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곽노현 (사)징검다리교육공동체 이사장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지만 한국정치는 예외다. 이제 바닥을 쳤다 싶으면 곧 더 추한 모습으로 곤두박질친다. 국민과 여론은 안중에 없이 '여제'와 '짜르', '소영웅'의 권력의지만 번득이는 현실정치에 시민들은 진저리를 친다. 보수종편은 이때를 놓칠세라 똘똘 뭉쳐서 정치혐오를 부추긴다.
한 달째 진행돼온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의 공천과정에서 정당민주주의는 눈을 씻고 찾아도 안 보인다. 유승민 공천배제 파동은 새누리당이 국회의원을 대통령의 돌격대원으로 여긴다는 사실과 공당으로서 최소한의 민주성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 행태야말로 정당해산감이 아닐 수 없다.
주요정당들이 지난1달간 시종일관 막장드라마를 펼치는 바람에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지만 이번 총선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여당과 제1야당이 선거사령탑을 상대정당의 대표적인 경제전문가를 스카우트해서 맡겼다는 사실이다. 더민주당이 새누리당에서 영입한 김종인과 맞불차원에서 새누리당이 질세라 영입한 강봉균이 그들이다.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에 복무하고 노무현 정권에 반대한 김종인이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로 화려하게 복귀한 것을 시샘한 것일까. 김대중 정권 내내 경제관련 수석 2회와 경제부처장관 2회를 지내고 노무현 정권에서 여당정책위의장까지 지낸 강봉균이 새누리당의 선대위원장직을 덥석 물었다. 여야 간에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는 마당에 서로 적장을 데려다 사령탑을 맡긴 꼴이다.
정무직을 두루 섭렵한 사람이 당적을 바꿀 때엔 뚜렷하고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영혼과 철학이 없는 파렴치한 변절행위에 다름 아닐 것이다. 허구한 날, 날을 세우며 사사건건 싸우던 상대정당에 기술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하루아침에 넘어갈 수 있는가.
김종인과 강봉균뿐 아니다. 진영이 더불어민주당으로 넘어오고 조경태가 새누리당으로 넘어갔다. 그래도 철새소리가 크게 들리진 않는다. 여야정당 간 넘나들이가 쉬워진 셈이다. 이런 크로스오버 현상은 안철수와 김종인의 등장에 힘입은 것이다.
반운동권 중도를 표방한 안철수와 김종인은 한국정치를 전반적으로 우 클릭시켰다. 뿐만 아니다. 김종인은 안철수, 박근혜, 문재인으로 갈아타면서 한국 주요정당의 거리를 좁혔다. 이제 한국정당은 김종인이 기웃거린 정당과 그렇지 않은 정당으로 구별된다고 볼 수 있다.
김종인표 정당들은 김종인의 가치를 경제민주주의의 대부라는 데서 찾는다. 87년 6월 시민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의 결과로 87년12월에 헌법을 전면 개정할 당시, 헌법 제119조 2항에는 "경제주체 간 조화를 위한 경제민주화"가 국가의 경제개입근거 중 하나로 신설된다. 그것이 김종인의 제안을 수용한 결과이며 그것에 힘입어 재벌규제의 헌법적 정당성이 확보돼 온 것은 사실이다.
경제민주화를 위한 김종인의 드러난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김종인은 1980년과 1984년 전두환에 의해, 1988년 노태우에 의해 3회 연속 전국구로 국회의원이 된 진기록 보유자다. 그리고 2004년에서 08년까지 조순형 민주당에서 다시 한 번 비례대표를 지낸다. 결국 그는 총16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입법자로 활동했다.
그럼에도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종인은 16년의 국회의원 활동기간 중 경제민주화를 위한 입법활동에 나선 기록이 전무하다. 특히 자신의 제안으로 헌법의 명령이 된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당당히 관련입법을 추진할 수 있었던 1988년부터 4년간이나 2004년에서 08년까지 국회의원 시절에도 경제민주화 관련 대표발의입법을, 신규입법은 물론이고 개정법안도 단 하나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총16년 동안 경제민주화 법안은 고사하고 일반 법안조차 대표 발의한 실적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셀프공천으로 비례대표 5선을 바라본다는 사실뿐 아니라 이것도 대한민국 국회역사에서 깨지지 않을 대기록이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렇다면 김종인이 셀프공천으로 물의를 일으킨 것이 제1야당을 살리려는 마지막 충정과 경제민주화를 위한 마지막 집념으로 이해해주기가 참 쉽지 않다.
