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친구를 처음 본 것은 가을의 중턱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우리 부대는 지원중대로서 인원이 원래 20명이었는데 지원대대로 증편하면서 80명, 무려 네배나
부대원이 늘어난 것이다.
500명 정도 되는 일반 보병대대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이지만 20명 인원속에서 아웅다웅거리면서 생활했던
기존의 부대원들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부대증편이 신병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기존의 복무하던 다른 부대의 군인들이 전입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서 우리는 큰 혼란에 빠졌다.
위계서열을 정하는데만 며칠이 걸린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나를 괴롭힌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우리 부대 증편으로 다른 각 부대에 차출 명령이 떨어지자 각 부대장들은 자신의 부대의 골치 아픈 사고뭉치들만 골라서
우리부대로 보내버린 것이다.
정말로 미친 놈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삐쩍 골아서 밤마다 중증 환자처럼 신음하는 놈,
자다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일어나 춤을 추는 지, 아니면 제식 훈련을 하는지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 자는 놈,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내무반 밖을 한 바퀴 돌고 들어와 후임병 불침번에게 경례를 하고 자는 놈.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는데 1분만에 안 나왔다고 문 부수고 들어가 두들겨 패는 놈,
심심하면 졸병들 세워놓고 훈련용 대검으로 가슴팍 쿡쿡 찌르는 놈,
새벽 3시만 되면 아무나 불러내 이유없이 조인트 까는 놈.
자기는 건물내에서 심심하면 자위행위를 한다며, 부대 건물내에 내 정액이 안뿌려진 곳이 없다며 자랑하던 변태놈,
그 중에 제일 괴상한 놈이 있었는데 '고장포'라는 요상한 이름을 가진 상병이었다.
사회에서 나이트 클럽 기도를 하다가 왔다고 하는데 키가 180이 넘고 덩치가 우람하였으며,
오른쪽 어깨 부분에 작은 문신이 있는 공포스럽게 생긴 놈이었다.
성격은 의외로 온화하였는데 그 걸 이용해서 고참들이 항상 고장난 대포라고 놀리기도 하였다.
고참이지만 그 놈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자주 했다.
일과가 끝나면 세면대로 가서 핀셋으로 수염을 뽑기도 하고, 보급품이 지급되면 "어머..이거 예쁘다" 이러면서
마치 옷을 새로 산 여자처럼 행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번 열받으면 눈에 걸리는 졸병들을 반실신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그의 우악스런 주먹질을 두려워 했기 때문에
졸병들은 물론 심지어 고참들 또한 웬만하면 그의 심기를 건들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고참이라는 사실은 이등병 말호봉인 나에게 지옥 중의 생지옥을 만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들과 짧지 않은 군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말 눈 앞이 캄캄했다.
맹수가 득실거리는 야생의 세계에 홀로 버려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 와중에 그나마 정상적인 사람들도 많았다.
이등병인 나에게 친 형 이상으로 잘해주는 병장과 상병들도 있었고, 부대원들이 말다툼을 할 때는
그 사이에서 논리정연한 언변으로 중재를 하는 병장도 있었다.
그들이 이전의 부대에서 어떤 사고를 치고 돌아다녔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나에게 천사와 같은 존재였다.
특이한 경우도 있었는데 서울대 나온 30살 먹은 병장과 같은 서울대를 나온 29살 먹은 일병이 있었다.
그들은 박사학위를 따지 못하고 늦은 나이에 군대를 왔는데, 30살 먹은 병장은 결혼까지 했고 아들까지 하나 있었다.
내가 제대하는 그 날까지 아내와 아들이 면회오는 사병을 본 것은 그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야말로 우리 부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형의 사람들이 다 모인 것 같았다.
그런데 전입병 중에 유일하게 나보다 후임병인 친구가 들어왔는데 나보다 두달 늦은 이등병이었다.
이제 막 자대 생활을 시작했을텐데 왜 우리 부대로 오게 되었는지 의아했다.
이강수.....그 친구가 처음 왔을 때 너무나 체격이 왜소하여 중학생 정도로 보였다.
군인답지 않는 새하얀 얼굴에 귀염움이 묻어나는 이목구비, 170 정도로 보이는 키에
마르지도 않고 찌지도 않은 물렁살을 가진 친구였다.
지나치게 입이 무거워 필요한 말 이외에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고, 무언가를 계속 살피는 듯
혼자 멍하니 서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도 하였다.
