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 철학자
어린 학창시절, 계란말이는 가장 부유한 아이들이나 도시락 반찬으로 먹던 귀한 음식이었다. 그걸 얻어먹고 싶던 우리는 계란말이를 싸온 친구에게 도시락을 내밀곤 했다. 그때 그 친구는 무슨 유세라도 부리듯 계란말이를 줄듯 말듯 우리를 놀리곤 했다. 그럴 때 우리는 말하곤 했다. “치사빤쓰다.” ‘빤쓰’는 속옷을 가리키니 중요하지 않고, 문제는 치사의 뜻이다. 이 뜻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뒤였다.
이 말을 다시 들은 것은 6·25전쟁으로 자식들을 많이도 잃은 불행한 어느 할머니를 만났을 때였다. 인터뷰 말미에 할머니에게 물어보았다. “할머니, 할머니에게 전쟁은 어떤 것이었나요?” 그러자 할머니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내게 전쟁은 참 치사한 거였소.”
조선시대 신문고라는 북이 있었다. 이방원이 왕위에 있을 때 백성들의 하소연을 듣기 위한 제도였다. 왕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북을 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영의정이던 사람이 신문고를 치는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가솔들과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신문고를 치도록 했다. 한마디로 말해 신문고를 독점해버린 것이다. 힘없는 백성들은 억울한 일이 있어도, 신문고 근처에 가기도 힘들었다. 분명 영의정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신문고를 칠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렇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말할 것이다. “참, 치사한 사람이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기득권자가 때로 자신도 평범한 시민인 것처럼 행세를 할 때가 있다. 얼마 전 청와대가 국민일보를 상대로 명예훼손을 명목으로 소송을 건 적이 있다. 분명 명예훼손은 적절한 피해보상을 받아야 하는 범죄니, 청와대도 명예훼손에 대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렇지만 참 치사한 일이다. 그리고 얼마 전 전직 서울경찰청장이 국정감사장에서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증인 선서를 거부한 적이 있다. 분명 일리가 가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것도 참 치사한 일이다. 치사한 것이 이 일뿐인가. 대재벌이 자신들의 치부를 건드렸다고 내거는 명예훼손 소송은 어떤가. 영세업자나 시민단체 입장에서는 황당하기만 하다. 분명 맞는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치사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법의 바탕에는 정의에 대한 감각이 깔려 있다. 정의란 공동체의 공동선을 지향하는 것이고, 그것이 깨어졌을 때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린 채 한손에는 저울을 그리고 한손에는 칼을 잡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동선이 위기에 빠지는 것은 항상 기득권자의 사사로운 욕망 때문이다. 하긴 힘이 있어야 공동체 전체를 위기에도 빠뜨릴 수 있는 법이니까. 소수의 기득권자의 욕망 추구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줄 수 있다. 그러니까 법은 근본적으로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의 억울함을 해소하는, 그래서 전체 공동체의 공동선을 회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아니면 법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신문고를 치는 것과 법원에 소송하는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억울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신문고를 칠 수 있고 누구든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누구든지’에는 사회적 기득권자나 권력자는 빠져야 한다. 그럼에도 기득권자나 권력자가 갑자기 자신이 빵집 아저씨나 청소부 아줌마라도 되는 듯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억울함을 호소할 때가 있다.
물론 신문고 제도나 법원에서 이러저러한 사람은 신문고를 칠 수 없고, 이러저러한 사람은 소송을 할 수가 없다고 명시화하지는 않는다. 왜 그랬을까. 정의를 알고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말해줄 필요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이런 허점을 이용해 기득권자나 권력자가 소송을 일삼는다. 정말 이것만큼 치사한 일도 없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공동선의 와해는 가진 자의 사욕 탓
누구나 ‘신문고’ 울릴 수 있다지만
권력자·기득권자는 좀 빠져주시라”
식비를 아끼기 위해 회사 급식에 숟가락을 올린 사장은 치사한 사람이다. 나약한 학생들 앞에서 교권을 정열적으로 부르짖는 일부 선생님들도 치사한 사람이다. 선량한 다수 소액주주들의 피눈물 앞에서 자신도 피해를 보았다는 자본가도 치사한 사람이다. 쪼들린 가정을 위해 애쓰는 아내에게 피곤하다며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남편은 치사한 사람이다. 회사 사정이 어렵다고 지금까지 동고동락해온 직원들을 정리해고라는 미명으로 거리에 내몰며 아직도 사장 의자에 앉아 있는 사장은 치사한 사람이다. 고용할당제 등 여성의 안정적 삶을 보장하려는 제도를 역차별이라고 침을 튀기는 남자들은 치사한 사람이다.
어느 공동체에서나 의사결정의 최고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의 덕목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자신도 약자라도 되는 양 권리를 외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다. 전쟁터에 참여한 장수를 비유로 들어볼까. 장수는 포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디뎌야 한다. 그리고 장수는 전쟁터를 떠날 때 가장 나중에 발을 떼야 한다. 기득권을 가질수록, 권력을 가질수록 권리는 없어져야 한다. 오직 공동체에 대한 의무만이 남을 뿐이다. 이것이 싫으면 장수에서, 대통령에서, 그리고 사장의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한다. 전쟁터에 부하들을 먼저 투입하고 제일 나중에 발을 내디디는 장수, 후퇴할 때 부하들보다 먼저 헬기에 타거나 배를 타는 장수, 정말 치사한 사람이다.
지금 우리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치사한 정부를 보고 있다. 복지를 공약했으면서도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약속을 어기는 것, 온갖 공공비용을 올리는 것은 그나마 애교에 가까운 일로 치부할 수도 있다.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통합진보당 문제도, 법의 이름을 걸고 아예 당 자체를 해산하자고 헌법재판소에 하소연하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치사함이지만, 이것도 넘어가자. 한번 치사하면 끝까지 치사할 수밖에 없는 일일까. 대선개입 의혹으로 공무원노조를 압수수색하는 진풍경마저 벌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공동체의 공동선 자체를 와해시킬 수 있는 부정의의 막장은 소수 통합진보당이 펼칠 수도 없고, 힘없는 공무원노조가 연출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건 국가정보원처럼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국가조직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왜 이렇게 치사할까. 국가기관이 저지른 공동선 와해라는 범죄를 은폐하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소속 구성원의 재량으로 돌리는 것, 그리고 다른 사건을 통해 범죄를 희석시키려는 것도 국가기관 책임자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건 너무나 치사한 일이니까 말이다. 이렇게도 치사한 사회에서 치사하게 살아가는 우리도 언젠가 6·25를 치사하게 겪던 할머니처럼 나이를 지긋이 먹게 될 것이다. 그때 어느 젊은이가 우리에게 물어볼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2013년은 어떤 시절로 기억되시나요?” 무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때는 정말 치사한 시절이었어.” 제발 이런 말을 다시 반복하는 삶을 살지는 말자. 그 젊은이에게 “정의가 바로 세워졌던 찬란했던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우리는 살아내야만 한다. 그것이 치사한 사회에서 치사하게 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