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늘 여름이 싫었다.
컴플렉스가 많은 나에게 여름은 쥐약이었다.
그리고 그 해 두번 앞선 여름의 상처도 아직 가시기 전이었다.
그때는 아직 제대로된 여름이 오기 직전이었고,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봄을 보내기 전이었다.
너의 까무잡잡한 피부는 여름을 떠올리게 했다.
별 말 없이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는 눈매도 시원시원한게
여름에 참 잘어울리는 인상이라고 생각했다.
아 참, 네가 타고 온 흰색 자전거도.
그리고 이틀 뒤였나,
되도 않는 용건으로 너와 통화를 한 날은
새 선풍기를 벽에 달았다.
전과는 달리 귀찮지 않았고, 슬며시 오는 밤더위도 낯설지가 않았다.
그 뒤 뚜렷하게 생각나는 너의 모습도
꽤나 여름에 잘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 해 여름은 괜히 좋았다.
그 해의 두 해 전은 내가 심각한 이별을 앓았던 해였다.
온 우주 같았던 남자는
적당한 이별의 말도 없이 헤어지자는 통보를 했었고,
이유도 모른 채, 햇수로는 두 해,
여름으로는 세번의 여름동안 미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오고 난 후
나는 술김에 네 손을 잡았고
너는 여자친구가 생겼고
나는 제대로 표현도 못하고 져버린 그 날 밤이 너무 가여워
나이값 못하고 참 많이 울었다.
쪽팔리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다.
무안해진 내 술주정은 그 날 이후 둘 사이의 터부가 되었다.
그 날의 이야기, 그 날 먹음 음식, 그 날 들었던 노래들은
그 후 단 한번도 네 앞에서 입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 날의 밥과 노래, 썰들은 내가 가진 최고의 패였는데 말이다.
어떻게 돌고돌아 그래도 사람 간의 인연은 남아서일까
친구라는 허울 하나로 네 옆에서 근근이 버텼다.
아는지 모르는지, 눈치없이 여자친구에 대한 상담을 하는 너를
가끔 한대 치고 싶기도 했지만
쿨쿨쿨을 세번 외며 인내를 익혔다.
시간은 또 많이 지났고,
너는 여자친구와 헤어졌고,
나는 속으로 만세삼창을 외쳤다.
그 여자와 헤어졌다고 해서 나를 만나줄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확률이라던가 성공률이라던가 재빠르게 머리로 계산해 보긴 했지만
내가 수학을 아주아주아주 못한다는 사실을 잠시 까먹었었다.
그냥 또 근근이 친구로 옆에 남았다.
복잡한 밀당이나 있지도 않은 내숭이나 스킬로는
확률을 높이기는 커녕 잔소리나 들을게 뻔했기 때문에
그냥 손 놓고 있었다.
별다른게 없는 채로 너와 나의 인연은 생각보다 깊어졌다.
반비례로 내 연정은 매번 길을 틀었지만.
그리고 점점 너와 가까워질수록 너와 나는 한 '쌍'이라는 타이틀이 굉장히 어색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보다 늦긴 했지만, 너도 서서히 나를 네 주변의 한 '명'으로 알아보기 시작했고
그만큼 서로 친구로서 의지하기 시작했다.
내심 고마우면서 지랄맞았다.
그렇게 웃고 떠들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궁상맞게 짝사랑 노래를 찾아 들으면서
내 남자친구인 너를 꿈꿔보기도 했었다.
어떤 날은 도대체 지가 뭔데 나를 안좋아하냐 하면서
이를 뿌득뿌득 갈며 너를 노려보기도 했었다.
그래도 양꼬치에 찡따오 한 잔 하자며 불러내는 네 카톡을 볼땐
짜아식 하면서 안바르던 비비크림도 바르고 외출을 했다.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늦여름에 바다로 놀러간 날
술에 취해 내 등에 너가 등을 맞대어 기댄 날,
달도 풀도 왜그렇게 예뻤는지 모르겠다.
술깨라며 찬물 한 잔 떠다주는게 고작이었지만
너는 입도 안대고 취해 잤지만
나는 내가 생각해도 그 날 내 마음씨가 너무 예뻐서 몸이 부르르 떨린다.
ㅎ야,
접때 그 날 크림맥주 되게 맛있지 않았냐.
비빔국수는 어땠냐.
나 사실 그 날 되게 서운했다.
전철 내리면서 그래도 한번은 뒤돌아서 인사해줄줄 알았는데
너 그냥 휘적휘적 가더라.
니가 뒤돌아보면 빵긋 웃어주려고
나 입꼬리에 힘도 되게 주고 있었는데.
그래도 그 때, 너와 나의 인연은 친구로서까지라는걸 깨달았다.
헤어질때 너를 뒤돌아보게 할 정도의 사람은 될 수 없는걸 알았다.
나는 매번 내가 길을 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애초에 그게 제갈길이었나보다.
이제사 원망스럽거나 서운하지는 않은데
조금 쓸쓸하긴 하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나이를 꽁으로 먹는건 아닌갑다.
아닌건 아닌걸 알게 되니 말이야.
그래도 고맙다.
나한테 다시 여름을 주어서.
너를 만난 요 몇 해, 여름이 싫지 않았다.
여름 뿐만 아니라 요즘은 생활이 즐겁다.
쓸쓸함 정도야 우리 또래들 다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거 아니겠니.
인생의 전리품 정도로 생각할게.
소개팅 잘되간다는 소리 들었다.
그래 올해는 연애도 좀 하고 연애도 좀 하고 연애도 좀 해라 쫌.
여자친구 생기기전에 양꼬치에 찡따오 하러 가자.
연락할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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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틀전에 고민 게시판에 올렸던 글이예요.
보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오늘 이 글의 주인공과 만났습니다.
소개팅이 잘 되어가서 기분이 좋아 보이더라구요.
너무 좋아했던, 혹은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에게 큰 배신감을 당하고
또 그 사람 이상으로 좋아하고 아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더 이상 사람을 믿지 못해 몇년간 인간관계를 모두 끊어버리고 지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게 지치고 누군가가 필요해질 때 나타났던 사람이 글의 주인공이었어요.
나이에 비해 현실적이고 염세적인 탓에 운명이란 것을 믿지 않았는데
그 사람을 보던 날, 그 말이 어떤 느낌인지 단번에 알았었죠..
그 사람과 같이 한 지금까지의 시간동안
웃기도 참 많이 웃었고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지날 수록 이 사람에 대한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지더라구요..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 만큼이나
제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사람이 되었거든요.
저는 사실 적지 않은 나이를 보내고 있어요.
그래서 매 순간 만나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매일매일 깨닫고 있기 때문에,
혹시나 깨어질지 모르는 감정으로 그 사람을 보낼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오늘 본 그 사람은,
새로운 인연에 많이 들떠하고 기뻐하더라구요.
씁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하면서 제 감정이 많이 복잡해졌습니다.
얼마전엔 감정을 정리하면서 머리를 잘랐습니다.
제 머리를 보고 잘어울린다 예쁘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고맙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더라구요.
접자고 마음 먹은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 말 한 마디에 흔들리는 제 자신이 더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수백 수천번은 더 마음이 왔다갔다 할지도 몰라요.
어떤 날은 혹시라도 그 사람과 나의 가능성을 따져볼지도 모르죠.
잘 모르겠지만, 이런 글을 남긴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제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서 라는 것만큼은 맞는 것 같아요.
어쨌든 남은 마음이 얼만큼이던 오늘 그 사람과 만나고
제 마음 하나를 더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그 사람이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제가 옆에 있던 없던 언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