처음엔 똘아이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 얘기를 해보면 굉장히 온화하고 차분한 성격이며,
말 또한 매우 논리정연하게 했다.
나는 좋았지만 성깔있는 고참들은 싫어할 수 있는 스타일이었다.
군대에서는 논리정연한 놈보다 눈치 빠르게 행동하는 놈이 최고이니까
나는 그를 같은 이등병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우리 부대에서 유일한 나의 후임병이라는 이유로
매우 좋아했고,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부대의 모든 것을 이것 저것 하나씩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강수야..."
"이병. 이강수!!"
저녁 식사 후 식당 뒷편 세면장에서 고참들 식기를 닦고 있던 나는 고참들이 모두 나간 틈을 타서 강수에게 말을 걸었다.
"너 전에 무슨 부대에 있었냐?"
"공병대에 있었습니다."
"와....졸라 노가다 뛰는 곳에서 니 체격으로 어떻게 버텼냐? 적응 못해서 쫓겨 났구만."
".........."
"사고쳤냐?"
"아닙니다."
"자대생활도 거의 못한 이등병이 뭔 빽을 믿고 홀로 이 부대까지 왔냐?"
".........."
나는 주변을 이리 저리 살핀 후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조용히 숨소리로 속삭였다.
"고참들을 봐봐. 미친 새끼들이 한 둘이 아냐.
와.....내 짧은 인생에 이렇게 미친 놈들을 종합선물세트로 만나보기는 처음이다."
그는 긴장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말 없이 나를 계속 주시했다.
나는 입꼬리를 살짝 치켜 올리며, 그를 안심시켰다.
"쳇..너무 걱정마. 우리 부대에 이등병은 너하고 나 둘 뿐이다. 우리는 군생활 졸라 꼬인거지만 서로 도우면서 잘 벼텨보자."
"네. 알겠습니다."
나는 비아냥 섞인 허탈웃음을 몇 번 지은 후 계속 산더미같이 쌓인 식기를 닦아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식기 닦는 모습을 차렷자세로 지켜 보던 이강수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없이 그냥 쳐다보고 있었는데,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서서 눈동자만 이리 저리 굴리는
행동이 너무나 어색하여 나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이강수..."
그러자 아무런 대답없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그.
약간의 소름이 끼친 나는 조금 더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야! 이강수!!"
"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는 대답했다.
"너 왜 그래? 간질병 있냐?"
"아....아닙니다."
"그런데 왜 자꾸 눈깔을 이리 저리 굴리냐? 너 틱증후군 있냐?"
"틱증후군이 뭡니까?"
"그거 있잖아. 자신도 모르게 기이한 행동을 반복하는거,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든가, 턱을 좌우로 낚아채듯이 자꾸 돌려댄다든가,
아니면 눈을 자꾸 불규칙적으로 깜박인다든가...하여튼 그런거 말야."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래?"
나의 질문에 그는 대답을 거부한 채 갑자기 엉뚱한 말로 되물었다.
"오전에 싸리나무 채취하러 갈 때 취사장 뒷산 가셨습니까?"
"뭐?"
그는 내가 어떤 생각인지는 고려하지도 않은 채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혹시...어느 날 그 산이 낯설다고 느껴진 적 없었습니까?
늘 다녔던 산이 무섭다거나 이런 것 말입니다."
"너 갑자기 뭔소리 하는거야?"
그러자 갑자기 그가 무섭게 눈을 부릅뜨더니, 가래가 걸린 듯한 탁하고 억센 그리고 괴상하게 변질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절대로 혼자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난 순간 온 몸에 싸늘한 기운을 느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수세미질을 멈추었다.
"무서운 기운이 가득 서려 있습니다.....그것도 아주 많이......."
나는 순간 그 미친 놈 종합선물세트 포장을 뜯었을 때 예상치 못한 메뉴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너.....목소리 왜 그래?"
그는 내 말을 듣고 있는지 안듣고 있는지 부릅 뜬 누 둔의 초점을 여전히 나에게 맞춘 채 괴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절대로 혼자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오전에 말입니다..... 웁!!!"
나는 들고 있던 세제 묻은 수세미를 그의 얼굴에 던져 버렸다.
나도 한 성질 한다. 지금 졸병이라 이러고 있지 사회에서는 나름대로 싸움 좀 한다는 놈에 속했다.
