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상 평어체로 씁니다.)
벌써 15년이 넘게 지난 일이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3~4학년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IMF가 터지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앉았지만, 당장 우리 집은 큰 타격이 없었다.
오히려 수출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환율이 올라 큰 이익을 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에도 부동산은 투자 가치가 상당히 높았고, 아버지는 투자와 노후대비를 겸하는 의도로
경기도 용인시 부근에 별장을 지으셨다. 별장이 지어지던 동네는 실개천이 흐르던 곳이었고,
주변이 낮은 산과 숲으로 둘러 싸여있어 휴양을 취하기에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좋은 위치탓에 이미 펜션이나 별장 등의 목적으로 우리집처럼 지어지고 있던 집이 있었는데,
IMF가 터지자 몇몇은 완공이 되지 않고 폐허처럼 남겨져버렸다.
여름방학이 되자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별장에서 일주일 정도 쉬기로 결정하셨다.
나는 완공 후 처음 가보는 별장이라 굉장히 설렜고, 동네에 내 또래의 아이들도 몇몇 있을거라는
부모님의 말에 순순히 부모님을 따라 별장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별장에서의 날들은 무료했고, 또 몹시 더워서 짜증나는 날들이었다.
특히, 부모님의 말씀과 달리 내 또래의 아이들이 거의 없어서 더 그랬다.
그 동네는 짓다가 만 집들이 절반이상이었고, 완공된 집들도 대부분 주거가 목적이 아니었던지
사람이 사는 집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내게 친구가 되어줄 아이들이 있기가 어려워보였다.
더위와 지루함에 지쳐 매일 집으로 돌아가기를 부모님께 조르던 어느 날,
한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와 우리집에 찾아왔다. 우리집과 약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아이였는데
우리집과 비슷하게 별장같은 개념으로 집을 지어서 놀러온 거라고 했다.
그 아이와 나는 순식간에 친해졌다. 나보다 한 두살 더 어렸던 그 아이는 나를 형이라고 부르면서 졸졸 쫓아다녔는데
외동으로 자라 외로움이 많았던 나는 그 아이와 하루종일 붙어다녔다. 얼굴이 하얗고 병약해보이긴 했지만
내가 밖에서 뛰어놀자고하면 곧잘 따라와 금방 살결이 갈색으로 탔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집 아버지도 내게 고마워하셨고..
어쨌든 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날, 우리는 몹시 덥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공터에서 축구를 했다.
축구라고 할 수도 없는, 아이들의 공놀이같은 것이었지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더위와 땀 때문에 더이상 놀 수가 없는 지경이 되자, 우리는 수돗가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 집과 그 아이 집 모두 마당은 있었지만 아직 수도가 연결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근처에 널려있는 짓다 만 집들의 마당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마침내 우리는 물이 나오는 수도를 발견할 수 있었고, 물을 실컷 마시고 알몸으로 몸을 씻은 후
공을 들고 비어있던 집으로 들어가게 됐다. 아마 그때가 내가 덜 지어진 집을 처음으로 본 때였던 것 같다.
내부는 인테리어는 말할 것도 없고, 벽지도 발라지지 않았으며 방의 문도 달려있지 않았다.
그저 문이 있을 자리가 문 크기로 뚫려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폐자재들도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나무판이라든지, 시멘트자루라든지, 철골이라든지, 연장이라든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다소 무서울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내부는 햇빛이 들지 않으니 바깥에 비해 훨씬 시원했다.
다만 그 집의 구석에는 방이 하나가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문은 달려있지 않았지만
문이 있어야할 자리에 시멘트나 자재가 겹겹이 쌓여있어 입구가 막혀있었다.
아마도 집이 완성되기 전에 그 방을 자재를 놓는 창고로 쓰는 것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벽을 향해 공을 차다보니 밖에서 노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할만 했다.
