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색선전·도청·SNS 여론 조작.. 콜롬비아 출신 세풀베다의 고백] - 비즈니스위크와 옥중 인터뷰/ 전화 도청해 언론에 약점 노출.. SNS 계정 3만개로 여론 몰이/ 2012년 멕시코 대선 당시 니에토 당선에 결정적 역할"/ 10여년간 한 번도 적발 안 돼.. 다른 나라도 100% 조작 가능"
2012년 7월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엔리케 페냐 니에토 후보가 대선 승리를 선언하고 있었다. 참신한 이미지를 앞세워 승리한 그는 취임 일성으로 '부패 척결'과 '정치 투명성 회복'을 외쳤다. 같은 시각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의 한 작은 아파트. 한 30대 남성이 컴퓨터 6대 앞에 앉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페냐 니에토의 승리 선언을 듣고, 드릴로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휴대전화에 구멍을 뚫은 뒤 망치로 내리쳐 산산조각 냈다. 문서를 찢고 종잇조각을 변기에 흘려 보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익명으로 빌린 서버에 저장된 정보도 즉시 지웠다.
'정치 해커' 안드레아 세풀베다(31)가 페냐 니에토의 당선을 위해 해온 해킹·여론 조작 관련 정보를 파기하는 장면이다. 해커이자 온라인 선거 캠페인 전문가인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중남미 9개국 대선에 개입해왔다. 세풀베다는 지난 31일(현지 시각)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인터뷰에서 "진흙탕 싸움이나 흑색선전, 루머 퍼뜨리기 등 '더러운 전쟁'을 해왔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2012년 멕시코 대선은 세풀베다의 노하우가 집대성된 무대였다. 그는 두 상대 후보의 선거본부 라우터(내·외부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통신 장비)에 악성 소프트웨어를 심었다. 경쟁 후보의 연설문 원고와 유세 일정, 선거운동 전략 등이 입력되는 대로 속속 들여다볼 수 있었다. 5만달러(약 5800만원)짜리 최첨단 해킹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상대 후보 측 휴대전화도 도청했다.한 경쟁 후보가 사업가에게 600만달러의 선거 자금을 요구하는 통화를 도청해 언론에 흘린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무엇보다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 여론 조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풀베다는 "사람들은 SNS에 올라오는 글을 시민의 자발적인 견해처럼 보고, 언론이나 전문가 말보다 더 신뢰한다"고 했다. 그러나 SNS를 조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실제 사람이 운영하는 계정처럼 보이도록 1년 이상 관리한 계정 수천 개를 이용해, 페냐 니에토에게 유리한 주제를 계속 언급했다. 또3만여 개의 가짜 SNS 계정을 만들어 자기편에 유리한 글에 '좋아요'나 '팔로'를 무더기로 눌러 여론 흐름을 조작했다. 세풀베다는 선거 운동 중반에 환율 문제를 계속 공론화했는데, 자신이 훔쳐본 상대 후보 내부 보고서가 환율 문제를 자체 약점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실재(實在)보다 인터넷을 더 믿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상대 후보 진영에 유권자들이 짜증을 내도록 만드는 전략도 썼다. 사람들이 자는 시각인 새벽 3시에 상대 후보 측으로 사칭한 자동 녹음 전화를 유권자 수만 명에게 걸어, 상대 후보에게 짜증을 내도록 유도했다. 동성애자처럼 꾸민 페이스북 가짜 계정으로 보수적인 가톨릭계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해,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10여 년 동안 9개국 대선에 개입했지만 한 번도 수사 당국에 적발되지 않았다. 세풀베다의 수법은 그가 지난 2014년 범죄행위를 고백하는 대신 형을 감면받는 조건으로 감옥행을 택한 뒤에서야 드러났다. 세풀베다가 자신의 중개인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중개인이 콜롬비아 내 반군 조직에 "2014년 대선에서 세풀베다가 정부와 반군의 협상에 반대하는 후보를 도왔다"고 흘린 뒤 반군으로부터 목숨을 협박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10년형을 선고받고 콜롬비아에서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지금 내 이야기를 언론에 고백하는 까닭은 선거에서 해커들이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을 대중이 전혀 모르기 때문"이라며 "그들을 막으려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세풀베다는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도 해킹과 여론 조작이 100% 가능하다"고 단언했다. 미국 사이버 보안 업체인 이라타 시큐리티의 최고기술경영자(CTO) 데이비드 메이너는 "미국을 포함한 어느 곳에서도 세풀베다가 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며 "나에게도 상대 후보의 이메일을 확보해달라는 등 선거 관련 의뢰가 들어온다"고 했다. 세풀베다의 중개자인 정치 컨설턴트 후안 호세 랜던은 현재 미국의 한 주요 대권 주자 밑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