"이 신발놈이... 오냐오냐 하니까 별 미친 소리를 다 하네. 너 무당이야?
니가 내 고참이야? 니가 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너 내가 같은 이등병이라고 만만하게 보이냐? 응?
한 주먹감도 안되는 새끼가..."
그제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는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목소리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시정하겠습니다!!!!!!"
순간 텅 빈 세면장이 그의 목소리로 쩌렁 울렸다.
"신발놈아 목소리 안 낮춰?? 고참들 듣잖아!"
순간 돋았던 소름 때문인지 아니면 갑작스런 분노 때문인지 세제 묻은 두 손이 부르르 떨렸다.
난 그가 왜 이 부대에 전입오게 되었는지 조금은 감이 오는 듯 싶었다.
그 날 밤 저녁에 있었던 소름끼치는 그의 행동과 말 때문에 잠을 뒤척였다.
'신발 재수없는 새끼....'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나는 내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오늘 밤도 역시 미친 놈들이 행동을 개시한 것 같았다.
한 쪽 구석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삐쩍 골아서 밤마다 중증 환자처럼 신음한다는 그 녀석이다.
계급은 상병 3호봉인데 저대로 나머지 군생활이 가능할까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이 약하다.
게다가 무지하게 게을러서 고참들에게 거의 매일 처맞기 일쑤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답답하고 행동이 느릿느릿하다.
웬만한 할아버지가 해도 그 보다는 더 빨랐을 것이다.
어디선가 잠 못든 병장 한명의 욕설이 들렸다.
"아...저 강아지...공포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으이 신발!!"
모포를 얼굴에 확 뒤집어 쓰며 병장이 짜증을 냈다.
처음엔 그를 깨워 병장들이 구타를 앞세워 고쳐보려고도 했지만 한 대 맞은 날은 신음 소리만 더 커질 뿐이었다.
솔직히 병장들은 잘못 때렸다가는 그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앞섰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두들 그를 포기하고 잠드는 연습에만 충실했다.
그런데 나만의 느낌일까?
오늘은 소리가 좀 달랐다.
진짜 아픈 것 같았다.
"끄으..응..끄으..응..."
보통은 이랬다.
그런데 오늘은 자장가처럼 들리던 그 소리가 아니었다.
"아아...아....아....악........으..으..윽."
정말 아픈 것 같았다.
나이 30살 먹은 애 아빠 병장이 불침번을 불렀다.
"어이.. 불침번. 윤상병 좀 살펴 봐...진짜로 어디 아픈가 보다."
근무를 서고 있던 불침번이 취침등 아래에서 조용히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이리저리 살피던 불침번이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윤상병님!!!!!!!!!!!!!!!!"
불침번의 거친 외침소리에 모두들 벌떡 깨어났다.
실내 조명이 켜지고 모두들 윤상병의 상태를 확인하러 몰려들었다.
뭔 놈의 분비물을 입으로 쏟아냈는지 매트리스와 배개가 물을 쏟은 듯 흥건했다.
옆으로 누워있던 그를 바로 눕히자 그의 신음소리는 부글거리는 거품소리로 바뀌었다.
간질병 환자처럼 그의 몸은 뻣뻣하게 차렸자세로 굳어 있었고, 눈은 뒤집힌 채 연신 입에 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이 새끼 뭐야..간질병이야? 야!! 일직사관 불러!!!!!!!!!!!"
병장들의 외침에 불침번은 후다닥 행정반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일직사관인 선임하사 도착했지만 그도 몇 개 알고 있는 응급처치만 취할 뿐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상태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고참들이 급히 윤상병을 등에 업고 수송부 차량을 이용해 의무대로 달렸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그가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제발 완치되기를 바랬지만 완치가 안되더라도 거기서 치료받고 그냥 전역하기를 바랬다.
간밤의 소동으로 오늘 일과에 어떤 변화가 생길 줄 알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다가올 쯤이었다.
갑자기 부대에 집합명령이 떨어졌다.
집합을 명령한 것은 중대장이었다.
내무반 앞 공터에 모두 집결한 우리는 열중쉬어 자세로 중대장을 기다렸다.
그런데 행정반에서 걸어오는 중대장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뒤따라 걸어오는 소대장, 선임하사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부대원들 앞에 선 중대장은 우리를 한 번 천천히 둘러보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윤ㅇㅇ 상병이 오늘 오전 국군통합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말에 너무나 충격을 받은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느라 바빴다.
