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나이가 나올 것이다.
내 스스로가 진보정당 운동 초기에 나름 열심히 뛰었던 사람이기도 하지만,
운동판을 떠나 살면서도 그나마 이 땅의 정치적인 희망이 큰 축이 진보정당의 성숙과 안착화라는 생각에
언제나 일정한 거리감을 가진 채이지만 진보정당의 성공을 바라고 지지해왔다.
민중당 창당멤버(이재오,김문수,이우재 등)의 변신에 절망할 때도
민노당 창당과 국회입성에 희열과 동시에 그 전형적인 아마츄어리즘에 탄식할 때도
참담한 이합집산, 시대착오적인 주사파들의 통진당의 사태를 근거리에서 보면서 학을 뗄때도
나는 비판적 지지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통진당 해산의 암울함 속에서도
진정한 좌파진보정당의 뚝심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별 거 아닌 것 같은
작금의 사태 속에서 이틀 동안 수많은 게시물들을 읽어 가면서
참을 수 없는 공허함과 가벼움이 가슴을 흔든다.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진보적 가치들을 나의 삶의 축으로 삼고 살아왔는가?
돌이켜보면 대학 이후 내가 마주했던.
다양한 가치판단을 요구하는 주제들에 관통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사파'들이 이야기하던 '인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교문 입구에서 처음 만났던 5.18 광주,
군사정권,
올림픽을 앞 둔 철거민 투쟁,
NLPD 사회구성체 논쟁, 박종철,이한열, 노동자대투쟁과 전노협 건설투쟁, 민중대통령후보 추대,
페미니즘 논쟁, 섹슈얼리티와 동성애운동, 포스트모더니즘과 대중문화 논쟁...
대충 생각나는 굵직한 것만 늘어놓아보아도 젊은 날 내가 무언가 입장을 가져야만 했던 사안들은 정말 다양했다.
그 속에서 아마도 나는 항상
다양한 삶의 위치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탄압받거나 위협받지 않고 자유롭게 인간성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이 진보적 가치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고 생각할 때는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져도 보았고, 철거민촌에서 같이 싸워도 보았고,
주사파와의 논쟁도 지칠 정도로 했고, 1%의 득표도 못받았던 백기완 후보 선거일도 했었으며
여성운동 잡지와 동성애운동 잡지 만드는 일까지 했다.
그것들이 다 나를 포함한 이 땅의 소수자들이 그저 태어난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생각 아니었겠나 싶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개인이나 운동결사체를 넘어 제도 속에서 정당의 형태로 총화되는 것이
이런 운동의 정점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나 보다. 아니 나만 모르고 있었나 보다.
내가 그런 희망으로 지지하던 정당이
시대착오적인 '전투적 페미니즘'의 탈을 쓰고 '미러링'이라는 함무라비법전의 패러디에도 못미치는 행동강령을 가진
유아적이고 정신병적인 '혐오집단' 옹호를 서슴치 않고 있는 것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입이 닳도록 말하고 있지만, 여혐'일베'를 격파하기 위해 남혐'메갈'이 되어야 한다는,
그리고 그걸 최소한의 전술적 차원에서라도 지지 한다는 초딩만도 못한 발상을 가진 자들이...
여전히 진보주의자 그리고 진보정당의 구성원이라면 나는 당연히 이런 진보정당과 무관한 사람이다.
저기 만연하는
저 상스러운 신조어들과 보지와 좆이 혐오로 가득한 조합어로 재탄생하고 목을 베고 찟어 뭉개버려야 한다는
표현으로 가득한 곳이 여성운동과 진보의 옹호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나는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진보적 영역에서 여성평등이라는 개념이 어떤 과정을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으로
그리고 젠더평등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해 온 것인지
역사는 어디에서 갑자기 무지의 영역으로 자취를 감춰버린 것일까?
60,70년대 미국 전투적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흑인'이며 '여자'였던 소수자들 곁에
항상 '백인'이며 '남자'였던 동반자들이 있었음을 잊었는가?
혐오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차라리 자기를 연소시키는 자폭 테러리스트가 낫다.
가장 치열했던 NL PD의 논쟁 시기에도
빵에 들어간 주사파 놈들 옥바라지 정도는 진심을 다해 해주는 것이 진보운동이었다.
저열한 역사인식과 비본질적인 인간관, 왜곡된 현실인식에 대해서는 죽어라 까면서도...
노동현장에서 열정적으로 싸우고 무언가 해내는 주사파 친구들을 보면
그래 저런 건 정말 진정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라
인정하는 하는 것이 나의 진보운동이고 가치였다.
그런데 하물며 여기 2016년에 여혐 남혐이라니,
제기랄
그리고 그걸 옹호 방임하는 진보정당이라니.
하아..
이제 늙어버린 운동권에게는 지지할 정당조차 없어지고 있는 것인가 보다.
나의 일조는 세상을 변화시키기는 커녕,
그저 한치 앞도 못보는 자기위안의 운동이었나 보다라는 자괴가 밀려든다.
동시에 일정한 책임감도 생긴다.
아니...어쩌면 다 과정일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사회, 그리고 나라가 되려면 아직도 수백년의 시간과 싸움들이 축적되어야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처럼 시민들이 왕의 목을 베어 본 적도 없고,
독일처럼 인종혐오의 광풍을 제대로 경험해 본 역사도 없고,
여전히 식민시대의 잔재들이 사회구석구석에서 분탕을 그치지않고 있는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나 다원주의의 사회의 도래는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런 날이 오기 힘들 것이라는 자각과 동시에...
그 동안 안일하게 조금은 거기에 가까와 졌을꺼라 생각한 나의 교만이다.
정의당은, 아니 진보정당은
짧은 순간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게 했지만
이제 오랜 시간 나를 자괴에 몰아넣는 기호가 되어버릴 것 같다.
이런 푸념조차...정신없이 혼탁한 헬조선에서..
일말의 의미도 없어 보이지만,
내가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