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상리뷰
트루먼 쇼 일러스트 그리신 분의 출처를 찾습니다.
출처를 남기고 싶은데, 출저가 정확치 않아 말씀드리지 못하고 썼습니다.
2. 활자 리뷰
<트루먼 쇼>는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인 1998년 10월 24일에 개봉한 영화입니다.
사람들이 <트루먼 쇼>를 보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엔딩 장면을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트루먼 쇼>의 오프닝 장면을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영상을 보시는 많은 분들이 오프닝 장면은 크게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는 <트루먼 쇼>의 오프닝 약 2분을 분석하여,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메시지와 의미, 그리고 개인적 해석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트루먼 쇼>가 상영됨과 동시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제작자 크리스토프가 ‘트루먼쇼’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트루먼이 ‘이 쇼에서 자신을 데리고 나가 달라고 외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정보가 있는데,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이 하나의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트루먼이 이 세상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장면을 가장 첫 장면으로 보여줬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쇼를 만든 주인공과 쇼 안에서 쇼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주인공의 대비된 삶과 생각을 보여주는 장면
이라 봤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두 사람이 가공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복선’을 말하는 장면이 바로 오프닝과 동시에 보여주는 두 사람의 대사라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와 동시에 영화 속 가장 큰 주제인 ‘당신은 관음증에 중점을 두고 영화를 볼 것인가?’와 함께
‘태어났을 때부터 프로그램이라는 쇼 윈도우에서 삶을 지내는 트루먼을 중심으로 영화를 볼 것인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선택도 말해주는 장면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트루먼 쇼>의 감독인 피터 위어는 이와 같은 편집을 통해
‘트루먼 쇼’ 제작자 크리스토프와 트루먼이 관객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합니다.
그럼 두 사람의 대화를 좀 더 자세히 분석해보겠습니다.
먼저 크리스토프가 말합니다.
“관객들이여. 트루먼은 가짜가 아니다. 각본이 없기 때문에 그는 진짜 인생을 삽니다.”
그러자 트루먼이 말합니다.
“관객들이여. (생방송 속에서)나는 가망이 없다. 하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이 상황을 함께 극복하자.”
그 다음, 크리스토프가 말합니다.
“이 프로는 시청자들에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이 말에 트루먼이 반박합니다.
“크리스토프, 자네 미쳤구먼?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리고 이 장면이 지나가면,
트루먼의 부인 역할을 맡은 ‘한나 길’, 트루먼 쇼에서는 ‘메릴’라는 역할을 맡은 그녀를 보여주며
그녀가 트루먼 쇼에 임하는 자세에 대한 인터뷰가 나옵니다.
아!! 여기서 잠시.
중간 중간에 배우들의 이름이 나오는 자막을 잠시 보겠습니다.
이 배우들의 이름은 영화 <트루먼 쇼>에 출연한 배우들의 이름이 아닙니다.
TV 프로그램 ‘트루먼 쇼’에서 출연한 배우들의 이름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관객이 보는 영화 오프닝이 <트루먼 쇼>오프닝 장면이 아닌,
TV 프로그램 ‘트루먼 쇼’의 오프닝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한나 길, 루이스 콜트레인
이 이름은 TV프로그램 ‘트루먼 쇼’에 출연한 출연자들의 본 이름입니다.
TV 프로그램 ‘트루먼 쇼’에서 한나 길이라는 배우는 트루먼의 아내인 ‘메릴 버뱅크’라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고,
배우 루이스 콜트레인은 트루먼의 둘도 없는 친구 ‘말론‘역을 맡은 배우라는 걸 소개하는 영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2분의 오프닝 장면은 영화 <트루먼 쇼>의 오프닝이 아닌,
TV 라이브 프로그램 ‘트루먼 쇼’의 오프닝 장면인 것입니다.
그리고 소개 자막이 넘어가면,
트루먼의 아내 ‘메릴 버뱅크’ 역할을 맡은 한나 길라는 여배우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트루먼 쇼’는 나의 삶이다.”
하지만 영화 <트루먼 쇼>의 중후반부에 메릴이 트루먼에 의해 겁을 먹고 일을 못하겠다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트루먼 쇼’가 자신의 삶이라 말하는 연기자 한나 길에게 트루먼이 말합니다.
“그게 어쩔 수 없다고? 그럼 내가 죽거든 내 시체를 먹고 힘을 내줘라. 메스꺼운 인간아.”
트루먼의 대사가 끝나면 트루먼의 영원한 친구 말론 역할을 맡은 루이스 콜트레인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약간의 통제는 있지만 ‘트루먼 쇼’는 진짜다.”
하지만 그 역시도 자신이 직접 트루먼을 위로하는 것이 아닌
제작자 크리스토프의 아바타가 되어 그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두 사람의 인터뷰엔 어폐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트루먼 쇼’가 진짜 자신의 인생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간의 통제라 말하는 것이 트루먼이라는 한 인간에게 너무도 많은 상처를 남기게 했죠.