당시 군대에는 사고사례 전파라는 것이 있다.
사고사례 전파란 그 날 있었던 전 군의 사고 중에 인명 피해가 있는 사고의 내용을 각 부대에 전달하여
저녁 점호시간에 모두 듣도록 하는 조치이다.
일종의 사고예방프로그램이다. 이렇게 하면 다치거나 죽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사고사례 전파에서나 듣던 군인의 사망이 우리 부대에서 일어난 것이다.
"사망 원인은 정확하게 아직 전달받은 게 없다. 심장쪽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대대장님께서 통합병원으로 가셨다.
오늘은 오후 모두 일과를 취소한다. 대신 부대 막사를 깨끗이 정리하고 임시 분향소를 설치할 것이다.
그리고 내일 쯤 헌병대에서 구타나 가혹행위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조사관이 올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어제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 모두 말해 주기 바란다."
잠시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자 병장 중의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어제는 특별한 일이 없었습니다."
"윤상병의 작업 내용이 뭐였지?"
"오전에 싸리나무 채취하러 갔었고, 오후에는 윤상병하고 밑에 애들이 싸리나무 말리는 작업을 했었습니다.
진지 보수 작업 나간 애들에 비하면 힘든 일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에 중대장은 뭔가를 확인해야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어제 싸리나무 채취하러 간 사람들 손 들어 봐!"
여기 저기서 10여명이 손을 들었다.
그 중에 일병 두 명과 이등병 한 명이 섞여 있자 중대장은 그들을 앞에 불러 다시 물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나?"
"네. 그렇습니다!!"
"내 눈을 보고 얘기 해.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나? 고참들이 괴롭혔다거나 그런 일 없었나?"
"네. 그렇습니다!!"
거리낌없는 그들의 대답에 그제서야 중대장은 안심한 듯 말을 이었다.
"일직사관 얘기를 들어보니 어제 일과 후에는 별 다른 사안이 없었던 같다. 게다가 일과 중에도
특별한 일이 없었던 걸로 보인다. 내일 헌병대 조사관이 오면 나한테 말한 그대로 얘기하면 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중대장을 등지고 돌아서서 자리로 돌아가는 이등병 한 명..... 이강수......
사람의 죽음이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는 듯 지나치게 침착한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전날 저녁 세면장에서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가 뒤돌아서 자기 자리에 돌아갈 때까지 나는 계속 그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갑자기 그가 무서워졌다.
'싸리나무..뒷산.....저 강아지 지금 뭔가 감추고 있어'
나는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음을 확신했다.
이강수를 따로 불러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여기 저기 고참들이 있는데다가, 지금은 내가 막사 주변을 청소하느라 아무래도 저녁때까지 기다려야 할 듯 싶었다.
궁금해 죽을 것 같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평소처럼 행동했다.
오후 일과가 시작되면서 몇몇 고참들이 내무반 막사 뒤에 모여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특히 윤상병을 심하게 괴롭혔던 김병장이 가장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병장은 심심하면 후임병들 세워놓고 훈련용 대검으로 가슴팍을 쿡쿡 찌르는 놈이다.
병장 1호봉인 그 자식은 생긴 것부터가 재수가 없다.
170이 될까 말까 한 키에 얼굴은 시커멓다.
눈은 양 옆으로 쫙 찢어져 있고, 납작한 코에 왜놈들처럼 윗니가 앞으로 돌출되어 있다.
정확히 경상도 어디에 사는지 모르는데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놈이다.
난 원래 경상도 사투리를 좋아했는데, 그 자식이 우리 부대로 온 뒤로 경상도 사투리만 들리면 가위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이전 부대에서 그 자식이 저지른 사고가 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 놈의 칼질에 여럿 당했다.
나는 당한 적이 없었는데 김병장에게 당한 부대원들의 공통점은 가슴팍 여기저기에
모기 물린 자국의 크기만큼 피멍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죽은 윤상병도 분명히 그 자국이 남아있었을 텐데, 헌병대 조사관이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김병장은 직접적인 사인을 제공한 살인범은 아니어도 가혹행위로 처벌 받을 수도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김병장을 보면서, 안스럽기도 했지만 속으로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잘 됐다. 미친 새끼...어디 한 번 콩밥을 먹어봐야 하는데..'
