월하는 신의 영역이며, 그것은 우리를 이루는 본질이 된다. 따라서 텔레포트 이전의 나도 이후의 나도 전부 같은 나이다.’
과학에 의해 증명될 수도 부정될 수도 없는 영혼을 차용한 완벽한 논리였다.
사실 날 두 명으로 만들고 그 둘이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이 확인된다면 그들의 논리는 한 번에 부정되지만,
아무도 그러려 들지 않았다.
첫째로는 애초에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기도 하였으며,
둘째로는 두 명이 모두 작동된다고 쳐도 그 이후의 처리가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종교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영혼의 존재라는 인식의 전환은 인류의 설계도를 저장하고 사람들이 사고,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죽었을 때,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다시 그 설계도를 통해서 재생시킨다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아이디어를 낳았다.
종단 탄생 10년만에 모든 인류는 데이터화되어 저장되었고 죽음은 사라졌다.
처음 몇년은 모두가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믿었다.
더 이상 가족, 연인을 잃는 슬픔에 잠기는 이도 없었으며 범죄의 희생양도 전쟁의 피해자도 없었다.
죽음이 사라진 세계에선 오직 평화만이 유의미했다.
분쟁의 시발점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죽음이 사라진 세계에선 싸움을 통해 얻는 것도, 싸움을 통해 잃는 것도 없었다.
강자와 약자, 승자와 패자의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인류는 점차 무의지의 세계로 나아갔다.
몰랐던 것이다. 삶의 원동력은 죽음의 공포란 것을.
내가 방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무렵이었다.
우스운 것은 죽음이 사라지자 처음 얼마간은 급격히 증가하던 인구수는 고작 20년만에 다시 감소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데이터로서의 동면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원칙적으로 자살은 금지되어있기 때문에 몇십년 단위로 재생을 하긴 하지만 무의미한 일이다.
영겁의 시간이 흘러도 데이터화되어있던 본인에겐 1초의 시간도 흐르지 않은 것이므로. 그 사이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리 만무했다.
500년 뒤 최소한의 의지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던 인간은 모두 자연사하고, 데이터가 아닌 실체로서 지속적인 삶을 사는 인간은
오직 나 하나였다.
방주를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나 홀로 진행해야하기도 했으며, 다시 태어날때마다 선대의 기록을 보면서 스스로 학습해야했기 때문이다.
나를 동시에 여러명 재생하면 작업효율이 수백배가 되었을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 또한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혼의 존재를.
지구온난화는 인간이 저지른 환경오염때문이 아닌 태양의 이상현상 때문이었고
지구는 인류가 살기엔 너무 척박한 환경이 되었다.
물론 화성도 테라포밍한 당시 인류의 기술이라면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문제이지만,
이제 인류는 그럴 의지도 인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행히도 내가 태양의 열기에 불타죽기전 방주는 완성되었다.
사실 방주에 그렇게 큰 기대를 거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제 역할을 해 인류가 부흥할 확률은 영에 수렴했으며,
애초에 인류를 부흥시키겠다는 거창한 목적이 아닌 죄책감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송신기는 108억 인류가 저장된 데이터를 발신하며 온 우주를 떠돌것이다.
데이터를 해석하고 재생할 기술력을 가진 지성체에게 정보가 전해지길 고대하며.
그렇게 인류는 우주를 배회하는 영혼이 되었다.
[우리는 세월호를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꿈과 공포가 넘치는 공포게시판으로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