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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촛불집회는 왜 불법인가?
2009.6.9.화요일
"촛불을 드는 게 불법이야?"
이 순진한 질문에 얼마 후에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불법이다.
제10조(옥외집회와 시위의 금지 시간)
누구든지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는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집회의 성격상 부득이하여 주최자가 질서유지인을 두고 미리 신고한 경우에는 관할경찰관서장은 질서 유지를 위한 조건을 붙여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도 옥외집회를 허용할 수 있다.
제11조(야간 옥외집회의 조건부 허용)
① 법 제10조 단서에 따라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의 옥외집회를 신고하는 자는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 옥외집회를 하여야 하는 사유를 적고 필요한 자료를 제출하여야 한다.
② 관할 경찰관서장은 법 제10조 단서에 따라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의 옥외집회를 허용하는 경우에는 서면으로 질서 유지를 위한 조건을 구체적으로 밝혀 주최자에게 알려야 한다.
-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중
이 법이 바로 1962년 박정희 등이 주도했던 '군사재건최고회의'에 의해 만들어진 소위 '집시법'이다.
이명박 정권은 이 법의 개정을 추진하며, 사람들이 들고 있는 '초'를 예전의 '화염병'처럼 '시위 도구'로 만들어 버리려 한다. '마스크'만 쓰고 있어도 연행 가능한 법안이니 말해 뭐할까. 통과되지도 않은 이 법안은 이미 경찰에 의해 실질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10년간의 자유 덕분에 잊고 있었다.
청산되지 못한 기반 위에 성립한 참으로 위태로운 자유였음을.
여순사건(1948년 10월)이 있은 후, 이승만 정권은 반국가 단체 활동을 규제하기 위하여 그 해 12월,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그동안, 반국가 단체 활동과는 전혀 상관없음에도 이 법에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이 얼마인지는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전 대통령은 종신 집권을 위해 사회 전반을 억압하다, 부정선거로 촉발된 국민적 분노에 직면한다. 이날,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26일 장남인 이강석 소위에게 총기 피살)의 자택과 경무대(현 청와대)로 달려가 정문을 부순 열혈아들 중 183명이 경찰 등의 발포로 사망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26일 하야를 발표했고 대한민국 제1공화국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다음 해인 1961년 5월 16일.
육군 소장 박정희 등은 반공,친미,구악 일소,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군사 정변을 일으켜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이들은 4.19 당시 이승만 정권이 어째서 그토록 절박한 위기에 몰렸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해 6월 10일. 제3공화국이 출범(1963년 12월 17일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하기 전까지 입법,사법,행정을 총괄하던 '군사재건최고회의'는 <중앙정보부>를 발족시킨다. 전 사회를 감시, 통제하는 기능을 발휘했던 이 기구는 안전기획부를 거쳐 현재는 국가정보원으로 존재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민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한 목적으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1962년 12월에 제정했다.
3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1967년 9월 1일, 대간첩작전 수행 임무를 목적으로 <작전전투경찰순경(작전전경, 약칭 전경)>을 창설해 경찰력을 대폭 강화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총기 피살로 서거한 후, 세칭 '서울의 봄'이 왔다.
이때, 유신체제가 끝나며 민주주의가 구현될 것이라 여긴 이들이 참으로 많았다. 당시의 최규하 대통령은 민간인이긴 했으나, 여전히 유신체제하에서 선출되었음에도. 그 봄은 그 해 12월 12일 전두환의 신군부 등장으로 파국을 예고했고, 다음 해인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단행된다. 다음날 광주에서는 피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2년 후인 1982년 12월 31일에는 치안업무의 보조 임무를 목적으로 <의무전투경찰순경(의무경찰, 약칭 의경)>이 창설되었고, 작전전경이 의무경찰의 임무를 지원하는 것이 법제화되었다.
80년대의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을 거치고, 1992년에는 이른바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1997년에는 김대중 정권이, 2002년에는 노무현 정권이 있었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에 의해 조금씩 대한민국은 민주화되었다.
그것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많은 이들이 착각했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을 때에도, 이 정도로 역사를 후퇴시킬 줄은 상상 못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데이트를 왜 촛불시위가 있을 명동에서 하냐"며 아베크족을 잡아가는 세상이 도래하다니.
'파시즘' 정권이나 자행할 억압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 떠올려야 한다.
1948년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8차에 의해 개정되었으나 여전히 존재한다. 199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4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 법의 폐지를 주장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추모를 위해 드는 '촛불'까지 불법으로 보는 근거가 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수차례의 위헌 논의가 있었으나, 2009년 헌법재판소의 합헌 판결까지 받았다. 이 법은 13차에 달하도록 개정, 개악되어 지금도 존재한다.
징병제인 이 나라에서는 줄 한 번 잘못 서면 '군인' 대신, '전경'이 된다.
'국방의 의무'는 그나마 납득할 수라도 있다. 그러나 '국방의 의무'에 '치안 업무 보조'까지 포함시킨 것은 얄팍한 사기에 불과하다. 근무시간은 고무줄, 복무환경은 최저수준이고, 기동부대에 배치된 '전의경'들의 대부분은 원하지도 않는 권력자들의 '곤봉'과 '방패'가 되어야 한다.
이들은 1970년 12월 31일 공표, 시행된 <전투경찰대설치법>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 법은 14차에 의해 개정되었으나 권력의 충실한 방패막이로 지금도 기능하고 있다.
이 세 가지 법, <국가보안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전투경찰대설치법>은 독재 권력의 비호를 위해 제정된 대표적 악법들이다.
시위에는 으레 전의경이 동원되고, 시국이 불리해지면 <국가보안법>을 발동시켜 안보 논리로 국민을 위협하는 것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다. 독재자가 그것을 법제화시킨 것일 뿐이고, 세월이 흐르며 그것이 일상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문민이나 지난 10년의 집권 중에도 격렬한 시위는 있었다.
그때도 전의경은 동원되었고, 그때도 '국보법'으로 입을 틀어막힌 이들은 있었다.
어느새... <국가보안법>은 제정된 지 61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47년, <전투경찰대설치법>은 39년이 흐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이 법들을 폐지하지 못한 후유증을 지금 이 순간, 온몸으로 체감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을 것이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전근대의 악습, 독재의 잔재가 너무 많다.
그런데도 그것을 잊고 살아왔다.
어느새 6월이 되었다.
소위 MB 악법들의 통과는 한시적이나마 늦추어졌지만, 그의 임기는 아직도 3년이나 남았다.
얼마나 더 역사가 후퇴할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조차 없다.
몇 개의 날짜를 적어 놓고 잊지 말아야겠다.
2010년 6월 2일. 이날은 5회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일이다.
2012년 4월 11일에는 19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2012년 12월 19일은 18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누군가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 저 세 가지 악법 폐지를 정면으로 이슈화하는 것을 보고 싶다.
시위를 전의경이 가로막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 아니었다. 촛불이 불법인 이유 또한 당연한 합리가 아니었다.
어느새 잊히고 있는, 정부 유지를 위해 당연한 법제처럼 주장되는 저 악법들을 한시라도 빨리 역사의 유물로 만들어야 한다.
"촛불을 드는 게 불법이야?"라는 순진한 질문에, "아니. 그건 네 맘이야"라고 대답해 주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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