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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망각의 변증법
악(惡)과 망각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면 우선 소크라테스의 철학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선(善)지(知)와 연결지어 설명합니다.
“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지(知)와 덕(德)은 같은 것이었다. 만일 덕이 "가능한 한 영혼을 선(善)하게 만드는" 데 관련되는 것이라면,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선과 지(知)는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단순히 선과 지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 이상을 말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선을 아는 것이 곧 선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는 덕이며, 덕은 바로 지의 목적인 것이었다. 지와 덕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했던 소크라테스는 더 나아가 악덕이나 죄를 지의 부재(不在)라고 주장했다. 지가 덕인 것처럼 무지는 악덕이었다. 이러한 추론의 결과로 소크라테스는 어느 누구도 알면서 악덕에 빠지거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에 의하면 그릇된 행동은 항상 무의식적이며, 따라서 무지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는 선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그것을 실행한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악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에게 ‘나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우리는 오렌지 주스와 폐식용유가운데서 폐식용유을 선택해서 마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게도 그것이 몸에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무엇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에 대한 앎이 당연하게도 그것을 마시지 않는다는 행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왜 소크라테스는 무지가 악덕이라 생각했을까요? 오렌지주스와 폐식용유를 구분하지 못하고 후자를 선택해 마셨다면, 그것을 멍청한 실수라고 타박할 수는 있을망정 악덕이라 칭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입장을 따른다면, 어떤 이가 악행이 자신에게 진실로 해롭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행하는 악행을 나쁘다고 할 수 없어집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 행위 중에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는 누구나 쉽게 악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만약 그 행동이 자신에게 진실로 이로운지 해로운지에 대한 앎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행동이고, 그 행동이 사실은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냐는 것입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그가 알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려 하지 않음이란 무엇일 까요? 자신이 알려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지 않는 상태에서 ‘알려 하지 않음’ 이 진실로 그에게 어떤 도덕적 책임의식을 준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지적했던 대로, ‘그릇된 행동은 무의식적’ 이라면, 그 그릇된 행동을 악이라 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만약 그릇된 행동이 악일 지라도 어떻게 그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 사람에게 선에 대한 지식을 심어줄 것 입니까? 무의식에서 의식적인 선의 추구로 나아가게 하는 매개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다른 말로 풀어보자면, 어떤 이가 무지의 상태에 있고, 그로 인해 무지가 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되어 있는 이가 어떻게 스스로의 무지를 들여다 볼 수 있을까요?
여기서 저는 악과 망각의 관계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망각은 무지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망각과 무지가 다른 뉘앙스를 지닌 점은 망각은 망각하기 이 전에 지식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무지는 그런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망각이란 어떤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자신이 망각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망각이란 마치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과도 같아서, 스스로의 기억을 지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무화하는 것이죠.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분명히 이러한 일들은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합리화’ 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합리화가 무엇입니까? 합리하지 않은 것을 이성적으로 합리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여 자신이 그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설득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자기가 자신을 충분히 속일 수 있고, 그 속이는 방법은 망각이란 것입니다. 만약 망각이 없다면 자신이 자신을 속일 수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속이려고 하는 순간에도 자기가 자신을 속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인지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기만이 가능하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분명해 집니다. 바로 망각이란 우리에게 항상 일어날 수 있으며, 지금도 내가 무엇인가를 망각하고 있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망각이라는 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 분명해 졌다면, 이제 인간이 어떻게 망각하는 지에 대한 것을 알기 위해 인간의 심리를 추적해 봐야만 합니다. 왜 인간은 스스로에게 무지를 선사하는 것일까요? 소크라테스 말대로 지(知)가 곧 선이라면, 인간은 사실 선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악하게 만드는 것이고, 이것은 사실은 이전의 지(知)가 곧 선이 아니라는 뜻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망각은 앎의 부재가 아니라 앎의 포기 혹은 앎을 버림이기 때문입니다. 선이 악한 행동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겠지요. 그런데 지(知)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지(知)를 버린다면 선이 악을 일으킨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되어버립니다.
바로 여기서 숨겨진 인간의 심리가 드러납니다. 어떤 지(知)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바로 그 앎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는 것에 대한 의식 (그것이 의식적이든 아니면 매우 은밀하게 일어나서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욕망 혹은 동기이든)이 있음을 드러내고, 바로 그 영향은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방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어떤 사람이 합리화 할 때, 처음에는 그가 스스로 합리화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설득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설득이 너무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욕망과 일치하는 방향의 설득이 자기기만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知)와 선(善)은 꼭 1대1 대응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어떤 것을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도덕을 보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싫어하여 결국에는 망각에 이를 수도 있고, 어떤 것을 모르고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자신에게 정직하고 순수하여 마치 씨앗이 자라 꽃을 피워내듯 선(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한껏 품어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지식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망각하고 있는 상태에서 내리는 결론인지 아닌지에 대한 지식은 자신으로부터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망각의 속성입니다. 망각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의 경로를 차단하고 있습니다. 내가 망각하고 있다면, 내가 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자기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구성한 신념체계를 어떻게 나의 논리로 깰 수 있겠습니까? 바로 나의 논리가 그 신념체계를 구성한 것인데 말이죠. 무한한 순환체계입니다. 망각에는 바로 이런 체계가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망각이라는 것은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과도 같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들어갈 수 있다면 빠져나오는 길 또한 있을 것 입니다. 다만 그 길은 내가 좋아하고 내가 동의할 수 있는 길은 아닐 것입니다. 즉, 절대로 나를 기쁘게 하지도 않고 나의 이성에도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어떻게 보면 전혀 선택할 이유가 없는 길이 바로 망각에서 빠져나오는 길일 것입니다. 망각에서 벗어나는 길은 (만약 내가 망각의 상태에 있다면) 나의 가치관, 세계관과 다른 것에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망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망각은 갇힌 순환체계라는 것을 이야기 한 바가 있습니다. 무한한 ‘자기동의’입니다.
그렇다면 망각에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 길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믿기 힘듬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에는 어떠한 이성적 이유가 뒷받침되어서 믿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믿음은 비이성적이고 모순적인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믿음” 이란 철저하게 나의 가치관과 세계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대상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차치하고서라도 믿음에는 그러한 언어적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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