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선거 때마다 야당은 몇가지 쟁점을 정하고, 정부여당과 대립각을 세워서, 정부여당과 차이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선거를 치뤄왔습니다. 이것이 가장 야당다운, 당연한 선거전략으로 여겨졌죠.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야당 대 여당, 진보 대 보수 구도로 나누어지기 쉽상입니다. 양측의 주장이 대립하고 명확한 답이 없는 교착 상태가 지속되어, 결국 지지층을 얼마나 결집시키는지에 따라 선거 승패가 갈리게 되죠.
한국은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더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보수 대 진보의 쪽수 대결로 가면 2012년 총선·대선처럼 보수가 이길 확률이 더 높습니다.
하지만 보수여당에서 평생 정치를 하다가 야당으로 넘어온 김종인은 선거를 바라보는 시각이 기존의 야당 정치인과 전혀 달랐습니다.
자신이 여당의 선거전략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여당이 매번 야당을 공격하기 위해 써먹은 친노패권·운동권·선동·색깔론 등의 네거티브를 무력화하는 것부터 시작했죠. 더불어민주당을 보수정당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위장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기존의 더불어민주당 정치인이라면 평소 신념과 배치되거나 다른 계파의 비판을 받을까봐 쉽사리 못 할 충격적인 조치를 자주 내렸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친노, 운동권이 독식하는 패권주의가 지배하는 정당이란 네거티브에 대응하기 위해 김종인은 친노, 운동권 이미지가 강한 몇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잘라냈습니다. 이런 사람도 공천을 받지 못 하는데 친노패권주의, 운동권순혈주의가 존재하겠냐고 증명해보이려는 시도였죠.
당장 확실하게 결론이 안 나는 문제는 쟁점화를 피하여 무책심하게 선동한다는 비판을 피해갔죠.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를 도중에 중단하고 국정원의 당직자 통신 조회·식당종업원 집단탈북 등 미심쩍은 사건에서 정부에 의혹을 제기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김종인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한 현 상황에서는 햇볕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햇볕정책 수정가능 발언,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궤멸될 것이라는 북한 궤멸 발언 등을 통해 북한을 강하게 비판하며 분명히 북한과 선을 그었습니다.
대신 김종인이 유일하게 부각시키려고 했던 쟁점은 경제 문제였습니다. 김종인이 대표에 취임한 이래 더불어민주당은 틈만 나면 경제 문제를 언급했으며, 박근혜 정부의 경제 실패를 표로 심판해야 한다는 경제심판론 프레임을 만들었죠. 4월 선거운동 기간에 더불어민주당은 매일마다 경제심판론으로 박근혜 정부를 집요하게 공격했습니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sisa&no=733363 각 정당이 내세우고 있는 이슈공감도에서(리서치뷰 여론조사) 더민주의 ‘경제실정 심판론’이 34.9%로 가장 높은 가운데 국민의당의 ‘기득권 심판론’ 26.7%, 새누리당의 ‘야당 심판론’ 21.7% 보다 높게 나타났습니다.
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html?no=265843 더불어민주당의 경제 정책이 기대에 비하면 구체적이지 못 하다는 평가도 존재하긴 하지만, 선거에서 경제 이미지를 선점하는 것은 그와 별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명박이 2007년 경제 대통령 이미지로 대선에서 대승했지만, 탁월한 정책이 있어서 그런건 아니었죠. 선거에서는 대개 정책 하나하나보다는 정당과 후보의 이미지가 더 잘 먹히며, 현재 한국 경제 상황은 박근혜 지지자조차 좋다고 평가를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김종인의 선택은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서 결행한 일종의 도박이었습니다. 국민의당이 분당해서 야권이 분열된 상황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은 고정 지지표만으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죠. 새누리당 지지자들의 결집을 막으면서 더불어민주당 쪽으로 최대한 표를 모아야 하는, 이중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됐죠. 김종인은 기존 더불어민주당 지지자가 반발을 하더라도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들의 표를 흡수하기 위한 조치를 꾸준히 이어나갔습니다.
선거결과만 보면 일단 그럭저럭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는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비례대표 지지율 25%보다 훨씬 많은 37% 득표율을 지역구 투표에서 얻었는데, 기존의 더불어민주당 지지자 말고도 다른 정당 지지자나 무당층의 표를 얻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지역구 득표율이 비례대표 득표율보다 적은 주요 원인이 비례대표 파동이나 잘못된 우클릭 전략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습니다만, 더불어민주당의 보수 성향 비례대표에 반대하던 유권자가 더불어민주당보다 더 보수 성향이 강한 새누리당과 국민의당에 비례대표를 투표하는건 생각하기 힘듭니다. 새누리당, 국민의당 또한 비례대표 공천에서 논란이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자가 비례대표 투표에서 대안으로 생각하는 정의당의 비례대표 득표율이 반사이익을 누렸다고 보기에는 지난 선거 때의 진보정당 득표율보다 딱히 높지도 않았죠.
김종인의 전략은 마침 더불어민주당의 외부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면서 맞아떨어져 시너지 효과를 냈던 측면도 있습니다. 같은 야당인 국민의당 역시 정부에 대한 공세를 자제했으며, 새누리당은 비박 공천 학살로 지지층의 투표 의욕을 떨어뜨려줬죠.
전 이번 총선에서 김종인의 선거전략이 성공을 거뒀다고 해서 다음 대선까지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총선 전에는 깜깜이 선거라고 불릴만큼 유권자들의 의중이 어디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보이는 것은 위험했죠. 하지만 총선을 통해 박근혜 정부와 보수 정권 8년에 대한 심판 여론이 분명히 확인되었으니, 총선 이후에는 정부와 대립각을 세울 새로운 대표를 뽑는 것이 민심을 반영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