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흥(劉載興, 1921년 8월 3일[1] ~ )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대표적인 친일파 정치군인. 일본군 장교로 활동중 815 광복에 이은 미군정 당시 제도권안에 있던 행정, 군사인력들을 그대로 차용하려는 미군정의 정책에 힘입어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활용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계속되는 패전과 도주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으나 역대 정권에서 계속 승승장구하였다.
일본군 장교였던 유승렬의 아들로,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다섯살 때 조선으로 돌아왔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5기로 졸업하였고,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에는 일본군 육군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미군정 시기에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 장교가 되었다. 제4여단장, 육군사관학교 부교장 등을 지냈고, 1949년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제주 4·3 사건때 민간인 학살을 명령 또는 관여하였다.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제7사단장으로서 참전하여 의정부 축선을 책임지고 있었으나 북한군에 패전을 거듭하여 덕정-의정부-창동으로 축차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7사단은 붕괴 해체되었으며 결국 서울이 함락되었다. 그후 1950년 7월 경북 함창에서 제2군단이 창설될 때 제2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덕천 전투에서 지휘실수로 중국군 38군과 42군에 포위를 허용하여 제2군단이 사실상 전멸되어 해체케 하였으며, 현리 전투에서도 제3군단을 해체케하는 등 한국 전쟁에서 지휘한 전투마다 패전하였다. 제2군단장으로 낙동강 방어전에서 일어난 영천 탈환전과 이후 한국 전쟁 후반부의 수도고지 전투의 공로가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전술, 지휘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UN군에 패퇴한 북한군의 전술적 퇴각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인 것으로 인용되고 있다. 또한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공세 당시 지휘하던 3군단이 포위되자, 오마치에서 유재흥은 군단을 버리고 항공기편으로 도주하였다.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갔다"라고 항변하였지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의 136페이지에는 "이 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명시했다. 이 도주행각으로 3군단은 사실상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와해상황이 되었다.결국 현리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포위섬멸당하며 3군단은 해체되었다.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지휘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된 계기였다. 당시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국군의 모든 군단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일본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어가 서툴러 군에 명령을 하달할 때 "돌아가라"를 "또라가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2]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지만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한 뒤 박정희 독재정권의 제3공화국에서 등용되어 타이, 스웨덴, 이탈리아 대사 및 대통령 특별보좌관, 국방부장관 등을 지냈다. 퇴임 후에는 1974년부터 대한석유공사 사장으로 6년간 재직했다.
한국전쟁시 잘못된 상황판단으로 본인 지휘하의 1개사단과 2개 군단이 패주후 해체되는 결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공으로 1951년에 받은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수교훈장 등 여러 차례 훈장을 수여받았다. 1990년대에 전직 장성 모임인 성우회의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으며, 전시작통권 회수 등의 국방 관련 현안에 대해 친미세력과 정치적인 행보를 같이 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통수권을 미군에게 일임하자는 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계속되는 패전과 무단도주로 작전통수권이 미군으로 넘어가게된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였지만, 1990년대 이후 작전통수권 반환 움직임에 결사반대를 표시하여 많은 비아냥을 사기도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별 달고 거들먹거리기만 했다'라고 발언한 것 때문에 예비역 장성들이 발끈했던 일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재흥은 발끈할 자격이 없다고 한다. 경북 경산 하양초등학교에는 유재흥 장군 전승기념비가 있다. [3]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아버지 유승렬과 함께 선정되었다.
태평양전쟁때 조선의 명장으로 이름을 높였던 무다구치 렌야와 자웅을 겨룰만한 경력을 쌓은 유장군은 소문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조선 수군 경상우수사로 활약했던 원균의 평행인간이라고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