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께 이전 이야기를 듣고 할아버지께 귀신보신적이 있냐고 여쭤 봤더니 본인은 직접 겪으신게 없고 다만 어렸을적 들어 보신것은 있으시다며 동네에 전해오는 전설같은 성격의 이야기를 해주셨음.
본인은 귀신얘기에 환장하는 귀신이야기 수집가인데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보물창고가 있었음.
이럴줄 알았으면 군대에서 귀신이야기를 해달라며 그리 밤새 후임들을 괴롭히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었나 싶음.
그럼 시작하겠음. 다만 이야기를 듣다보니 대부분 전설적인 성격의 이야기라서 이야기 특성상 지역색이 강하게 나타나며 생소한 지역명이 나오는점 유의하여 읽어주시기 바람.
우선 필자가 좋아하는 정조 임금 썰부터 풀어보겠음. 정조대왕 짱짱맨!!!
이곳은 경기남부 수원화성 근처로 공가의 집성촌이 위치하는 곳임. (본인은 공씨가 아님 할머님이 공씨인건 안비밀)
조선 정조때 화산릉(현 윤건릉)에 지기가 살았다고 함.
이분 또한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곳 집성촌인 공씨 집성촌에 사는 공가였다고 함.
그러다 하루는 독산성 세마대 내의 보적사에 거주하시던 노스님께서 그 공가 묘지기를 보고 '그대는 보름을 못넘기고 죽을상이요'라고 했다고 함.
이에 당황한 묘지기는 노스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제발 살 방도를 알려달라 사정했다고 함.
그러자 노스님은 이미 지금 이야기한 것 만으로도 많은 천기를 누설하여 하늘의 도리를 어겻으니 더 이상은 불가하다고 하시며 체념하고 남은시간 집에가서 가족들과 지내라고 했다 함.
이에 묘지기는 근심을 한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함.
근심을 숨길수 없었던 묘지기는 표정에 근심걱정이 모두 표가났고 이를 알아챈 아내의 계속된 추궁에 위 사실을 모두 털어 놨다고 함.
그러자 아내는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별일 아니라며 아무일 없는것 처럼 능에가서 묘지기일을 하라고 했다고 함.
그러고 아내는 정화수를 떠놓고 닷새를 빌었다고 함.
처음엔 묘지기도 아내가 워낙 아무렇지 않다는 듯 행동 하기에 묘수가 있나 싶었는데, 닷새동안 저렇게 정화수로 기도만 하니 답답할 노릇이엇다고 함.
그러던 중 아내는 닷새가 지나자 낮엔 쌀독에서 쌀을 퍼서 마을안팎을 전전햇다고 함.
그렇게 닷새가 더 지나자 쌀독의 살도 거의다 퍼날라서 떨어지게 되었고, 이내 아내는 성주단지의 쌀마져 퍼나를 요량인지 성주단지와 그 밑에든 북어 그리고 시집올때 가져온 옥비녀까지 다 들고 야반도주를 했다고 함.
아내까지 도망간 마당에 정말 자신이 살날이 얼마 안남았다고 생각되자 묘지기는 배신감과 절망감에 술만 마셨다고 함.
그렇게 언급한 보름이 된 당일 비는 주척주척 오고있는데 재산을 모두 탕진한 아내가 돌아왔다고 함.
묘지기는 아내를 보자 '이년이 정말 내가 죽었나 확신하러 온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에 아내에게 매질을 했다고 함.
그렇게 정신없이 아내를 때리고 있는데 이내 자신의 명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걸 상기한 묘지기는 그래도 다시 돌아와준 아내가 고마워서 모두 용서하고 받아 주기로 했다고 함.
그러나 매를 맞던 아내는 묘지기가 매질을 그치자 무작정 뛰기 시작했고, 묘지기도 당황하여 따라뛰기 시작했다고 함.
아내의 목적지는 바로그 화산릉이었고 아내는 그앞에 엎드려 미친듯이 울기시작했다고 함.
그 모습에 미안하기도 하고 자신의 신세도 처량했던 묘지기는 아내가 엎드린 그 위에 엎어셔 같이 울었다고 함.
이야기의 진상은 이랬다고 함. 평소 효심이 지극한 정조대왕은 생부의 묘인 화산릉(융릉)을 자주 찾았는데, 바로 그날도 화산에 나섰다가 비를 만나게 되어 화성 행궁에 유하게 되었으나 비가오니 아버지의 묘가 걱정이 되었다고 함.
정조는 신하에게 '가서 묘지기가 부재하여 집에 있으면 당장 그 목을 베어 가지고 오라'고 하였고 이에 신하가 서둘러 묘지기 집에 가보니 묘지기는 커녕 그 아내도 보이지 않았고, 이에 이상히 여긴 신하는 능에 가 보았는데 묘지기 내외가 능앞에 엎드려 포개어 우는것을 보니 이에 감격하여 정조에게 고하였고, 이에 감격한 정조는 심히 기뻐하여 후한상을 내렸다고 함.
묘지기의 아내의 행방 또한 눈치 챗겠지만 집안의 패물을 들고 야반도주 한것이 아닌,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하던중 묘수가 떠올랐던 아내는 노승이 시주하시는 모습을 포착하기위해 집을 나섰다고 함.
노승이 묘지기의 집엔 안 올것으로 예상했던 아내는 집안의 쌀을 들고 집성촌을 전전하며 돌아다녔고 구걸하는 거지든지 아니면 정말 스님들인지 가리지 않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들 모두에게 시주를 하고 자신의 지아비를 살려달라 했다 함.
드디어 노승이 시주하러 오자 아내는 시주를 한뒤 어김없이 자신의 지아비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함.
아내의 정성에 감복한 노승은 '이미 받은 시주를 물릴수도 없고 자신은 이미 한평생 살아서 여한이 없기도 하니, 천기를 누설한 업보를 남은평생 도를 닦으며 용서를 구해 봐야겠다'고 하시면서 이와 같은 방도를 알려 주셨다고 함.
다만 이때에 집안의 모든 재물을 부처님께 시주하고 보름이 되는 마지막 날 남편을 끌고 화산릉앞에서 엎드려 하루종일 우는것이 스님이 말씀하신 방편의 마지막 순서였는데, 그 날이 샐때까지 남편에게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전설에는 꼭 필요한 필수요소인 금기! 바로 그 금기사항이었다고 함.
때문에 아내는 야반도주를 했고 오해를 사며 모진매를 맞았지만 묘지기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참았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