게다가 실내에서 공을 차보기는 둘다 처음이라 색다를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점점 더 공을 세게 차기 시작했고, 누군가 공을 힘껏 차자 공이 구석방 입구에 쌓여있던 물건들을 넘어
방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우리의 키로는 쌓여있던 물건들을 넘어가기가 힘들었고,
또 시멘트 자루같은 물건들이 높이 쌓여있는 것을 치우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우리는 의논끝에 한 사람이 밑에 엎드리고, 다른 사람이 안으로 넘어가 공을 가져오기로 했다.
누가 엎드리고 누가 가져올 것이냐를 두고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했다.
그 아이는 가위바위보를 할 때 항상 바위를 내곤 했기 때문에 역시나 내가 이겼다.
내가 엎드리기로하고, 그 아이더러 넘어가라고 이야기를 했다.
힘겹게 나를 밟고 쌓여있던 물건들 위에 매달린 그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어린아이가 지르는 비명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가늘고 긴 비명소리.
비명을 질러대며 위에서 버둥거리던 아이는 반대편으로 떨어졌고
쿵, 하는 소리에도 비명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유를 몰라 당황한 내가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대자, 비명은 점점 실신하는 듯한 울음소리로 바뀌고
형아, 형아, 하는 울먹이는듯한 말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산 속의 해는 빨리 진다. 그 날도 어느새 해가 다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신을 차린 나는 아이를 데리러 넘어가려 했지만, 혼자서 물건들을 넘어가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재빨리 집을 나와 그 아이의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뛰어가서, 아버지를 모셔왔다.
아저씨와 함께 돌아왔을 때도 그 아이는 미친사람마냥 울부짖으며 울고 있었다.
마침내 아저씨가 씨멘트 푸대, 나무들을 하나씩 치워내기 시작했다.
맨 위의 물건들을 가장 먼저 내리고, 아저씨의 시야에 방안의 모습이 들어오자
아저씨는 잠시 얼어붙었다. 그리고 미친듯이 물건을 넘어 방안으로 들어갔다.
무슨일인지 궁금했던 나는, 아직 내 키로는 볼 수 없는 방안의 광경이었지만
맨 위로 손을 뻗고 점프를 해 안쪽을 잠깐씩 살펴볼 수 있었다.
방, 방 뛸 때마다 조금씩 방의 모습이 보였었는데, 점프를 해서 공중에 닿을 때 마다
날벌레들의 웅웅대는 소리가 들려왔다가, 다시 멀어져갔고
내 시야에 목을 매단 채 죽어있는 성인의 까만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데도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나는 그걸 다시 보기 위해
몇번이고 점프를 했다. 그리고 그 정체를 알았을 때,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 이후의 일을 언뜻언뜻 시각적인 이미지로 끊겨서 기억할 뿐이다.
아저씨는 울면서 발버둥치는 아이를 데리고 억지로 입구를 허물어 밖으로 나왔고,
그 다음날부터 나는 아이를 볼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 아이에 대한 일부는
부모님과 함께 잠든 우리집까지, 가끔씩 들려오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다.
IMF로 나라가 신음하던 그 때, 가진 것을 모두 잃은 한 남자가 짓다만 별장으로 돌아와
목을 매달았다고 한다. 이미 목숨을 끊은 지 꽤 시간이 지났던 듯,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얼핏 듣기로는 사체가 목매단 밑으로 온갖 체액이 떨어졌다 굳은 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했었다.
이후 우리 가족도 IMF의 영향으로 아버지의 사업이 잘 되지 않았고,
찜찜한 사건도 있었기에 별장을 팔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 동네에 가본 적은 없다.
자살한 남자가 있던 그 방은 허물렸을까?
만약 그 날 가위바위보에 내가 졌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 아이가 가위바위보를 할 때 주먹을 처음 내는 습관을 몰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보다, 병약하지만 내 말을 잘 따르던 그 착한 아이는 지금쯤 어떻게 지낼까?
공사중인 집을 들어가거나, 가위바위보를 할 때면 지금도 그 때의 기억이 나를 괴롭힌다.
특히 장마가 끝나고, 해가 본격적으로 뜨거운 열기를 뿌리기 시작하면 더욱 그렇다.
이것이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구석방이 있던 집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