이처럼 영화 <트루먼 쇼>는 2분이라는 오프닝을 통해 제작자, 출연자, 그리고 그들에 의해 착취를 당하는
주인공 트루먼의 편집된 대화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미친 방송’이라는 걸 밝히고 있습니다.
즉 트루먼이라는 인물에게 수백 명의 사람들이 빨대를 꼽고 그를 착취하는 현장인 것이죠,
그래서 저는 영화 <트루먼 쇼>의 감독인 피터 워어가
“나의 시체를 먹고 힘을 내줘라. 메스껍다.” 라는 대사를 넣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제작자 크리스토프가 했던 말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크리스토프는 TV 라이브 프로그램 ‘트루먼 쇼’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2분 간 봤던 장면은 영화가 아닌 라이브 프로그램의 오프닝이었습니다.
왜 영화 <트루먼 쇼>를 만든 피터 워어가 이렇게 연출을 했을까?
저는 개인적으로 이걸 보고
관객도 모두 트루먼 쇼를 구경하는 관객이자, 시청자이자, 이 범죄의 공범으로 만드는 기법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러한 연출을 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없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그 관객이 극장을 나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외로운 주인공 ‘트루먼’이 자신과 끝까지 함께 하자고 말했으니까요.
이처럼 <트루먼 쇼>는 영화의 첫 시작부터 영화가 가지고 가려는 아이덴티티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모두 TV 라이브 프로그램 ‘트루먼 쇼’ 제작에 공범이고, 또 방관자이며, 시청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트루먼의 여정을 끝까지 함께 바라봐야 한다.' 라고 감독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까도 이야기 했 듯,
그는 수백 명에게 착취당하는 외롭고도 슬픈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객은 그를 응원하고 그의 행동에 끝까지 환호와 찬사를 보내야 한다고
감독 피터 워어는 <트루먼 쇼> 오프닝 장면을 통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재밌는 현상이 만들어집니다.
이와 같은 연출기법으로 인해 영화 <트루먼 쇼>를 제작한 ‘피터 위어’ 감독이
마치 TV 라이브 프로그램 ‘트루먼 쇼’의 제작현장을 고발하는 고발자처럼 보이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즉 ‘픽션’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팩트’가 돼버리면서 순식간에 다큐멘터리의 색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감독이자 고발자인 ‘피터 위어’가 철저하게 중립적인 노선을 걷는 것처럼 보이게 되면서
관객의 감정선을 보다 쉽게 움직이게 만드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감독은 이 위치를 이용하여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트루먼이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 그리고 공허함을 보다 쉽고 깊이 있게 전달하는 효과를 누립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나 역시 트루먼 쇼 속에서 살고 있진 않을까?’ 라는 질문과 혼란을 가지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트루먼 쇼>는 영화 도입부를 통해 복선과 메시지 그리고 감독의 인자기급 위치 선정을 통해
관객들이 영화 속에 깊이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트루먼의 여정을 심히 공감하며 영화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끝에서 그의 선택에 박수와 갈채를 보내게 합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제작자 크리스토프를 악으로 봐야 할 것인가?
저는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트루먼을 자신의 자식처럼 생각한 인물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장면이 한 바탕 소동을 벌인 뒤,
잠자는 트루먼을 쓰다듬는 장면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전 장면에서 트루먼의 첫 사랑인 ‘실비아’가 작은 화면에 비치는 트루먼을 쓰다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곧이어 크리스토프가 트루먼을 쓰다듬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로 크리스토프는 트루먼에게 썩은 진짜 세상이 아닌 사회와 유사한 유토피아를 만들어주고자 했습니다.
이상하지만, 행복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허나 아기가 소년이 되고, 또 청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면, 부모의 곁을 떠나 자신의 삶과 길을 만들어나갑니다.
그래서 영화의 첫 장면에서 트루먼은 자신의 아내역할을 맡은 한나 길과
친구인 말론 역할을 맡은 루이스 콜트레인에게는 ‘나의 시체를 먹고 힘을 내라’ 비난했지만,
크리스토프에게는
‘당신이 생각하고 만든 세상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런 세상을 원한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미친 거다.’
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트루먼이 마지막에 그와 같은 엔딩을 보여주며 자신의 길을 떠났다 생각합니다.
저는 <트루먼 쇼>가 부모가 아이의 삶에 너무도 많은 관여를 하여 생기는 가족 간의 이념적 갈등과
관음증이라는 인간의 습성,
그리고 더 나아가 썩어버린 현실 세계 (대표적으로 빌 클린턴의 지퍼 스캔들)에 대한 우회적 비판을 담은 영화가
바로 <트루먼 쇼>라고 소개하면서 리뷰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