그나저나 내일이면 일병 진급날인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기가 막혔다.
내무반 막사 앞에 천막을 두른 임시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우리는 단체로 예를 먼저 갖추고, 개인적으로 한 명씩 돌아가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영정사진이 없는 관계로 대신 우리는 그 자리에 윤상병이 사용했던 헬멧과 군복을 올려놓았다.
한달 가까이 생활해 왔지만 아직 우리는 서로간의 정이 없는 것 같았다.
눈물을 보이는 부대원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거긴엔 나도 속해 있었다.
한 달이 채 안되는 생활동안 나는 전입 온 부대원들이 내 부대원들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몇몇을 제외하고 내 눈엔 아직도 그들이 정신병원에서 집단 탈출한 환자로만 보였다.
마침내 저녁 식사가 끝나고 세면장에서 나는 열외된 고참들의 식판를 닦고 있었다.
오늘도 내 옆 우두커니 서서 내가 식판 닦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강수가 말을 건넸다.
"일병 진급 축하드립니다."
"..........."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나의 답변이 없자 그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20여분 뒤면 고참들이 씻기 위해 다시 이 곳으로 올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뭐 알고 있지?"
나는 일부러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며 물었다.
"뭐 말입니까?"
나는 주변을 잠시 살핀 후 그에게 다시 물었다.
"너 어제 나에게 무슨 말 하려고 했잖아."
그러자 갑자기 이강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난 또다시 어제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덜컥 겁이 났다.
동시에 괜히 물어봤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야....너 그런 표정 짓지마. 졸라 무서워 새꺄"
그런데도 그는 그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저에겐 약간의 신기가 있습니다."
"뭐?"
오늘도 수세미를 던져야 하는가?
그런데 그의 표정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수세미를 던지기는 거녕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너...그게 무슨 말이야? 귀신이라도 본다는 거야?"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침이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다.
"헐.....확 깬다. 내가 지금 무당하고 같이 있는거야?
너 지금 장난치는거지?"
나의 질문에 갑자기 그는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전 무당이 아닙니다. 장난치는 것도 아닙니다."
대드는 듯한 그의 말에 평소같으면 정강이라도 깠을텐데 오히려 나는 주눅들어 있었다.
"그..그럼 뭔데?"
그는 내 말을 무시한 채 자신의 얘기를 이어갔다.
"어렸을 때였습니다. 7살 때 아버지와 함께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산소 벌초를 위해 인근 공동묘지에 간 적이 있습니다."
진지한 표정의 그의 얼굴에서 거짓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수세미질을 멈춘 지 오래 되었다.
"추석이 며칠 남았음에도 묘지에는 미리 차례를 드리러 온 사람들이 몇몇 보였습니다.
주변을 둘러 본 저는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산소에서 인사받을 때 사람이 산소에 올라가냐고 말입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례를 지내고 있는 산소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버지에게 보라고 말했습니다.
제 눈엔 분명히 동그란 산소 봉분 위에 사람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 아버지는 주변을 들러보신 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지 저를 꾸짖으시며 바쁘니까 장난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전혀 끼어들 순간을 찾지 못했다.
"한 번은 그 해 겨울에 제가 심한 열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6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실인데 그 병실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어른도 있고, 제 또래의 아이들도 있고......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을 차린 제가 병실 문 구석에서 두 아이가 장난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깔깔 웃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간호를 하시던 제 어머니께서 왜 그러냐며 미소 진 얼굴로 제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기 친구들이 놀고 있다고 말입니다.
제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신 어머니는 갑자기 싸늘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제 이름을 부르며 우시는 겁니다.
그 때 어머니는 제가 죽을거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런게 계속 보이냐?"
난 어느새 그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 뒤로는 특별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보였는데 그냥 모르고 지나갔었을 수도 있습니다."
"헐...그나마 다행이군.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그런데 말입니다."
"뭐?"
나는 다시 수세미질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다음에 이어지는 그의 숨죽인 말에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지금 이 부대에 낯선 군인들이 돌아다닙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아차리는 순간 나는 표정이 굳어버렸다.
척추를 따라 내려오는 싸늘한 전율.....삭신이 오그라드는 듯한 공포....
나는 정말로 이 자식의 정체를 알고 싶다.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제 윤상병님은 그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괜히 물어봤다.
아...신발 모른 척 할 걸.
이제야 후회가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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