안철수도 박근혜도 문재인도 반한 김종인의 경제민주주의는 우파경제민주주의다. 김종인이 경제민주주의 경제철학에 눈떴다는 독일에서는 작업장수준의 공동결정제도는 물론 이사회차원의 공동결정제도가 자리 잡은 지 40년이 지났다. 독일의 대기업은 노동조합추천이사가 감시이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도록 법제화돼 있다. 독일의 경제적 번영은 노사공동결정제도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인표 경제민주주의에는 이 부분이 통째로 빠져있다. 그래서 김종인의 경제민주주의는 공동결정제도가 안착하기 전인 5,60년대 독일기민당의 질서자유주의형 사회적 시장경제라고 할 수 있다.
경제민주주의를 주창하는 김종인이 사민주의적 경향의 정의당과 정책연대조차 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해온 이념적 배경이다.
한마디로 김종인의 경제민주주의는 편협하고 구시대적이다. 공정거래법과 재형저축형 경제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으로 오늘날의 양극화를 완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종인표 경제민주주의로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의 사회경제이념이 수렴했기 때문에 주요 3당은 사회경제이념에서 차별성이 크지 않다. 한국현대사 해석에서는 이념적 차이가 날지 몰라도 사회경제정책으로는 큰 차이가 있기 어렵다.
이것이 김종인이 주요3당의 킹메이커를 자임하는 까닭이고 강봉균이 한달음에 새누리에 둥지를 틀 수 있는 배경이다. 국민의 입장에서 누가 어딜 가든 아무런 희망을 느낄 수 없고 냉소와 불신만 깊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한국정치는 막장으로 끝 모를 타락을 경험중이다. 한국정치의 미래는 암울하다.
정치민주주의를 굳건히 세우려면 경제민주주의와 지역민주주의, 그리고 학교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3대기둥을 먼저 제대로 세워야 한다. 그에 비례해서, 딱 그만큼만 정치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10년 연속집권기간 중에 민주주의의 3대기둥을 튼튼하게 세우는 데 역부족이었다. 학교민주주의는 2010년 진보교육감시대를 맞이해서 비로소 시작했고 지역민주주의 역시 강력한 중앙집권법제와 관행에 억눌려있다.
경제민주주의의 사정은 아예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기업과 산업차원의 경제민주주의의 토대는 노조 조직율이다. 노조 없이는 노사 간에 경제력조화를 꾀할 방안이 없다. 그럼에도 노조 조직율은 93년에 21%를 찍은 후 계속 하강곡선을 그린 끝에 2015년 현재 10.3%에 머물고 있다. 93년 이후 민주화시대 23년을 거치면서 경제민주주의 토대가 반토막이 난 셈이다. 저녁이 없는 삶이 계속되고 세습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배경이다.
반면 경제사회의 최상층부에 자리 잡은 재벌의 경제지배력과 사회지배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각 부문의 파워 엘리트 2천여 명이 재벌대기업의 사외이사가 돼 재벌(가)의 이익에 공식적으로 복무한다. 다른 한편 비정규직비율로 대표되는 노동사회의 불안정성과 소득격차는 날로 커져왔다. 각종 국제비교통계에서 도출되는 "분노의 숫자들"이 웅변하듯이 이것이 경제민주주의 없는 한국경제사회의 현황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경제민주주의로 뒷받침되지 못한 정치민주주의의 부패와 타락, 무기력과 무책임을 생생히 보고 있다. 지역자치 없는 정치민주주의의 허울을 보고 있다. 학교민주주의 없는 정치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보고 있다. 진짜 걱정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그나마 지탱해온 것은 일부시민의 전투적 시민성이었지만 이것도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재생산되지 않는다. 자칫하면 매우 암울한 미래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이제 시민성의 굳건한 토대위에 민주주의를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육계를 석권한 진보교육감들이 학교민주주의를 주창하며 학생들의 민주시민성을 길러주고자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민주주의의 한 기둥을 세우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파고이후시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주인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해준다.
강하고 당당한 자아,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자아가 없이는 민주주의를 구축할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거의 없다. 알파고이후시대의 요청에 발맞춰 진보교육감들이 힘을 합쳐 지금의 시대착오적인 교육체제를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민주시민교육체제로 바꿔내야만 한다. 이래야만 한국 민주주의가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