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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출처: 연쇄살인범파일
2차출처: 여성시대 KGB레몬맛
크라프트에빙에 이어, 가학적인 행동에 관해 상세한 연구를 남긴 인물로, 프로이트의 오래전 대학동창인 빌헬름 스테켈 박사가 있다. 스테켈의 1929년 저작으로 두 권으로 된 <사디즘과 마조히즘>에는 정상을 벗어난 사례들이 열 가지 이상 담겨 있다. 그 내용은 가장 극단적이고 소름 끼칠 정도의 성도착증에 얽매인 남녀에 관한 것이다.
난 무엇보다도 그녀의 유방에 키스를 하고 싶고…… 그런 다음 물어뜯거나 뜯어내버리고…… 씹어삼키고 싶어요. 나는 질과 자궁과…… 항문, 창자를 뜯어내고 싶어요. 나는 그것들 말고도 음부 주변의 사타구니 살들까지 모조리 먹어치우고 싶어요. 그런 다음 배를 갈라서 창자를 만지고 싶어요. 그것들을 전부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는 거죠. 나는 그 온기를 느끼고 싶고, 그녀의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빨아 마시고 싶다고요.
-빌헬름 스테켈의 환자. 자신이 가장 즐기는 공상에 대한 설명
스테켈의 책에 나오는 환자들 가운데 몇몇은 자신의 폭력성을 승화시키지 않았더라면 혹은 폭력적인 충동을 다른 대상에 쏟아내지 않았더라면 연쇄살인범이 되고도 충분히 남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스테켈이 K.H. 로만 거론한 한 남성은 사창가에 갈 때마다 닭이나 오리를 가져갔다. 그는 매춘부가 보는 앞에서 닭을 목 졸라 죽여야 했다. 그런 다음 여자에게 덤벼들어야지 성교를 하면서 큰 쾌락을 느낄 수 있었다. 새가 없으면 그는 성교를 할 수 없었다. 이 경우, 닭이나 오리는 매춘부를 대신했다. 그는 살아 있는 무언가를 질식시키고, 목을 비틀어야만 했다.
스테켈을 찾아온 다른 환자는 '소파를 찌르는 남자'로 일컬어진 53세의 점잖은 신사였다. 그는 자신의 광증을 이미 알고 두려워하지 않는 매춘부만 찾아갔다. 그는 옷을 벗은 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짐승처럼 웅얼거리며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런 다음 칼로 소파를 무수히 찔러댔다. 그런 다음 잠시 동안 성행위를 치렀는데, 그 후 때로는 완전히 의식을 잃은 듯이 뻗어버릴 때도 있었다.
이러한 행동들은 매우 괴상하기는 해도 비교적 온순한 편에 속한다. 위의 두 남성은 실제 여성을 죽이지는 않으면서도 잔인한 충동을 풀어냈다. 한편 스테켈이 거론한 다른 사디스트들은 진정한 괴물에 속한다. 그중에는 악명 높은 프리츠 하르만도 포함된다. 하르만은 20세기 연쇄살인범들 가운데서도 가장 지독한 부류에 속한다.
1879년에 태어난 하르만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여자 옷을 입기를 즐기는 나약한 소년이었다. 술주정뱅이였던 그의 아버지와는 당연히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연쇄살인범들처럼 그도 어릴 때부터 이상야릇한 행동을 나타냈다. 어릴 적 그는 여동생들을 묶어놓거나, 그들의 창문을 두드리며 귀신행세를 하는 놀이를 즐겼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는 상습적으로 아동학대를 일삼았다. 18세 생일이 지난 직후 그는 '정신 결함'이 있다는 진단을 받아 보호시설에 보내졌다. 6개월 뒤 그곳을 빠져나온 하르만은 스위스에 잠시 머무른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전기를 쓴 작가들이 그가 성적인 면에서만 '정상'이었다고 말하는 이 무렵 그는 한 처녀를 유혹해 임신시켰고 약혼까지 하게 된다. 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그는 여자와 뱃속의 아기까지 모두 버리고 군에 입대한다.
한동안 군인으로서 잘 생활했지만, 결국 하르만은 곧 정신 이상 증세를 나타냈고, 군에서 나왔다. 그는 하노버에서 돌아온 뒤 사기, 밤 도둑질, 도굴 등 온갖 사소한 범죄들을 두루 섭렵한다. 20대 때에는 갖가지 죄를 지어 감옥을 들락날락했다. 1차 세계대전이 있을 당시에도 그는 감옥에 있었다.
1918년에 감옥에서 나온 하르만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전쟁 직후 밀수단 일당에 들어가 헌옷이나 고가의 암거래를 도왔다. 그는 경찰 앞잡이 노릇도 했으며, 덕분에 불법적인 활동을 어느 정도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19년 어린 청소년과 잠자리를 가진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하르만이 전대미문의 악행을 개시한 것은 감옥에서 나온 지 9개월이 지나서였다. 하노버의 허름한 올드쿼터 지역에서 한스 그랜스라는 나이 어린 연인과 살면서, 그는 도시를 찾아온 어린 피난민들을 먹잇감으로 삼게 되었다. 그는 기차역에서 빈털터리 소년을 낚은 후 집에 데려와 먹을 것을 주고 그 보답으로 성관계를 요구했다. 하르만은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면 소년의 목에 느닷없이 이빨을 들이대 살을 찢어냈으며, 목젖을 씹으며 환희를 맛보았다. 훗날 그는 자신이 사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경찰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배를 두 군데 칼집을 낸 다음 창자를 빼내 들통에 담아요. 그런 다음 피를 빼내고 어깨가 허물어질 때까지 뼈를 부셔요. 그러면 심장, 허파, 신장이 손에 잡히는데, 그걸 잘라내서 들통에 또 담죠. 뼈에서 살을 발라낸 다음 비닐봉지에 담아요. 몸뚱이 하나를 다 없애려면 네다섯 번을 나다녀야 하죠. 화장실이나 강에 버리거든요.
1924년 봄, 강둑에 사람의 유해가 떠올랐을 때 도시에 괴물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범행 전력이 있던 다른 성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르만도 의심을 받았다. 그는 실종된 소년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이 입던 자켓을 다른 젊은 청년이 입은 것을 발견한 뒤로 체포되었다. 젊은 청년은 하르만이 거처하는 집 주인의 아들이었다. 하르만이 그에게 옷을 선물한 것이 탈이었다.
하르만은 27건의 살인죄로 기소되었는데, 그가 넌지시 비친 바로는 실제 살인 건수가 40건에 이르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스 그랜스가 범행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지만, 그는 살인 두 건에 대해 '선동죄'로 고소되었다. 1924년 2주간의 재판을 거친 뒤 하르만은 27건의 살인에 대해 유죄가 확정되었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판결이 선포되자 그는 "난 시장터에서 처형되고 싶어요. 내 비석에는 '여기 대량살인자 하르만이 잠들다' 라고 새겨주세요." 라고 말했다.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술서를 적었다. 자술서에는 잔악한 행위를 하면서 그가 얻은 감각적인 쾌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공개 처형에 대한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하노버 형무소의 담벼락 뒤에서 목이 잘렸다. 1925년 4월,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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