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전 2008. 10. 18[ 고려 여걸 " 천추태후 " ]
고려 7대왕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그녀는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했다
역사는 천추태후를
욕망에 눈 먼 음탕한 여자로 기록하고 있다
천추태후가 섭정을 했던 동안 고려는 전통이 부활하고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는 등 안정된 시기를 구가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추태후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기만 하다
천추태후
그녀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녀는 왜 역사를 외면을 받아야 했던 것일까?
일본의 교토국립박물관이 곳에 고려 초기의 귀중한 문화재 한 점이 남아있다고려 말 일본으로 건너간 지금은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대보적경 변상도
고려시대 왕실에서는 불경을 옮겨적는 사경을 자주 행했는데변상도는 사경 첫머리에 불경의 그림을 압축해 그린 그림을 말한다
1006년에 그려진 대보적경 변상도는
고려시대 사경변상도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세 보살이 꽃을 푸리며 찬미 공양하는 모습이 은은한 자태로 그려져있다
대보적경은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을 하나로 묶어 정리한 것으로
주로 왕실과 백성의 안위를 빌고 자신들의 성공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총 9미터에 달하는 대보적경의 끝 부분에는 이것을 옮겨쓴 이의 발문이 남아있다
사경을 한 왕태후 황보씨와 김치양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대보적경 변상도가 완성된 1006년의 고려사기록을 찾아보았다대보적경을 사경한 왕태후 황보씨는
바로 고려 7대왕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헌애왕태후 황보씨였다
그렇다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무엇을 위해 대보적경을 사경했던 것일까?그리고 둘은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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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그녀는 고려 5대 왕 경종의 비 헌애왕후 황보씨였다경종은 이미 2명의 비를 두고 있었다헌애왕후 황보씨는 경종의 세번째 비가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경종은 왕건의 손자헌애왕후 황보씨 자매 또한 왕건의 손녀라는 사실이다자매는 당시 왕실의 풍습에 따라 외가의 성인 황보씨를 따르고 있었다
이들의 혼인은 태조 왕후의 손자녀 지간즉 사촌간에 이루어진 근친혼 이었다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고려 8대왕 현종때까지 왕들은 거의 근친혼을 했었다태조왕건의 넷째 아들이자 고려 4대왕인 광종은 그의 누이를 첫째 비로 맞았다
고려시대 근친혼은 삼국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하나의 풍습이었다
개성왕씨의 족보를 보면 고려 왕들의 혼인에 관한
또다른 중요한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다태조 왕건부터 8대왕 현종까지
왕의 혼인은 특정 가문들과 이루어졌다
황주황보씨와 충주유씨
이들 두 가문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천추태후의 외가인 황주 황보씨는 황해도 황주에 기반을 둔 호족 세력으로
왕후를 네명이나 배출하며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왕건의 손녀이자 쟁쟁한 지방 호족세력의 외손으로 경종의 비가 된 천추태후
그녀는 경종의 다섯 왕비들 중에서 가장 먼저 아들을 낳는다
왕후에서 왕태후로 그녀의 운명이 달라지는 듯 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찾아온다
급작스러운 경종의 죽음
천추태후가 아들을 낳은지 불과 1년만에 경종이 세상을 뜬 것이다
당시 천추태후는 겨우 18살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은 천추태후의 충격은 컸다그러나 슬픔을 추스리기도 전에 천추태후는 또 다른 문제와 마주해야 했다
누가 경종의 뒤를 이을 것인가?경종의 후사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왕위 계승자를 정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였다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성종
바로 천추태후의 오빠였다
성종이 즉위 한 후 천추태후의 아들은
궁궐에 남아 성종의 손에 자라게 됐다남편을 잃은데 이어 아들과도 떨어져 지내야 했던 천추태후
이때 그녀의 곁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천추태후의 외척이었다
둘이 사통한다는 소문은 곧 성종의 귀에 까지 들어갔다
성종은 유학적 성향이 강했던 왕이었다그는 유학자를 스승이자 벗으로 뒀을 정도로 유학에 대한관심이 깊었다성종에게 여동생의 행동은 받아들일 수 없는 불륜한 것이었다
천추태후의 여동생 헌정왕후에게도 정을 통하던 한 남자가 있었다바로 작은 아버지 왕욱이었다
성종에게서 유교식 수절을 강요받았던 두 자매
헌정 왕후는 결국 죽음을 맞았고
천추태후는 간통한 불륜한 여자로 낙인 찍히고 말았다
천추태후의 애인인 김치양또한 패륜아로 기록되었다
남편을 잃고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다는 이유로
불륜한 여자의 대명사가 된 천추태후
그렇다면 당시 고려사회에서 천추태후의 행동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일까?
천년 전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를 다녀간 후 기록한 고려도경
고려의 건국역사부터 고려 왕실의 계보,개경의 일상생활에 이르기 까지 당대 고려의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특히 인상적인 것은 고려인들의 생활상을 묘사한 부분이다
천년 전 송나라 사신이 크게 놀랐을 만큼
고려의 문화는 매우 자유롭고 개방적이었다개방적인 성 풍속은 고려시대 여성의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여성의 지위가 어느정도 였는지는 족보를 통해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1333년 고려 충숙왕때 작성된 여주 이씨 세보그런데 뜻밖의 자리에서 여성의 이름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여성들은 수절을 강요받지 않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충숙왕의 비
수비 권씨는 이미 한번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하고 다시 충숙왕의 비가 되었다고 한다왕비도 재혼이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와는 달리 여성의 지위가 보장되고
여성의 성이 억압당하지 않았던 고려시대
그러나 천추태후만은 끝내 불륜한 왕후로 기록되고 있다
고려사는 조선초기 유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역사서이다유교를 최고 이념으로 여겼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헌애왕후의 행동은 결코 용납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헌애왕후에 대한 비난은 불륜에서 그치지 않고,고려사는 헌애왕후를 권력에 눈이 먼 탐욕스런 여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진정 권력욕의 화신이었던 것일까?
잊혀진 존재가 되는 듯 하던 천추태후에게 재기의 기회가 찾아왔다성종이 재위한 지 16년 되던해 서른여덟의 나이로 성종이 세상을 뜬다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은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목종
16년 전 성종에게 왕위를 양보해야했던 천추태후의 아들이었다
권력의 중심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천추태후
그녀는 섭정을 시작하자마 가장 먼저
귀양중이던 김치양을 궁궐로 불러들인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권세는 화려했다궁궐은 호화로웠고 조정의 모든 권한은 그들의 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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