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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재인 후보의 인생타임라인이 좀 휑합니다.
특히 인생의 가장 활발할 시기인 30-40대 활동이 텅 비어있습니다.
그에 비해 안철수 후보의 30-40대는 빼곡한 활동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문재인 후보의 청춘은 정말 텅 빈 것일까요?
문재인 후보의 청춘....그 서슬퍼렇던 시절로 돌아가보겠습니다.
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해 이듬해 김정숙씨와 결혼을 합니다. 이후 부산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시작합니다.
변호사를하면서 부산민주시민협의회,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직선제 개헌쟁취 변호사 서명운동, 민변 부산지역 모임 결성,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등 민주화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 그 근거지가 부산이었을뿐입니다.
광주시민 여러분,호남 유권자 여러분.
저의 모든 과오를 짊어지겠습니다.그러나 한 가지,제가 가져갈 수 없는 짐이 있습니다.
저에게 덧씌워진“호남홀대” “호남차별”이라는 오해는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그 말 만큼은,제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치욕이고 아픔입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모욕입니다.저와 당과 호남의 분열을 바라는 사람들의 거짓말에 휘둘리지 말아주십시오.그것만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엄혹했던5공 군부독재 정권 시절,부산의 민주화 운동은‘5월의 광주’를 부산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1987년 6월항쟁 전야 5월,노무현과 제가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연광주 비디오 관람회를 보려는 부산 시민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 열기는6월항쟁으로 이어졌고,부산 가톨릭센터는 명동성당처럼 부산6월항쟁의 중심이 됐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민주화는,호남과 호남 바깥 민주화 세력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3당 합당으로 호남이 고립됐을 때도,그에 반대한 영남의 민주화 세력은 지역 내에서 전라도니 빨갱이니 핍박받고 고립되면서도 호남과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결합이 김대중 정부를 탄생시켰고,노무현 정부를 탄생시켰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노무현과 제가 걸어온 길이었습니다.영남에서 지지 받지 못했던 노무현 대통령이었고,참여정부였습니다.그런데 정작 호남에서는 영남 패권주의라고 비난받는다면,그야말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참여정부가,압도적인 지지로 출범시켜준 호남의 기대에 못 미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대북송금 특검도 있었고,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도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광주가 정치적인 고향’이라고 말할 정도로 호남을 사랑했어도,호남사람처럼 호남의 정서를 알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호남이 듣기에 섭섭한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결단코 호남 홀대는 없었습니다.오히려 역대 어느 정부보다 호남을 배려했다고 자부합니다.
호남과 호남 바깥의 민주화 세력을 이간하여,호남을 다시 고립화시키려는 사람들의 거짓말에 휘둘리지 말아주십시오.호남과 호남 바깥의 민주화 세력이 다시 굳건하게 손을 잡을 때만이,세 번째 민주정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호남만으로도 안 되고,이른바‘친노’만으로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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